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260)

"치즈 케이크 한 조각, 녹차 케이크 한 조각, 몽블랑 하나, 그리고 오렌지맛 푸딩 하나 주세요. 차는 같은 걸로 주시고요."

다 먹을 수는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주문량에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플로라를 쳐다보자 그녀는 헤실거리며 내게 속삭였다.

"여기 꼭 한 번 와보고 싶었는데 이번 달은 용돈이 없어서 못 왔었거든요. 헤헷."

결국 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라의 주문을 모두 받아적은 점원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렇게 메뉴가 나오기 전까지 마땅히 할 것도 없었기에 나는 플로라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공통점인 아이린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지만 그 후로는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다.

나 역시 플로라와 이렇게 제대로 이야기 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내가 알지 못한 정보를 듣기도 했다.

플로라가 사실은 쿠키나 슈크림 같은 과자를 굽는 것을 좋아한다거나, 주에 한 번은 길고양이나 강아지에게 먹이를 주러 간다는 것들 말이다.

"정말이지. 어머니는 매일같이 괜찮은 남자 잡아서 결혼하라는 소리나 하고. 너무한거 아니에요?"

당장 어제도 그 일 때문에 어머니와 다퉜다고 말하는 플로라는 정말로 화가 난 것 같았다. 확실히 성인이 되자마자 식을 올리는 경우는 적지 않았다.

성인이 되기 전에 약혼을 한 다음 성인이 되는 순간 살림을 차리는 경우도 잦았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재촉할 일도 아닐텐데.

당장 아르웬만 봐도 스물 셋이 될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

물론 아르웬이 상당히 늦은 것도 사실이지만 나 역시 열일곱은 결혼을 하기에 이른 나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따지면 내가 뭐가 되냐고.'

서른 하나가 될 때까지 결혼하지 못한 나는 노총각을 넘어 아저씨가 되버린다.

아무리 그래도 벌써부터 아저씨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은데.

플로라는 바크와 비슷한 타입이었다. 이성에게 고백도 많이 받고, 약혼 제의도 많이 받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딱 잘라 거절하는 타입.

그래도 바크는 남자아이니 서너 살 더 먹고 약혼을 해도 늦지 않지만 플로라의 경우에는 그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아무래도 부부가 되는 남자와 여자중 평균적으로 남자가 나이가 많은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일단 아버지가 말려주셔서 보류 상태에요. 정말이지..."

플로라가 투덜대는 순간 양 접시에 디저트를 가득 담은 점원이 다가왔다.

"주문하신 다과와 차입니다."

플로라의 앞에는 그녀가 주문한 다과로 접시가 가득찼다. 보기만 해도 혀가 설탕에 절여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음식들이었다.

플로라는 언제 투덜댔냐는 듯이 황홀한 표정으로 접시에 놓인 디저트를 쳐다봤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는지 먹기 전에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히힛.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루디 씨."

"그래. 이거라도 먹고 기분 풀어라."

플로라에게는 플로라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는 거겠지.

문득 담배를 태우고 싶었지만 카페 안에서 흡연을 할 정도로 꼴초는 아니었기에 함께 나온 홍차를 홀짝이는 것으로 달랬다.

가장 먼저 치즈 케이크부터 포크로 찍어 먹기 시작한 플로라는 그야말로 트롤 고기를 처음 먹은 아이린처럼 놀라면서도 계속해서 디저트를 먹어치워 나갔다.

얼마나 맛있길래 저러는걸까. 나도 내 몫으로 나온 초콜릿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한 조각 집어먹어보니 달콤한 초콜릿이 입 안에서 살살 녹아내렸다.

확실히 돈 값은 하네.

솔직히 가격표를 보고 일반 카페치고는 좀 비싸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정도로 맛이 있으면 그만한 가격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플로라는 그 와중에 치즈 케이크를 모두 먹어치우고 녹차 케이크로 넘어갔다.

예의를 지키며 케이크를 입 안에 넣고 오물오물 씹어먹는 모습은 꽤나 귀여웠다.

평소 플로라는 어린애들을 돌보며 맏언니같은 모습만 보여주곤 했는데 이렇게 단 둘이 있으니 확실히 이제 막 성인이 된 꼬맹이 티가 팍 났다.

'그래도 역시 달단 말이지.'

꽤나 나이를 먹은 내게 이 케이크는 달아도 너무 달았다.

케이크를 한 조각 집어먹고, 홍차를 한 모금 마시길 반복했다.

나도 어릴 때는 단 걸 꽤나 좋아했던 것 같은데. 단 것만 좋아하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특권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어서도 단 맛만 볼 수는 없으니까. 오히려 쓴 맛에 더욱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플로라가 주문한 디저트를 모두 해치우는데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흐아... 배가 꽉 찼어요."

"다 큰 여자애가 남자 앞에서 그런 말 하는거 아니다."

가볍게 주의를 주었지만 플로라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왜요. 루디 씨도 제가 여자로 보여요?"

자기 딴에는 요염한 자세를 취한 것 같았지만 내게는 꼬맹이가 허세부리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바크는 이런 애가 뭐가 좋다고 그러는건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고."

플로라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니 작게 비명을 질렀다. 정말로 아팠는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나를 째려보는 플로라의 시선을 피해 점원을 불렀다.

"계산해주세요."

플로라와 내가 먹은 차와 디저트를 계산했다. 내 하루치 수입과 맞먹는 금액이었지만 딱히 아깝지는 않았다.

옆에서 계속 나를 노려보는 플로라에게 다음에도 이 가게에 한 번 데려와 주겠다고 하니 그제서야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을 닦아냈다.

저 상태로 밖에 나갔다간 나는 한참 어린 여자애를 울리는 쓰레기라는 소문이 퍼졌겠지.

그렇게 가게를 나서려던 나는 문득 아이들과 놀고 있을 아이린이 떠올랐다.

'몇 개 사가볼까.'

예전에 함께 활동했던 여자에게 '여자아이 중 단 음식'을 싫어하는 애는 없다는 말을 들어본 것 같다. 평소에 간을 맞출 때도 아이린은 달게 맞춰서 주기도 했고.

결국 나는 케이크와 간단한 디저트를 몇 개 포장해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린이 안 먹으면 그 때는 플로라를 불러서 먹어치우면 되겠지.

카페에서 나와 대로변을 걷던 도중 홀로 걷고 있던 아이린을 발견했다.

"아이린!"

이름을 부르자마자 아이린은 고개를 돌려 나를 확인하고는 눈을 반짝이며 달려왔다. 하지만 내 옆에 있는 플로라를 보고는 잠시 굳어진 표정으로 나와 플로라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플로라는 그런 아이린도 귀엽다는 듯이 쿡쿡 웃으며 아이린의 손을 잡았다.

"루디 씨도 잡으세요."

플로라의 말대로 아이린과 손을 잡았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던 아이린의 얼굴에는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이렇게 걸으니 꼭 그거 같구만.

"다른 사람들이 보면 가족 같지 않을까요? 제가 부인. 루디 씨가 남편. 아이린이 딸인거죠."

장난스레 웃으며 중얼거리는 플로라였다. 생각이 겹쳤나.

확실히 남들이 보면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쩐지 내 손을 잡은 아이린의 손아귀 힘이 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건 플로라도 마찬가지였는지 살짝 얼굴을 찌푸린 채 아이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만 아이린은 방금 전과 달리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묵묵히 거리를 걸었다.

싸늘해진 분위기 속에서 플로라와 나는 아이린의 눈치를 보며 돌아왔다.

집 앞에 도착하자 플로라는 손을 흔들며 아이린과 내게 작별 인사를 했다.

"오늘 고마웠어요."

"그래. 어머니랑 너무 싸우지 말고."

여전히 입을 열지 않는 아이린을 보며 쓴웃음을 지은 플로라는 손을 흔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 역시 잠긴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부엌의 탁자 위에 오늘 포장해온 디저트 상자를 올려놓았다.

"아이린."

평소 같았으면 힘차게 '네! 주인님!'이라고 대답했을 아이린이 잠시 뜸을 들이고 힘없이 대답했다.

"...네."

대체 왜 이러는건지. 혹시 내가 친한 언니를 꼬신다고 생각해서 화를 내고 있는 것일까.

그런 것 치고는 플로라에게도 화가 난 것 같던데.

결론을 내리지 못한 나는 일단 먹을걸로 달래보기로 했다.

"혹시 단 음식 좋아하니?"

"...좋아해요."

순간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지만 금세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디저트가 담긴 상자를 여니 몽블랑과 머랭쿠키, 그리고 각기 맛이 다른 조각 케이크들이 보였다.

"오늘 카페에 갔는데 맛있길래.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사왔는데 먹고싶니?"

"...저를 위해서 사와주신 건가요?"

"응? 그렇지?"

왜 그런걸 묻는지 궁금했지만 방금 전처럼 기운없는 표정이 아니라 금세 활기찬 표정으로 바뀐 아이린을 보니 굳이 물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렴 좋은게 좋은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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