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기 전에 손부터 씻고오렴."
"네!"
아이린은 총총걸음으로 욕실에 달려갔다.
여자애들은 모두 단 걸 좋아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아이린은 행복한 얼굴로 케이크와 과자를 모두 먹어치웠다.
식사를 하기 전에 디저트를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즐거워 보이는 아이린의 얼굴을 보니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
정말로 난 팔불출인건가?
열심히 놀고,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은 아이린은 잠이 쏟아졌는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졸리면 들어가서 먼저 자렴."
"하지만...마법...훈련이..."
졸면서도 착실히 대답하는 아이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하루 이틀 더 한다고 마법 실력이 확 늘어나는건 아니니 괜찮단다."
지난번 마법 훈련을 한 이후로 매일같이 자기 전 30분 동안은 마나 감지 훈련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처음 했던 날처럼 어색한 분위기는 생기지 않았다.
아이린은 오롯이 마나를 느끼는 것에만 집중했고, 나 역시 다른 생각 없이 아이린의 마나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에 열중했다.
역시 아이린은 흥분한게 아니라 가슴에 처음 닿는 남자의 손길에 놀란 것 뿐이었다.
계속 조는 아이린을 방의 침대에 눕혀주고는 문을 닫고 나왔다. 어느새 찬바람이 부는 저녁이었다.
혼자서 저녁을 차리기에는 귀찮고, 낮에 카페에서 홍차와 케이크를 먹어서 그런지 썩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가볍게 거리를 걸으며 산책이나 하기 위해 로브를 걸치고 나왔다.
옆집 담장 앞에서 주저 앉아 울고 있는 플로라를 발견한 것은 그 때였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렇게 즐거워하던 플로라가 이렇게나 궁상맞은 꼴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플로라의 눈가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가 마른 자국이 선명했고, 오른쪽 뺨에는 손자국마저 나 있었다.
누가 그랬는지에 대한 해답은 금세 나왔다. 만약 다른 사람에게 당한 것이라면 굳이 집 밖에서 울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또 다시 어머니와 약혼 문제로 다툰거겠지.
이건 좋지 않은데.
이때까지 내가 개입한 일들은 내 힘이 필요하거나 놔두면 영지에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기에 어쩔 수 없이 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플로라의 일은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내가 참견할 여지가 없는 타인의 일이었다.
괜한 오지랖,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잠시 고민하던 도중 서럽게 울고 있던 플로라는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훌쩍...루디...씨?"
"......춥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
직접 개입하지는 않더라도 적당히 위로해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이미 눈이 마주친 이상 나몰라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플로라는 망설였지만 내가 손을 뻗자 결국 내 손을 맞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치마에 묻은 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난 플로라를 가게 안으로 들이고는 나는 플로라에게 화장실에 가서 먼저 얼굴을 씻으라고 했다.
지금 플로라의 얼굴은 부어오른 뺨과 눈물이 마르며 생긴 자국으로 엉망이었다. 플로라도 그걸 의식했는지 아무 말 하지 않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창고에 있던 진정에 도움을 주는 찻잎을 달이며 치유 마법과 정신 안정 마법을 걸었다. 차를 달이는 동안 민감해진 감각에 화장실 안에서 플로라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르는 척 해주는게 좋겠지.'
플로라는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화장실에서 나왔다. 얼마나 울어댔는지 평소의 쾌활한 모습은커녕 금방 쓰러질 것 같이 수척했다.
그래도 조금은 감정을 추스렀는지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플로라의 앞에 찻잔을 놓아주자 그녀는 아직 정신을 못 차렸는지 찻잔을 멍하니 쳐다봤다.
내가 한 번 더 차를 권하자 그제서야 양손으로 찻잔을 들고는 호호 불어서 한 모금 마셨다.
여전히 기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차의 효과가 돌기 시작하면 조금 나아질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어머니랑 다툰거니?"
내 물음에 플로라는 차를 홀짝이던 손을 멈추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입을 열지 않는 것을 보니 말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이야기를 듣지 않는 쪽이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좋았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으니까.
그래도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는 없었다.
"휴...알겠다. 일단 오늘 집에 들어갈 생각은 없는거지?"
"......네."
담장 앞에서 울고 있는 걸 보면 쫓겨났거나 뛰쳐나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곧바로 집에 돌아가는 것은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치 않을테고 오늘 같이 바람이 찬 날 밖에서 잤다간 얼어죽기 딱 좋았다.
"일단 오늘은 내 방에서 자고, 내일은 집에 돌아가라."
내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플로라를 내 방에 데려다주었다. 처음 들어온 방을 신기하다는 듯이 둘러본 플로라였지만 정신적인 피로가 상당했는지 금세 잠들었다.
플로라가 잠든 것을 확인한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방에서 나와 연초를 입에 물었다. 플로라를 내 방에서 재운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그녀의 부모님에게 전해둬야 했다.
아무리 싸웠다고 해도 딸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면 불안한 것이 부모의 마음일테니까.
오늘 하루만 내 집에서 재운다고 전해주면 되겠지.
의자에 앉아 담배를 태우기 시작한 나는 검지로 탁자를 툭 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사실 플로라가 어느 귀족가에 노예로 팔려가든 첩으로 가든 그건 내 알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플로라가 이때까지 아이린을 돌보는 것을 도와준 것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찝찝한게 사실이었다.
아이린이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것과 기본적인 상식을 가르치는데 도움을 준 것 역시 플로라였다.
'짜증나네.'
차라리 아예 관련이 없었다면 입을 싹 닦았겠지만 도움받은게 있으니 마냥 모른척 하기도 그랬다.
가끔씩 찾아온 플로라와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고 말이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주고, 아니라면 손을 떼자.'
지독한 연기를 들이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아이린도 플로라를 꽤나 잘 따르는 듯하니 지나치게 규모가 커지지만 않으면 적당히 도와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연초를 모두 태운 나는 바닥에 떨어진 잿가루를 발로 짓밟았다.
가게에서 나와 조심스레 플로라의 집 문을 두드렸다. 노크를 세 번 정도 했을 때 안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갑니다."
이윽고 문을 열고 나타난 남자는 훈훈하게 웃으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플로라의 아버지인가. 직접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플로라의 어머니는 가끔씩 찬거리를 전해주러 오거나 내가 옷을 맞출 때 몇 번 만나본 적이 있지만 플로라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는게 거의 없었다.
"하하. 루디 씨 맞으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플로라의 아비되는 사람입니다."
남자는 예의를 갖춰 정중히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훈훈한 웃음을 짓고 있는 걸 보면 딸이 가출했다고는 믿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 죄송하지만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아내가 방금 막 잠들었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러고보니 플로라도 어제 어머니와 다툴 때 아버지가 말렸다고 했지. 어쩌면 플로라의 아버지와는 말이 통할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상황을 알 수 있다면 나도 판단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겠지.
플로라의 아버지의 요청대로 나는 그와 함께 거리를 걸어 마을 광장으로 향했다. 이미 밤이 깊은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가끔 길거리를 방황하는 도둑고양이가 작게 울며 도망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 광장 중앙의 나무 의자에 앉았다.
"아, 그러고보니 아직 제 이름도 밝히지 않았군요. 제 이름은 쿠단입니다."
쿠단은 여전히 태평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나는 먼저 용건을 꺼냈다.
"쿠단 씨. 일단 플로라는 제 집에서 하룻동안 묵게 하기로 했습니다. 담장 앞에서 울고 있길래 집 안에 들였습니다만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테니 마음 놓으십시오."
"하하. 그럴거라 예상은 했습니다. 사실 방금 전에 플로라를 데리러 나왔을 때 없는 것을 보고 루디 씨 댁에 갔을거라고 생각하긴 했거든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런데 쿠단은 나와 직접 얼굴을 마주한 것도 이번이 처음인데 나에 대해 잘 안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루디 씨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플로라도 오늘 집에 들어오는 것은 부담스러울테니 하루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말을 놓지 않고 계속 정중한 태도로 일관하는 그를 보며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쿠단은 플로라와 닮은 점은 요만큼도 찾을 수 없는 근육질의 거구였다. 게다가 슬쩍 훑어보니 팔목과 손에는 긁히고 베인 상처 자국이 가득했다.
편견이라 할 수 있겠지만 저런 덩치의 남자가 저자세로 내게 계속 존대를 하니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내는 몇 달 전부터 플로라에게 약혼을 하라며 닦달했고, 플로라는 싫다며 계속 거부해왔죠. 다만 이번에는 아내가 멋대로 약혼 상대를 잡아버려 그렇게 된겁니다."
약혼 상대라. 앨리스와 비슷한 경우인가?
그렇게 되면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 된다.
비록 플로라가 싫다고 해도 플로라의 어머니가 약혼을 성사키킨 이상 플로라의 약혼 상대 쪽에게는 딱히 죄가 없다.
그들을 윽박질러 파혼시키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 영지에서 계속 살아가야하는 플로라에게 좋은 방법은 아니겠지.
결국 도와줄 방법이 없는건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던 나는 쿠단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