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가 끝난 후에는 마법 훈련이었다.
어차피 낮에는 손님도 별로 없으니 내가 전에 던져줬던 책의 내용에 대해 질문하고 아이린이 대답하며 배운 내용에 대해 중간 점검을 했다.
"현재 남아있는 마도학파중 남아있는 세 개의 학파 이름은?"
"스텔라 학파, 파난 학파, 케투나 학파입니다."
총명한 아이린은 내가 하는 질문에 하나도 빠짐없이 대답했다. 혹시나 싶어 책 구석에 있는 자잘한 것까지 물어봤지만 꼼꼼한 아이린은 그런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대답했다.
"연금술의 기초학을 만들고 보편화시킨 사람의 이름은?"
"트라다 쿠스만입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완벽하게 마법의 원리와 발전 과정에 대해 습득한 아이린이었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이 방대한 지식을 자신의 머릿속에 담았다는 것은 감탄밖에 나오질 않았다.
마나를 느끼는 작업 역시 최근에는 일상 생활 중에도 간간이 마나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조금만 더 하면 1서클 마법을 가르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다른 마법사들이 듣는다면 사기라고 기함할 법한 이야기였지만 꼬우면 그치들도 반(半)마족으로 태어나라고 해라.
자신의 몸 자체가 마나 덩어리인 마족에게 있어서 마나를 다루는 것은 숨 쉬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니까.
나는 아이린에게 줬던 책을 돌려받고는 다른 책을 한 권 건네주었다.
1서클 마법의 술식과 마법진들이 기록되어 있는 책이었다.
1서클 마법은 대부분 일상생활에서나 사용되는 간편 마법이 많지만 드물게는 전투 마법도 있었다. 마나 로켓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비록 효율은 최악이지만 자신의 몸 안에 있는 마나를 발산시켜 피해를 입히는 마법이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호신용으로 사용할 법한 마법이었지만 어찌됐든 전투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아이린에게 마법서 첫 장에 기록되어 있는 '감지' 마법에 대해 익히도록 했다. 마법을 쓰는 모험가들이 필수로 익히는 마법이었다.
자신의 몸 안에 담겨 있는 마나를 퍼뜨려 마나와 공명하거나 부딪치는 것을 느껴 상대의 위치를 감지하는 기술이었다.
이것 하나만 익혀둬도 갑자기 뒤를 노려져서 죽을 일은 없다.
물론 책만 보고는 이해가 힘들 수 있었기에 나는 아이린의 앞에서 직접 마법진과 술식을 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술식을 완벽하게 이해해야지만 영창으로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다.
마법진을 그리는 것 역시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술식을 새겨넣는 것이기 때문에 그 마법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밑바탕이 되어야 했다.
처음으로 배우는 마법이다보니 아이린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아이린이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설명해주었고, 나중에는 아이린이 홀로 술식을 짜는 것을 연습하게 했다.
아이린의 과외가 끝난 다음 나는 다음 상대를 불러냈다.
공간 이동 마법진이 그려지고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속옷 차림의 앨리스였다.
아이린은 갑자기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앨리스에게 깜짝 놀랐지만 사실 아이린 보다는 앨리스가 훨씬 더 놀랐다.
"꺄악! 옷 갈아입는데 뭐하는 짓이에요!"
타이밍이 안 좋았군. 나는 다시 앨리스를 돌려보내고 5분 후에 다시 방으로 소환했다.
앨리스는 새하얀 셔츠와 치마를 입은 채 뾰루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일부러 그런게 아니니 진정하십시오."
"으으...그래도 그렇지..."
방금 전의 일이 신경쓰이는지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는 앨리스였다.
이미 몇 번이나 알몸까지 본 사이에 뭘 새삼스럽게 저러나 싶었지만, 옆에는 아이린도 있었기에 그만뒀다.
앨리스도 눈치가 있다면 아이린 옆에서 이상한 소리는 안 하겠지.
가뜩이나 아이린은 내가 앨리스를 불러내기 전에 함께 둘을 가르칠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납득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내 명령이니 듣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지난번에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하셨죠."
"...네. 혹시 정말로 가르쳐 주시려고요?"
뾰루퉁한 앨리스의 얼굴이 금세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네. 앞으로 하루에 한 번 정도는 불러내서 마법 훈련을 시킬테니 시간을 비워두십시오."
"걱정 마세요. 이제 일도 다 매듭지어져서 시간은 넉넉하니까요. 식사 시간에만 안 불러내면 되요."
다행스럽게도 이제 영주대리로서의 일은 얼추 끝난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아이린과 마찬가지로 마나 감지 훈련부터 시작하려 했던 나는 앨리스가 마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떠올렸다.
처음부터 마나를 볼 수 있는 앨리스에게 그런 훈련을 하는 것은 시간낭비겠지.
"그럼 우선 정령술 테스트부터 해볼까요."
내 말에 술식을 연습하고 있던 아이린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는 다른 훈련 때문인지 술식을 짜면서도 계속 이쪽을 쳐다봤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린은 반쯤 마족이니까. 정령은 마족과 계약을 맺지 않는다. 오직 인간 정령술사만이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마법사들이 가장 많이 쓰는 원소 계열 마법의 경우 정령과 계약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의 차이가 무척 큰 편이었다.
드물게 정령과 계약을 맺은 마법사는 그 정령의 속성에 해당하는 마법의 위력이 몇 배로 증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령은 체내의 마나가 많고, 잠재력이 있는 인간과만 계약을 하기 때문에 열 명의 마법사중 아홉은 정령과 계약을 못 맺었다.
"마법진을 그릴테니 거기 가만히 서 계십시오."
앨리스는 내 말대로 자리에 딱 붙어서 일절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중심으로 바닥에 마법진을 새기기 시작했다. 대략 10분 정도에 걸쳐 마법진이 완성되자 나는 정령을 소환하는 영창을 읊조렸다.
"마나의 흐름을 따르는 곳에 사는 태초의 정령들이여. 내 부름에 따라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라."
영창이 끝나는 순간 마법진에 새겨졌던 술식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술식에 반응한 정령들은 마법진 안에 있는 계약자의 적성을 알아보고 가장 잘 맞는 정령이 소환된다.
참고로 나는 첫 정령으로 어둠의 정령이 나왔었다. 그 때는 워낙 삐뚤어지게 살았으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과연 앨리스는 무슨 정령이 나올지 기대하며 지켜보던 도중 술식이 새하얀 빛을 내뿜으며 시야를 가렸다.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눈 앞에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독수리 한 마리가 나타나 있었다.
얼음의 정령. 심지어 동물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최소 상급 이상이었다. 하급 정령은 제대로 된 형태조차 갖추고 있지 못하니까 말이다.
앨리스는 홀린 듯이 멍하니 정령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정령계에서 머무는 최상급 얼음의 정령 중 하나다. 계약자는 나와 정령의 계약을 맺을 준비가 되었는가?"
얼음으로 만들어진 독수리의 입에서 중성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앨리스는 고개를 돌려 내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최상급 정령과의 계약은 결코 흔치 않은 일이다. 이런 계약을 걷어찰 수는 없지.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앨리스에게 꽤나 잘 어울리는 정령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정령 계약은 한 번에 하나의 정령과 계약할 수 있다. 하지만 계약을 반복해 여러 속성의 정령과 계약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다.
나 역시 그런 경우였다.
불, 물, 전기, 대지, 어둠, 빛까지 총 6속성의 정령과 계약을 맺은 상태였기에 지난번에 노움을 불러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편리하게 정령을 다룰 수 있는 것이었다.
"미안한데. 이 여자는 계약이 처음이라서. 조금 도와줘도 될까?"
그제서야 내 존재를 감지한 얼음의 정령은 내게 몸을 돌려 훑어봤다.
"그대는... 좋다. 나 역시 이런 계약자를 찾는 것은 쉽지 않으니."
앨리스는 아직도 눈 앞의 정령이 최상급 정령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겠는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정말로 제가 최상급 정령이랑 계약하게 되는 거에요?"
"그렇습니다. 혹시 저 정령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겁니까?"
내 질문에 앨리스는 머리를 흔들며 격렬하게 부정했다.
"그럴리가요! 사실 저는 그냥 제 한 몸 지킬 수 있을 정도의 마법만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실감이 안나서 그래요."
나 역시 앨리스를 대마법사나 대륙에 이름을 날리는 정령술사로 키울 생각은 없었다. 자기 한 몸 지킬 수 있는, 어디가서 험한 꼴 보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줄 생각이었을 뿐.
지난번에 앨리스가 내게 찾아왔을 때,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던 것도 전문적으로 마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꽤나 이름 있는 마법사에게 직접 배우거나 마탑의 제자로 들어가야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안젤리카가 대단한거지.'
나는 모험가 자매를 떠올렸다. 그 중에서도 안젤리카가 마법사가 됐던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시골에 살던 소녀가 마력의 발현을 해내고, 직접 마법을 구현해내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3클래스를 넘어선 마법까지 구현할 수 있으니 그녀는 타고난 천재라고 불릴 자격이 있었다.
마법사는 워낙 그 숫자가 적어 모험가들 중에서도 아주 드물었다. 파티를 짤 때도 흔히 말하는 귀족 대우를 받곤 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법사가 대단하는 것만 알기 때문에 이런 사정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만약 안젤리카에게 제대로 된 스승이 있었다면 그녀는 지금쯤 어엿한 중견 마법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뭐, 만약이라는 가정은 애초에 의미가 없지만.'
지금은 안젤리카를 생각할게 아니라 눈 앞의 앨리스의 계약부터 성사시켜야 했다.
정령의 계약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임시 계약. 임시로 맺어진 계약으로 필요한 상황에서만 정령을 불러내서 힘을 빌리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결속 계약. 계약자가 죽기 전까지 지속되는 영구 계약이다.
언제 어디서든 정령을 마음대로 불러낼 수 있는 대신, 정령은 계약자의 마나를 계속해서 받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