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260)

그리고 다음 날, 나는 가게 의자 위에 앉아 플로라가 일어나는 것을 기다렸다. 아침잠이 많은 아이린과 달리 플로라는 이른 아침부터 잘 일어났다.

조심스레 내 방에서 나오던 플로라와 눈이 마주쳤다.

"...저, 루디 씨?"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내 눈치를 보던 플로라에게 담담히 말했다.

"어제 너희 아버지에게 전부 들었어.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거랑, 그것 때문에 너희 어머니가 약혼을 잡았다는 것도."

내 말을 들은 플로라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변했다. 슬픔, 분노, 원망 그리고... 체념.

"...부모님은 제가 아직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고 했어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귀어보면 지금 하고 있는 사랑은 어릴적의 치기라는 걸 깨닫게 될거라고."

나는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아직 연초에 불은 붙지 않았다.

"루디 씨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플로라의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진심으로 대답할 것인가, 아니면 '어른스러운' 대답을 들려줄 것인가. 결론은 전자였다.

"아니."

딱 잘라 부정했다.

"정말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몇 달이나 쫓아다니면서 그러진 않지. 나도 너랑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었거든. 좋아하는 사람이랑 말 한 마디 한 것만으로 그날 하루 종일 행복했던 순간이 말이야."

플로라가 나를 상대로 그런 기분을 느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나라는 인간을 상대로 그렇게 기뻐해주다니.

"내가 고백받는 걸 보며 가슴 아파하고 막상 자신이 고백하려고 하니 차일까봐 용기도 내지 못하고. 그런 마음과 행동 하나하나가 누군가를 좋아하기에 가질 수 있는거겠지."

정말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런 감정조차 가지지 못한다. 이 사람을 사랑하니까. 이 사람이 나만의 것이 되면 좋겠으니까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했던건 틀림없는 사랑이다. 그건 내가 보증할 수 있어."

플로라는 단순히 내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나 때문에 가슴 졸이고, 나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나 때문에 기뻐한다.

그런게 가능한 것은 사랑하는 상대 뿐이다.

"그리고 나도 네 진심에 제대로 대답해줘야겠지."

플로라가 반년 동안 짝사랑으로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는 모른다.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야 나는 당장 어젯밤까지만 해도 플로라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조차 몰랐던 둔탱이에 머저리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알게 된 이상 어정쩡하게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서 제대로 답을 내주지 않고 회피하는 것은 플로라에게 더욱 큰 희망고문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를 간절하게 쳐다보는 플로라의 시선이 느껴졌다.

숨을 한 번 고르고, 나는 그녀에게 내가 내린 대답을 들려주었다.

"미안하다. 너와 사귀어 줄 수는 없어."

몇 번이나 생각을 거듭해봤지만 역시 불가능했다. 애초에 플로라를 이성으로 쳐다본 것 역시 이번이 처음이었다.

플로라를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플로라의 고백을 수락하는 것은 플로라의 마음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했다.

내 대답을 들은 플로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눈가에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

정작 본인도 울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는지 당황스러워 하며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아, 아니에요...이상...하네...왜..."

왜 눈물이 나오는 거지. 라고 말하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목미 매인 플로라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반년 동안 이어진 플로라의 일방적인 짝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계속해서 손등으로 닦아내는 플로라를 끌어안았다.

"솔직히, 지금 너를 사랑한다고 하지는 못하겠어. 나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

내게 남은 것은 감정이 아니라 욕구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나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분명히 플로라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호감은 플로라가 나를 꾸준히 좋아해왔다는 말을 듣고 지금 눈덩이처럼 더욱 불어난 상태였다.

어제의 나였다면 그 호감의 정체를 깨닫지 못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의 경계선에 서 있는 애매모호한 감정. 이 감정에 익숙해지는데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내 품 안에 들어온 플로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달랬다.

"그래도 지금부터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볼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렇게 말하며 플로라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주 짧은 키스였다.

내 딴에는 달래려고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플로라는 더욱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엉엉 우는 그녀는 분명 이전에 보지 못한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나름대로 훈훈하게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플로라가 나를 꼬옥 끌어안고 놔주지 않기 전까지는 말이다.

"...플로라?"

"설마 이대로 끝낼 생각이셨던건 아니죠? 어찌됐든 저보고 기다리라는 소리잖아요."

뜨끔. 정확한 부분을 찔리자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분명 나는 플로라를 제대로 마주보겠다고 결심했지만 사귀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때까지는 사귄다는 생각조차 없었다면 이제는 제대로 플로라를 여자로 보기로 했던 것이다.

분위기를 타다 보니 입까지 맞추긴 했지만 사실 딱히 그녀와 내 관계에 바뀐 것은 없었다.

흠. 내가 생각해도 쓰레기 같군.

입맞춤을 한 것도 모자라 책임조차 치지 않는다니. 다른 사람이 봤다면 인간 쓰레기라고 매도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흥. 도망치게 두지 않을테니까요. 절 똑바로 보세요."

플로라가 얼굴을 들이밀자 나는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고 뒷걸음질 쳤다.

분명 플로라는 남자 여럿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였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타오르는 열의가 장난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치 사냥감을 찾는 암사자 같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도망치고 싶어졌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사귀는 것도 아닌데 이 이상은..."

"반년 동안 기다리게 해놓고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는거에요?"

플로라의 날카로운 지적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변명을 생각했다.

"지금 방에는 아이린도 남아있으니까. 다음에. 다음에 하자."

아이린을 핑계삼아 빠져나가려 한 나였지만 플로라는 내 팔을 양 손으로 꽉 잡은 채 보는 것만으로 소름돋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침 일찍 출근하셔서 저희 집은 비어 있으니까요."

정말로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태도에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아이린이 일어났을 때 볼 수 있도록 메모를 탁자 위에 남겨놓고 플로라와 함께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몇 번인가 플로라가 찾아와 찬거리를 줄 때 받았던 통이나 접시를 돌려주기 위해 찾아온 적은 있지만 집 안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실의 벽에는 고급스런 나무 조각품들이 걸려 있었고 창고로 보이는 곳에는 실과 옷감, 그리고 목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쿠단은 목공이었던 것일까. 확실히 그 큰 덩치와 손과 팔에 남아있던 자잘한 흉터들을 보면 그런 일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만.

"아버지도 예전에는 모험가로 활동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러다가 저희 어머니를 만나셨는데 어머니는 목숨이 위험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싫다고 해서 목공 일을 배우기 시작하셨다고 했어요."

그런가. 어울리지않게 로맨티스트구만. 어쩐지 덩치에 비해 섬세하고 친절하던데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는 모르는 것 같았다.

플로라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자그마한 목제 침대와 귀여운 곰돌이 인형과 토끼 인형이 놓여 있는 핑크빛 방이었다. 한창 이 나이때의 소녀다운 방이었다.

'이렇게 평범한 방을 보는건 처음이네.'

아르웬의 집에는 가본 적이 없었고 앨리스의 경우 귀족이라 규모가 컸다. 마리안은 신전에서 지냈으니 평범한 여자아이의 방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셈이었다.

"그, 그렇게 빤히 둘러 보지 마세요."

"여자애 방에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라 그래."

내가 이때까지 갔던 방은 '여자애'의 방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그렇게 말했는데 플로라는 무슨 오해를 했는지 '처음...'이라고 중얼거리며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플로라에게 이끌려 결국 작은 침대 위에 같이 앉았다. 여기까지 오니 막상 부끄러워졌는지 플로라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나를 힐끔거렸다.

"그러게 무리하지 말라니까."

플로라가 처녀라는 것은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고백을 받았지만 수락한 적은 없으니 섹스는 커녕 그와 유사한 행위조차 해본적 없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게 있다면 마리안처럼 완전히 성에 대한 상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부끄럽고 야한 행동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 돼요!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와서 뺄 수는 없어요!"

결의에 찬 듯이 소리치는 플로라였지만 손이 떨리는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정말이지. 허세 부리기는.

"이렇게 첫 경험 가지면 나중에 분명 후회한다? 내가 만약에 나중에 너랑 안 사귀면 어쩌려고 그래?"

"그럴 일 없거든요? 아저씨가 반드시 저를 신부로 삼게 할 자신이 있으니까 저도 이러는 거에요!"

저 근거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물론 플로라 정도면 어디가서 꿀리는 신부감이 아니긴 하다.

저래 보여도 글도 읽고 쓸 수 있고, 지난번에 장부 작성하는 법도 알고 있었다. 아마 어머니한테 배운 거겠지.

거기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에게 이미지도 좋고, 친절하고, 상냥하고, 얼굴도 예쁘고 가슴도 크다. 전형적인 일편단심 현모양처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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