그리고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아침이 밝았습니다.
저는 주인님이 깨워주시기를 기다리며 침대 속에 웅크려 있었지만 주인님은 평소와 달리 방 밖에서 제 이름을 불러 깨우셨습니다.
분명 어제의 일 때문이겠죠.
주인님은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하셨는지 눈가에 다크서클이 남아 있었습니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돌려보는 주인님과 저 사이에는 두터운 벽이 생긴 기분이 들었습니다.
주인님을 실망시켰다는 생각에 더욱 스스로가 미워졌습니다.
아침식사를 하는 내내 주인님과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평소 같으면 맛은 괜찮니, 마음껏 먹어도 된단다.
이런 말을 상냥한 목소리로 해주시는 주인님인데, 오늘의 주인님은 묵묵히 식사를 하실 뿐이었습니다.
식사가 끝난 후에는 주인님은 제게 마법의 근원과 진보 과정이 기록된 책을 몇 권 주셨습니다.
다만 주인님의 방에 놓여있는 것처럼 딱딱한 책이 아니라 신화나 동화도 중간중간 들어 있는 책이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버려지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책의 내용을 완벽하게 습득해 주인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게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책을 읽던 도중 주인님이 제 방문을 열고 들어오셨습니다.
편한 자세로 침대에 드러누워 책을 읽고 있던 저는 갑작스런 방문에 황급히 입고 있던 옷차림을 정돈했습니다.
누워 있다보니 셔츠가 접혀 올라가 배 부분이 드러났는데 혹시 주인님이 보신건 아니겠죠?
조바심내며 주인님의 명령을 기다리던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최근 플로라 언니와 함께 놀러가며 만난 아이들이 저와 함께 강가에 놀러가기 위해 찾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인님의 말을 듣고 저는 서둘러 잠옷을 평상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아이들과 놀러가는데 주인님이 보호자로 동행한다는 말에 또 민폐를 끼치고 말았다는 생각에 더욱 우울해졌습니다.
분명 저는 주인님의 노예인데 오히려 은혜만 입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작 주인님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으시지만요.
"저기. 아이린은 좋아하는 남자애라던가 있어?"
"에?"
멍하니 걷고 있던 저는 갑작스런 질문에 놀라고 말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되묻자 질문한 여자아이는 앞쪽에서 걸어가는 남자애들을 눈짓했습니다.
"아이린도 좋아하는 남자애 한 명 정도는 있을거 아냐. 역시 크리스를 좋아하는거야?"
크리스는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는 저 남자아이 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놀 때도 늘 앞장서서 놀이를 주도하고, 운동도 곧잘 하는 아이라 다른 여자애들에게도 인기가 많습니다.
물론 저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입니다.
제게는 오직 주인님 뿐이니까요.
저를 밑바닥에서 끌어올려주신 구세주.
다재다능하시면서도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는 주인님의 곁에 있다보면 제 또래의 아이들은 철없는 동생 정도로 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어... 그렇겠지?"
적당히 얼버무리니 그 아이는 '역시 그렇지?' 라는 소리를 하며 크리스를 쳐다봤습니다.
눈에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면 크리스를 좋아하는건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그런 소리를 해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습니다.
강가에 도착하고 나서는 강에 발목까지 담근 채 가볍게 물장구를 쳤습니다. 남자애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자기들끼리 내기를 하며 그물을 던져대고 있었습니다.
슬쩍 주인님이 있던 곳을 쳐다봤지만 주인님은 어디 가셨는지 이미 사라져 있었습니다.
주인님이 돌아오신건 그로부터 시간이 꽤나 흐른 후였습니다.
돌아올 때는 제가 처음 자위를 했던 그날 찾아온 여자와 함께였습니다.
그 여자가 주인님과 화기애애하게 대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당장이라도 그 사이에 끼어들고 싶었지만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 주인님과 얼굴을 마주볼 자신조차 없었습니다.
그렇게 주인님과 아르웬이라는 여자가 즐겁게 담소 나누는 것을 지켜보던 저는 차라리 주인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직접 물고기를 잡아서 선물한다면 주인님도 조금은 좋아해주시 않으실까라는 생각에 저는 맨손으로 물 안을 헤집으며 물고기를 찾아다녔습니다.
작은 물고기들은 제 손을 피해 금세 도망가버렸고 결국 저는 물이 깊은 편인 강 하류까지 내려가 제 팔뚝만한 물고기를 잡는데 성공했습니다.
묵직한 물고기를 잡아올리자 녀석은 계속 펄떡거렸지만 물 밖에 있던 시간이 길어지자 결국 축 늘어졌습니다.
때문에 바지와 셔츠가 조금씩 젖었지만 주인님께 드릴 큰 생선을 잡았다는 생각에 저는 무척 기뻤습니다.
그렇게 물고기 잡는게 끝나고, 잡은 물고기들을 나무 꼬챙이로 꿰뚫어 불타는 장작 위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생선이 모두 익자 크리스는 생선이 매달려 있는 꼬챙이를 가장 먼저 제게 건네 주었습니다.
다른 여자애들은 그런 저를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제 신경은 온통 주인님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삼촌과 아르웬 씨에게 생선을 나누어 줘도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제 말에 크리스를 비롯한 아이들은 흔쾌히 수락해주었고, 저는 여자애들 두 명과 함께 주인님에게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막상 주인님 앞에 서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저보다 양 옆의 여자애들이 먼저 주인님에게 권유를 했습니다.
"저기, 괜찮으시면 함께 드실래요?"
"생선도 엄청 많이 남았으니까 괜찮아요!"
주인님과 아르웬은 잠시 고민하는 것 같길래 저는 최대한 용기를 내서 주인님에게 부탁했습니다.
"...함께 먹어주실거죠?"
결국 주인님은 고개를 끄덕여 주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주인님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생선을 먹었습니다.
장작 위에 올려져 있던 생선 중 제가 직접 잡은 생선이 모두 익자 저는 주인님에게 그 생선을 곧바로 갔다 드렸습니다.
주인님은 생선을 받으시고는 '고맙다'고 나직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함박 웃음이 지어졌습니다.
다시 자리로 돌아오고 나서야 남자애와 여자애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저와 루디 씨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생각해보면 갑자기 자리에 일어나 주인님에게 생선을 드리고 왔으니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저는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을 숙인 채 생선을 야금야금 먹어야 했습니다.
그 후로는 긴장이 풀려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들과 물장구를 치며 놀았습니다.
그리고 해가 슬슬 지기 시작할 무렵, 다가온 주인님이 제게 외투를 걸쳐주셨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방금 전 강 하류에 물고기를 잡으러 갔을 때와 물장구를 치면서 제 셔츠가 젖었단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필이면 밝은 색의 셔츠라 옷이 몸에 달라붙으면 속옷이 비칠 뻔 했지만 상냥한 주인님의 배려 덕분에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함께 광장까지 가는 길 내내 주인님의 코트에 코를 파묻은 채 냄새를 맡았습니다.
주인님의 냄새를 맡았더니 어느새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렇게 중독된 것처럼 냄새를 맡다보니 어느새 광장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노을이 지기 시작해서 그런지 광장에서 데이트를 하던 연인들과 물건을 팔던 사람들도 슬슬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곳부터는 각자 길이 달라 아이들과 헤어졌습니다.
주인님과 단 둘이 돌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문득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그 어색한 상황이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습니다.
부끄러움을 꾹 참고 슬금슬금 주인님의 곁에 다가갔습니다.
그런 저를 쳐다보던 주인님과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주인님의 커다란 손이 제 손을 부드럽게 잡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주인님의 손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행복하게 가게로 돌아왔습니다.
본래의 주인님과의 관계를 되찾았다는 생각에 폴짝폴짝 뛰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습니다.
돌아온 저는 몸을 깨끗하게 씻고는 주인님이 저녁을 차리시는 것을 도와드렸습니다.
맛있게 튀겨진 닭튀김과 빵, 샐러드가 저녁 찬거리였습니다.
주인님은 평소에 잘 드시지 않던 맥주를 드시더니 금세 취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평소 늘 이지적인 모습만을 보여주시던 주인님과는 달리 어린아이처럼 구는 주인님의 모습이 무척 귀여웠습니다.
주인님을 대신해 접시와 냄비를 치우던 저는 주인님이 일어나신 순간 비틀거리는 것을 보고는 바로 달려와 주인님을 부축했습니다.
주인님과 갑작스레 몸이 가까워지며 주인님의 냄새와 술냄새가 뒤석인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습니다.
주인님의 어깨를 부축하고 나서야 저는 주인님과 얼굴이 무척 가까워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꿀꺽.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습니다.
하지만 비틀거리던 주인님이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을 확인하고는 주인님을 급히 침대로 옮겼습니다. 다행히도 잠이 드신 것 뿐인지 호흡은 정상적으로 하고 계셨습니다.
주인님을 침대에 눕혀놓고, 저는 나머지 뒷정리를 하기 위해 나가려는 순간 주인님이 제 팔을 낚아챘습니다.
"...가지...마."
처음 들어보는 주인님의 애원이었습니다.
물론 잠결에 흘리신 말이겠지만 주인님이 저런 말을 하시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다음 순간 저는 주인님의 강한 팔힘에 이끌려 주인님의 품 안에 안겼습니다.
"꺄악?!"
작게 비명을 질렀지만 술에 취한 주인님이 이번 기회에 제 몸을 안으시려는 줄 알고 속으로는 약간 설렜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