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260)

나는 스승님에게 배운 기술 덕분에 마나가 닳을 일은 없었지만 앨리스의 마나량으로 최상급 정령과 계약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저 정령과 임시 계약을 맺겠다고 하시면 됩니다. 정령은 기본적으로 계약자의 마나를 받아가는 대신 힘을 빌려주죠. 임시 계약은 마나 소모량이 많지만 필요할 때만 불러낼 수 있으니 지금의 당신에게 딱 맞을 겁니다."

아직 제대로 된 마법 하나 배우지 못한 앨리스는 굳이 급하게 정령과 영구 계약을 맺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한 번 임시 계약을 맺은 정령은 나중에 얼마든지 결속 계약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다.

간단하게 정령과의 계약에 대한 설명을 들은 앨리스에게 정령과의 계약 주문을 알려주었다.

"이제 다 끝났는가?"

얼음으로 된 날개를 퍼덕이던 정령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계약을 시작하도록 하지."

정령의 선언과 함께 앨리스의 입에서 계약 주문이 흘러나왔다.

"나 이곳에 내 마나를 걸고 맹세하니 위대한 정령왕의 아이와 정령의 계약을 선언한다."

모든 정령들의 부모라 불리는 정령왕은 나조차도 본 적이 없었다.

지난번에 나와 계약중인 정령들에게 물어보니 최상급 정령 수십 마리가 덤벼들어도 티끌 조차 건드리지 못하는 위대한 분이라는 설명이 돌아왔다.

그야 정령계라는 한 차원을 다스릴 정도면 그 정도로 강하겠지만. 그래도 좀 놀랐다.

앨리스의 주문이 끝나자 허공에 푸른빛 주문이 새겨지더니 완전히 새겨진 주문은 점점 투명해지며 사라져버렸다.

"이것으로 그대와 나는 계약으로 맺어졌다. 나중에 내 힘이 필요한 상황이 오면 부르도록."

독수리 모습을 한 얼음 정령도 계약이 끝나니 사라졌다. 정령이 완전히 사라지자 앨리스는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흐아...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마나를 볼 수 있는 앨리스는 정령에게서 느껴지는 상당한 기세에 짓눌려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나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당신의 힘이 되어줄 존재 아닙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야 그렇지만..."

아무래도 앨리스가 정령의 힘을 제대로 다루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럼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마법을 배우는 것은 다음에 하도록 하지요."

"배려해줘서 고마워요."

그래도 자신이 최상급 정령과 계약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배시시 웃은 앨리스를 다시 저택으로 돌려보냈다.

아이린은 정령이 나타난 순간부터 마법 술식을 익히는 것도 익고 멍하니 앨리스와 정령이 계약하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야 얼음으로 만들어진 독수리가 갑자기 나타나면 놀랍긴 하지만, 어린애라 그런지 정령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동경이 더 컸던 것 같다.

"...주인님. 저는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없나요?"

평소 같으면 내게 먼저 이런 걸 묻지 않는 아이린이었지만 앨리스가 했던 정령 계약이 무척 인상깊었는지 물어왔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묻는 아이린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마족의 피를 물려받은 아이린은 정령과 계약을 맺는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차마 그 사실을 그대로 말해 줄 수는 없었기에 나는 적당히 말을 돌렸다.

"아이린. 정령 계약은 성인이 되야만 맺을 수 있단다. 나중에 네가 성인이 되면 그 때 하자꾸나."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지만 순진한 아이린은 철썩같이 내 말을 믿었다.

아이린은 실망했지만 그래도 안 되는 일을 가지고 투정을 부리지는 않았다. 나중에 아이린이 성인이 되면 이 거짓말도 탄로나게 될텐데.

물론 아이린이 그때까지 내 곁에 남아있다면 말이지만.

그래도 아직 아이린이 성인이 되기까지는 한참 남아있으니 그때 쯤에는 까먹을지도 모른다.

슬슬 저녁이 되자 나는 아이린에게 방에 가서 조금 쉬어두라고 했다. 아이린은 집안일이라도 돕겠다고 했지만 점심도 아이린이 해준 것을 얻어먹었는데 더 고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모험을 끝내고 돌아온 모험가들이 사용한 포션을 채우기 위해 가게를 찾았고, 나는 성실하게 물건을 팔아치웠다. 그들 중에는 오랜만에 찾아온 제시카와 안젤리카 자매도 있었다.

제시카는 오늘 고블린 부락을 몰살시킨 것도 모자라 오크도 두 마리나 잡았다고 자랑스레 떠들었고, 안젤리카는 동생 뒤에 서서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제시카의 이야기를 적당히 맞장구쳐주며 안젤리카와 눈빛을 교환했다.

대부분의 모험가들은 주점이나 음식점에 가서 오늘 자신이 겪은 일을 모험담처럼 떠들어대며 자랑한다.

하지만 제시카와 안젤리카는 둘 다 상당한 미녀다보니 주점에 가면 술에 취한 모험가들에게 추파나 성희롱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

평소에도 늘 둘이서만 돌아다보니 친한 모험가들이 없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가 없는 것이다.

그걸 알기에 나도 오늘만큼은 제시카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며 그녀를 칭찬해 주었다.

고작해야 포션 가게 주인에게 칭찬을 받은 것일 뿐인데도 제시카는 뿌듯해하며 안젤리카와 함께 돌아갔다.

저런 동생이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겠네. 나는 동생 대신 다른걸 키우고 있지만.

안젤리카와 제시카가 돌아간 후에는 저녁을 준비했다.

쉬고 있던 아이린을 불러내서 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며 요리 하는 법에 대해 강의했다.

재료에 따라 손질을 다르게 해야한다는 것, 궁합이 잘 맞는 재료들, 간을 맞추는데 도움이 되는 향신료들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솔직히 단 번에 모두 익힐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요리를 하려면 반드시 알아둬야 하는 것이기에 꾸준히 가르칠 생각이었다.

"불을 사용하는 요리는 늘 조심해야 한단다."

장작이 무너지며 불이 번지기라도 했다간 큰일이었다. 사실 가게가 타버리는 것보다는 아이린이 다치는 것이 더 걱정이었다.

"칼을 다루는 것과 불을 사용하는 요리를 할 때는 절대 한눈 팔지말고 요리 하는 것에만 집중하렴."

내가 재차 주의를 주자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린의 성격상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그 뒤로 나는 비교적 쉬운 편인 스파게티 만드는 방법을 아이린에게 알려주었다. 스튜를 만들 때처럼 감자같은 것을 손질할 필요도 없다.

그냥 뜨거운 물에 면을 불려서 토마토 소스와 버섯, 파슬리 가루를 조금 넣어주면 그만이었다.

20분도 채 안되서 완성된 스파게티와 방금 막 크루거의 가게에 찾아가서 사온 빵이 오늘의 저녁이었다.

아이린은 스파게티를 맛있게 먹으며 다음에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오늘 버섯을 썰 때도 아이린이 해보고 싶어 하길래 아이린의 등 뒤에 딱 붙어서 아이린의 손을 잡고 칼로 버섯을 써는 연습을 했었다.

"그래. 대신 그 때는 반드시 나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능숙해지기 전까지는 아이린의 옆에서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칼에 베이거나 뜨거운 냄비에 데였다간 큰일이니까.

"그러고보니 주인님...아침에는 어딜 갔다 오신건가요?"

흠칫. 갑작스레 들어온 질문에 나는 표정이 굳었지만 금세 머릿속에서 변명을 만들어내며 평소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난번에 봤던 바크 오빠 기억하니? 그 오빠에게 포션 재료를 부탁하러 갔단다."

미안하다 바크. 이래저래 너에게 사과할 일이 자꾸만 생기는구나.

아이린은 바크를 피하는 것 같으니 이 쯤에서 대화가 끊어질 줄 알았는데 아이린은 여전히 나를 의심스런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는 듯한 아이린의 눈빛에 나는 등 뒤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분명 변명을 했는데도 '나는 이미 진실을 알고있다' 같은 시선으로 대답을 압박하는 아이린의 눈길에 나는 식사내내 아이린과 마주 볼 수 없었다.

혹시나 싶지만 정말로 플로라와 한 걸 들킨건 아니겠지?

그 후로 며칠동안은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다. 아이린과 앨리스는 점심을 먹고 난 뒤에 내 방에서 마법을 다루는 훈련을 했다.

아이린은 '감지' 마법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게 됐고 앨리스는 정령술의 기초학을 배우는 것과 동시에 아이린과 같은 감지 마법을 익혔다.

마법을 배우는 속도는 아이린이 압도적으로 빨랐다. 종족이 종족인만큼 그건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아이린에게 있어서 마나를 다루는 것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 될테니까.

혹시라도 앨리스가 아이린을 보고 기가 죽을까봐 충분히 잘하고 있다며 계속 다독여주었다.

실제로도 나중에 정령술까지 제대로 배우면 앨리스도 어엿한 중견 모험가 정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참고로 아이린은 지금 눈을 감고 방 안에 있는 가구들을 피해 걸어다니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본래 사람은 하나의 감각이 차단되면 다른 감각이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시각이 차단된 상태에서 감지는 더욱 큰 효력을 발휘한다.

아이린은 이제 능숙하게 가구를 피해 방 안을 돌아다녔다.

어차피 감지는 매일 꾸준히 연습해야하니 슬슬 다음 마법으로 넘어가볼까.

"다음으로 익힐 마법은 원소 마법이란다. 가장 주류가 되는 마법인만큼 술식도 단순하고 쉽지."

실제로 원소 마법은 감지보다도 더욱 쉬웠다.

감지처럼 감각을 계속 집중해야 하는게 아니라 단순히 술식을 이해하고 영창만 하면 되니 말이다.

"타오르는 불꽃이여.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나야 당연히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지만 아이린의 경우에는 직접 영창을 해야만 했다.

아이린은 자신의 손 위에 피어오른 불씨를 보고 신기하다는듯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시전자의 손에 붙어 있는 동안은 괜찮지만 다른 곳에 닿거나 다른 사람에게는 뜨거우니 조심하렴."

그렇게 주의를 준 다음에는 입으로 바람을 불어 불씨를 꺼뜨렸다.

진도가 쭉쭉 나가는 아이린과 달리 앨리스는 난항을 겪고 있었다.

앨리스 역시 수재였지만 종족 보정까지 받고 있는 아이린을 이길 수는 없었다.

다소 두루뭉실하게 정리되어 있는 정령술 책을 붙잡고 끙끙대는 앨리스에게 나와 계약을 맺고 있는 정령들을 불러내 보여주었다.

앨리스는 특히 어둠과 빛의 정령을 보고는 감탄했다.

앨리스가 정령을 다루기 위해서는 정령과의 친화력이라는게 필요하다.

내가 부리는 정령들과 붙어 있다보면 정령과의 친화력이 높아질 것 같아 이 곳에 있는 동안은 정령들과 함께 있기로 했다.

그렇게 정령술 책에 적혀 있는 문장을 앨리스에게 쉽게 풀어 설명해주던 도중 종이 울렸다.

훈련을 시작하는 동안 혹시라도 찾아올 손님을 대비해 가게 문에 매달아놓은 종이 울렸다.

지금 이 시간에 찾아올만한 사람이 없는데. 아이린과 앨리스에게 계속 연습하고 있으라고 하고는 가게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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