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러십니까?"
"아뇨. 그냥... 루디 씨에게 말씀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었습니다."
"뭘 말씀하시는겁니까?"
"제 아내가 급하게 플로라의 약혼 상대를 정한 이유 말입니다."
단순히 플로라를 빨리 시집보내기 위한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일까?
내가 재촉하듯이 쿠단을 쳐다보자 쿠단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사실 아내도 저도 플로라에게 결혼을 재촉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집안끼리 짝을 지어주는 것보다는 플로라가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를 바랬으니까요."
쿠단의 말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늘 딸아이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 말투에서 그대로 묻어나왔다.
"문제가 생긴건 반년 전부터였습니다."
반년 전이라. 내가 이 영지에 온 것도 그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그 날 플로라는 아이들과 함께 숲에 놀러갔었죠. 하지만 놀다가 사라져버린 아이를 찾아 숲 속 깊은곳까지 들어가게 됐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찾았지만 냄새를 맡은 오크 무리가 플로라와 아이에게 덤벼들었습니다."
...나도 아는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게 내가 직접 본 모습이었으니까.
"그때 플로라를 구해주신게 루디 씨. 당신이었죠."
적당히 숲을 돌아다니며 재료를 채집하고 있다가 들려온 비명소리에 달려갔던 것 뿐이었다.
나중에 여기 집을 얻을 때 그 애가 옆집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조금 놀랐다만.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대충 알겠습니다만 그 때의 일이 플로라의 약혼과 상관이 있습니까?"
쿠단은 계속 들으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날 이후로 플로라는 늘 집에서 루디 씨 이야기만 해댔습니다. 루디 씨 집에 찾아갈 용건을 만들기 위해 아내에게 남은 찬을 싸 달라고 하기도 하더군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설마 어머니 심부름이라고 찾아왔던 것도 다 거짓말이었나.
아니, 근데 저 말은 꼭 플로라가 나를......
"처음에는 단순히 빚진 은혜를 갚기 위해 그러는 줄 알았습니다. 저도 아내도 당신에게는 무척 감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플로라를 말리지 않았고요. 하지만 저와 아내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플로라가 당신에게 느낀 감정은 단순한 고마움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말한 쿠단은 어딘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쿠단의 말을 듣고 나서, 플로라가 나를 좋아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눈 앞에 있는 쿠단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심이었다.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일도 없을 것 같아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플로라를 구해준 당일, 플로라는 성 안으로 돌아가는 내내 울먹거리며 내게 감사인사를 했다.
딱히 답례를 바라고 한 것도 아니었기에 성 안에 들어가면 적당히 도망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무사히 성 안까지 바래다 준 다음 나는 예정대로 모습을 감췄다. 물론 며칠 후에 얻은 집의 옆집에 그 소녀가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집을 얻은 첫날 나와 마주친 플로라는 깜짝 놀라워하며 감사 인사를 했지만 그뿐이었다.
조용한 생활을 원하는 내 의도를 이해했는지 그 날 있었던 일을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다.
대신 다른 상점가의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거나 가끔 나를 찾아와 이야기 상대를 해주곤 했다.
크루거를 비롯한 대부분의 상점가 사람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던 것 역시 플로라의 덕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 후로 플로라는 가끔 나를 찾아와 이야기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플로라를 이성으로 본 적이 없었다.
나이 차이는 크지만 굳이 비유한다면 '친구'일까.
플로라를 대할 때는 늘 그런 느낌이었다. 가끔 찾아와 수다 떠는 친구. 이야기하는게 부담스럽지 않은 그런 친구 정도였다.
가끔 그녀가 찬거리를 들고올 때도 단순히 플로라의 어머니가 한 음식이 많이 남았구나, 그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웃긴 일이었다. 서른 줄을 넘긴 아저씨가 대체 뭐가 좋다고 저러는지.
그것도 다른 아이들처럼 정면으로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가끔씩 찾아와 이야기 하는게 전부인데.
플로라는 그걸로 괜찮았던 것일까.
"...죄송하지만 쿠단 씨. 플로라는 집에서 저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던가요?"
"잘생겼다. 똑똑하다. 무심한 척 하지만 배려심이 깊다. 일하는 모습이 멋있다. 예의가 바르다... 더 있습니다만 들려드릴까요?"
"아뇨. 됐습니다."
내 앞에서는 투덜대거나 놀리는 이야기 정도 밖에 안하면서 집에서는 그런 낯부끄러운 말을 잘도 한 모양이었다.
쿠단이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플로라의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그런 것이었다.
젠장. 그건 그렇고 플로라가 약혼을 하게 된 이유가 나 때문이라니.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하긴. 나 같아도 온갖 정성으로 키운 딸이 나이가 거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아저씨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뜯어말리는게 당연했다.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자면, 딱히 루디 씨의 나이 때문에 그런게 아닙니다."
내 머릿속을 꿰뚫어 본 쿠단의 말에 나는 쳐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저도 아내도 루디 씨의 나이는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루디 씨는 동네 처녀들의 숱한 고백을 받고도 한 번도 사귀지 않으셨죠. 딱히 마음에 둔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오지 않았고요."
차라리. 루디 씨가 다른 여자와 사귀고 있었다면 플로라는 깔끔하게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쿠단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나는 몸을 떨었다.
"그렇게 반년이 흐르는 동안 루디 씨 말고 다른 남자애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플로라를 보며 아내는 애가 탔던 것 같습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지만 루디 씨는 누군가와 사귀거나 결혼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
그럴리가 없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망가진 인간이었다.
평범한 마을 처녀인 플로라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플로라는 내게 너무나도 과분했다.
활발하고 상냥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인기도 많고, 얼굴도 꽤나 예뻐서 남자애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 그런 그녀라면 나보다 좀 더 괜찮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바크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집안도 빵빵하고 성격도 얼굴도 빠지는 곳이 없었다. 플로라에게는 그런 남자가 어울렸다.
나 같은 놈이 아니라.
지금이야 평범한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고 있었지만 내 존재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 옛날의 나로 돌아갈지 모른다.
과거 모험가로 활동하며 몇 년이나 함께한 동료들과도 연인 관계를 맺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망가뜨릴까봐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내가 누군가와 사귀고 결혼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내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플로라를 말리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방법은 조금 과격했지만요."
플로라가 내게 어머니와 싸운 이유를 말하지 못한 것도 납득이 갔다. 그야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그 이유가 바로 앞에 앉아 있는데.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나왔다. 쿠단은 그런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루디 씨는 플로라를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친구입니다."
늘 장난스러운 말투로 나를 놀리고, 투덜대는 그런 친구라고 생각했었다. 플로라는 다르게 생각했던 것 같지만.
"역시 그랬군요."
쿠단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디 씨. 제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듣고 판단하죠."
"플로라에게 연인을 사귀거나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말씀해주십시오. 이건 아버지로서 하는 부탁입니다. 아닌 척 하지만 플로라는 다른 여자애들이 고백할 때마다 얼마나 가슴을 졸여왔는지 모릅니다. 직접 고백을 하라고 해도 차이면 원래 있던 루디 씨와의 관계마저 사라져버린다며 거부하더군요."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이 통하지는 않아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던 시간 말이다. 플로라도 그런 기분을 느꼈던 것일까.
"무례한 이야기란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플로라를 위해서라도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고개를 푹 숙이는 쿠단에게서는 진심으로 플로라를 걱정하기에 이러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확답을 주기에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은 이 정도가 한계였다.
쿠단은 내일도 일이 있으니 잠을 자둬야 한다는 말과 함께 먼저 돌아갔다.
나는 돌아가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광장에서 끊임없이 연초를 태우며 스스로의 감정과 마음을 정리할 뿐이었다.
그 날 새벽에는 가느다란 부슬비가 내렸다. 차가운 비가 머리칼을 적시고 몸을 타고 흘렀지만 복잡한 마음마저 씻어내주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