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주인님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이 뒤의 일을 기대하던 저는 한참 후에야 주인님이 잠드셨다는걸 깨달았습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아쉽다는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주인님과의 관계를 회복한지 하루도 안 되서 몸을 섞으면 주인님과 저의 경계선이 완전히 일그러져 버리고 말겁니다.
하지만 주인님과 몸을 섞는 것을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
주인님은 잠을 주무시면서도 저를 꼬옥 끌어안고 계셨습니다.
주인님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열기를 온 몸으로 느끼며 주인님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습니다.
그렇게 주인님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던 저는 주인님의 입술에서 시선이 멈췄습니다. 분명 주인님도 저 입술로 수많은 여자들에게 입을 맞추셨겠지요.
오늘 봤던 아르웬이라는 여자와. 그리고 영애라는 여자와도 이 입술로 어른의 키스와 사랑을 속삭이는 말을 하셨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살짝 화가 난 저는 주인님이 뺨을 쿡쿡 찔러 완전히 잠드셨는지 확인했습니다.
감히 주인님의 얼굴에 손을 대다니 불경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지만 이 때의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주인님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기만 하실 뿐 눈을 뜨지는 않으셨습니다.
저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금 이 순간만이라면 괜찮겠죠.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어 주인님에게 가까이 갖다댔습니다.
그리고는 주인님의 입술에 제 입을 맞췄습니다.
서로의 입술이 맞닿는 감각은 황홀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래서 연인들이 늘 키스를 하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달콤한 키스는 특히나 기분 좋은 것 같았습니다.
제게 있어서는 첫 키스지만 주인님은 제 첫 키스를 받아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시겠죠.
그래도 괜찮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주인님이 술을 마시지 않으셨을 때도 키스를 받기 위해 노력할테니까요.
그러니 이번 키스는 저만의 추억인 셈입니다.
영원히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 말이에요.
늦잠을 자는 바람에 이미 시간은 점심 때도 지나 있었다. 지독한 허기에 뱃속에서는 연신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벌써 점심때가 한참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 더 잔다는게 한참동안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굳은 목과 팔을 가볍게 풀어주니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슬슬 식사를 해야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하루 종일 굶었더니 직접 식사를 차리기도 귀찮았다.
결국 아침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식당에 가서 해결하기로 했다.
아이린에게 있어서는 처음 하는 외식이었다.
밖에서 군것질을 한 적은 많지만 이렇게 둘이서 제대로 된 가게에 들어가 하는 식사는 처음이었다.
기왕 먹는거 좀 제대로 된 곳에서 먹자는 생각에 평소엔 가지 않던 고급 식당을 찾았다.
지난번 바크와 함께 갔던 곳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재산깨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오지 못하는 식당이었다.
점심 때가 거의 끝나서인지 가게 안에 있는 손님들은 거의 없었다.
남아 있는 일부조차도 거의 다 식사를 마무리하던 참이었다.
아이린은 이런 식당을 오는 것이 처음인지 내 손을 꼭 잡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멀쑥하게 차려입은 웨이터가 다가와 창가의 자리로 안내했다.
술을 마실지 물어보길래 괜찮다는 대답과 함께 메뉴판에 적혀 있던 A코스를 두 개 부탁했다.
이 가게를 오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이것과 비슷한 분위기의 가게는 과거에 질리도록 가봤다.
때문에 능숙하게 주문을 마치고나서 음식이 나오기 전에 아이린에게 이런 음식점에서의 가벼운 예절 교육을 시켜주기로 했다.
의자는 테이블과 몸 사이에 주먹이 두 개 들어갈 정도로 당겨 앉고, 접시 위에 올려져 있는 냅킨은 무릎 위에 올려 펼친다.
아이린은 요령좋게 내가 하는 행동을 따라했다. 미소녀인 아이린이 저런 우아한 행동을 하니 마치 무슨 귀족가의 영애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던 한 남자도 그런 아이린의 행동에 시선을 빼앗겼는지 멍하니 있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하며 부인과 함께 빠져나갔다.
어느새 식당 안에는 아이린과 나 밖에 남지 않았다. 포크와 나이프를 쥐는 법까지 가르치고 나자 웨이터가 에피타이저가 담긴 카트를 밀고 왔다.
"마루난 버섯을 넣은 스프입니다."
자그마한 접시에 담겨 있는 스프의 양을 보고 아이린은 살짝 실망했지만 다행히도 웨이터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스푼을 가볍게 쥐고는 스프를 떠서 입 안에 넣었다.
스프는 부드럽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다만 살짝 싱거워 옆에 놓여있던 후추를 한 번 뿌려 간을 맞췄다.
내가 후추를 뿌리는 것을 본 아이린도 자신의 스프 접시에 후추를 뿌리며 내 행동을 따라했다.
다섯 번 정도 스푼을 옮기니 원래부터 양이 얼마 없던 스프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도 에피타이저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 입맛이 돌기 시작했다.
그 다음으로는 레몬즙이 뿌려진 생선이 나왔다.
노릇노릇하게 익은 생선의 배는 잘 갈라져 속살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런 속살의 중간중간에 반원 형태로 잘린 레몬이 꽂혀 있었다.
레몬을 모두 뺀 다음 나이프와 포크를 잡았다. 팔 전체를 움직이는게 아니라 손목만을 움직이며 능숙하게 생선의 속살을 발라냈다.
레몬즙 덕분에 생선의 비린내도 전혀 없었고, 배를 갈라 속까지 잘 익힌 생선의 맛을 일품이었다. 물론 아이린이 내게 직접 잡아줬던 생선만큼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이린도 잘 먹고 있나 쳐다보니 그녀 역시 어제 먹었던 생선과는 다른 맛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감탄하고 있었다.
평범한 생선이라면 포크와 나이프 만으로 먹기 힘들지만 이번 생선 요리는 뼈도 거의 없고 속까지 바싹 익힌 덕에 고급 식당에서 생선을 처음 먹는 아이린도 무리없이 먹을 수 있었다.
기품있는 아가씨처럼 조금씩 생선을 발라 오물거리는 아이린은 무척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제 아이린과의 관계를 복구하고 나서 나는 조금 아이린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이때까지는 아이린을 어린아이 대하듯이 스스럼없이 대했다면, 지금은 사춘기가 온 딸처럼 대하게 됐다.
아무래도 아이린이 또래 아이들보다 성숙한 면도 있고, 종족이 종족인만큼 그런 부분에서도 좀 더 배려를 해주기로 한 것이다.
뭐, 배려라고 해봤자 아이린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 두어 번 노크를 하기로 한 것 정도다.
아이린은 노예인 자신에게 그렇게 신경쓸 필요 없다며 편하게 자신을 다뤄도 된다고 했지만 저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어떻게 험하게 다룰 수 있겠는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내가 곁에서 지켜보고, 성인이 된 후에는 아이린에게 의견을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녀가 자유를 원한다면 적당한 돈과 함께 보내줄 것이고, 남아있기를 원한다면 정식으로 그녀를 직원으로 고용할 생각이었다.
어느쪽이든 아이린이 성인이 되는 순간 노예 각인을 지워줄 생각이었다. 그 뒤로는 오롯이 아이린의 선택이었다.
'물론 남아줬으면 하는게 내 바람이지만.'
아이린이 내 곁에서 사라지면 나는 또 다시 지독한 권태와 지루한 일상을 견뎌내야만 했다.
계속되는 두통과 가끔씩 꾸는 악몽을 꾸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그건 아이린이 알 바는 아니었다.
나 역시 아이린에게 그 사실을 알려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성인이 되고 나서는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기를 바랬다.
'그럴리가 있나.'
솔직히 나 같아도 여기 남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이린이 성인이 될 때면 나는 서른 다섯일텐데, 이제 막 성인이 된 여자아이가 서른 다섯 먹은 남자의 곁에 남아있을리가 있나.
그 나이때의 여자애라면 누구라도 좀 더 멋진 도시로 나가 자신의 나이와 비슷한 잘생긴 남자를 만나 달콤한 연애를 하는 것을 꿈꾸기 마련이다.
특히 아이린 정도의 외모라면 공작가의 차남이나 삼남 정도는 어렵지 않게 꼬실 수 있을 것이다.
'공작가의 안주인이냐, 변방 영지의 포션 가게 점원이냐.'
답은 정해져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설령 남자를 꼬시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몇 년 동안이나 노예였던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는 주인의 곁에 남아 있고 싶지는 않으리라.
아이린이 떠나는 것은 거의 확정 사항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그 전까지 스스로가 아이린을 대신할 수 있는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할 뿐이었다.
찾지 못한다면... 아마 나는 아이린을 만났던 날 했던 것처럼 깨끗한 자살과 비참한 생존의 틈에서 고민하게 되겠지.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내 앞의 접시가 치워지고 새로운 요리가 나오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바싹 익힌 스테이크와 함께 곁들여 먹는 빵이 담긴 접시가 나왔다.
접시에 담긴 빵을 한 번에 먹을만큼만 손으로 뜯어냈다.
다만 평소 먹던 크루거 씨의 빵 맛이 워낙 좋은 탓에 고급 레스토랑의 빵이라고 해도 특별한 맛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 다음에는 메인 요리인 스테이크였다.
나이프의 끝에서 조금 떨어진 부분을 고기 끝에 갖다대고 천천히 움직였다.
다만 질긴 부위를 썼는지 생각보다 고기는 쉽사리 잘리지 않았다. 팔에 마나를 두르고 나이프를 움직이니 그제서야 수월하게 스테이크를 자를 수 있었다.
그리고 앞을 보니 예상대로 아이린은 나이프를 움직이려하며 낑낑대고 있었다.
어떻게든 스테이크를 자르려 하지만 쉽사리 썰리지 않는 고기를 노려보는 아이린의 뾰루퉁한 표정을 보고 나는 피식 웃으며 아이린의 나이프와 포크를 낚아챘다.
포크로 아이린의 고기를 고정시켜놓고 방금 전 내 고기를 썰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요령좋게 고기를 썰어냈다.
아이린이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난 후 식기를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아이린에게 나는 웃어주며 식사를 재개했다.
평소에 먹는 돼지나 닭고기가 아닌 고급 스테이크라 그런지 확실히 식감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