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260)

"으응...알겠습니다. 주인님. 안녕히 다녀오세요."

아쉬운 듯 내 옷자락을 잡는 아이린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는지 금세 손을 놓았다.

"금방 돌아올테니 걱정 말고 푹 자렴."

내 확답을 듣고나서야 아이린은 안심됐는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가고는 문을 닫지 않고 나를 쳐다보고 있길래 나는 손을 흔들며 웃어주었고 그제서야 방문을 닫았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예전에는 외출을 하고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는 집 안이 공허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돌아오면 아이린이 나를 반겨준다.

꼭 말 잘 듣는 강아지를 키우는 기분이었다.

실제로는 강아지보다 더 똑똑하고, 더 귀엽고, 더 사랑스럽지만 말이다.

결국 나는 입가에 지어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아이린이 웃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만 해도 절로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최근 반년 동안 정리해놓은 장부와 납부할 세금이 들어있는 가죽 주머니를 챙겼다. 그러고보니 이 영지에 와서 세금을 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영지의 주민으로 살며 내는 세금은 일 년에 한 번이지만 가게를 운영하거나 정식으로 상행 업무를 보는 경우에는 반 년에 한 번 장부를 제출하고 세금을 납세해야 했다.

이 영지에 도착하고 포션 가게를 영업한 것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후였기에 세금 납세를 할 기회가 없었다.

혹시라도 빠뜨린 것이 없나 확인했다. 점검을 하던 도중 나는 아르웬에게 줄 선물로 방금 창고에서 찾아냈던 초콜릿을 두 개 챙겼다.

야간 업무로 힘들 때 이거라도 먹고 힘내면 좋을텐데.

그렇게 초콜릿까지 챙긴 나는 가게를 나섰다.

거리에는 이른 저녁부터 취해 비틀거리는 주정뱅이와 노점상을 열어 군것질거리를 파는 상인들로 시끌시끌했다.

그런 사람들을 지나쳐 시장 거리를 빠져나오자 모험가들이 자주 애용하는 술집과 음식점이 즐비한 거리였다.

아마 오늘 모험으로 한 탕 벌어들인 파티는 기분좋게 잔을 기울이고 있을테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묵묵히 간단한 식사만을 하겠지.

번만큼 쓰고, 쓴만큼 번다. 그게 모험가의 기본적인 마인드였다. 당장 내일 살아있을지도 모르는데 저축을 하는 얼간이는 드물었다.

부어라 마셔라를 반복하는 모험가들의 함성소리를 흘려 들으며 지나가던 도중 음식점 앞에서 외치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정말이라니까?!"

"어휴. 또 그소리야? 적당히 좀 해라."

"그래. 너무 그러면 뼈 삭는다."

한 남자는 필사적으로 소리쳤지만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는 반응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니 내가 아는 얼굴도 몇명 있었다.

"어라. 루디 씨 아니세요?"

"이런데서 뵙는군요."

단골까진 아니지만 최근들어 내 가게를 자주 찾아오는 남자였다. 그리고 방금 전에 외친 남자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너무 그러면 뼈 삭는다고 핀잔을 준 사람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내가 가볍게 질문을 던지자 그는 마침 잘 됐다는 듯이 자신이 어깨동무하고 있는 남자의 등을 두드리며 떠들었다.

"아아. 이 녀석이 며칠 전에 의뢰 때문에 남쪽 숲에 들어갔었는데, 그 때 이상한걸 봤다고 난리에요."

"이상한 거라면?"

입고 있는 갑옷과 몸에 흐르는 마나의 수준을 보면 초짜 모험가는 아니었다.

베테랑 바로 아래 정도는 되는 수준의 모험가가 본 '이상한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동했다.

남쪽 숲이라. 그 쪽은 워낙 지형이 험해 나도 잘 들어가지 않았는데.

처음 영지에 오고 한 번은 찾아가봤지만 지형이 워낙 험해 약초가 자라기에도 좋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쓸데없이 몬스터들은 많이 어슬렁거려서 귀찮았다.

그 후로 남쪽 숲에 들어간 적은 없었다.

"큭큭. 글쎄 말이죠. 숲 안쪽까지 의뢰 재료를 찾으러 들어갔다가 길을 잃었는데 헤매던 도중에 고딕 드레스를 입은 미소녀를 봤다지 뭐에요."

"...네?"

하다못해 몬스터나 요정을 봤다면 모를까 너무 뜬금없는 단어에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고딕 드레스를 입은 미소녀라니.'

그런 내 반응이 재밌는지 그는 푸하하 웃어댔다.

그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남자는 억울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지만 내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왜 다른 모험가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믿지 않는지 대충 이해가 갔다.

실력있는 베테랑 모험가도 잘 찾지 않는 남쪽 숲 깊은 곳에서 고딕 드레스를 입은 여자애를 봤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그 여자애가 얘한테 '길을 잃은거에요?'고 묻길래 고개를 끄덕였더니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앞장서서 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애를 따라 걷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남쪽 숲 입구에 도착해 있었고, 그 여자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네요."

그는 기분 나쁜 가성까지 쓰며 '길을 잃은거에요?'를 흉내냈고, 그의 장난에 주변의 모험가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않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뿐이었다.

확실히 저런 말만으로는 믿기 힘들다. 차라리 그가 환각에 빠졌거나 망상을 부풀린 것이라고 생각하는게 맞겠지.

'그래도 뭔가 미심쩍긴한데.'

예전에 들었던 소문 중에 이것과 비슷한 것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애초에 망상이라기에는 쓸데없이 구체적이다.

단순히 고딕 드레스를 입은 소녀를 만난 것 뿐만 아니라 돌아오는 길을 안내받았다니.

굳이 그런 거짓말을 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본래 소문은 와전되거나 부풀려지는 경우가 많지만 근원 없는 소문은 없는 법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눈 앞의 남자가 겪은 것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남쪽 숲에 소문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확인해 봐야 하나.'

지난번 던전 사건 이후로 바스티안 영지의 혼란이 이제 막 가라앉은 참이었다.

그나마 마리안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조용히 처리했지만 남쪽 숲에 있는 무언가와 관련된 일도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마침 시청에 가는 길이었으니 아르웬에게 넌지시 물어보기로 했다.

여전히 떠들썩하게 웃어대며 놀리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조용히 빠져나왔다.

의외의 곳에서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걸음을 재촉했다.

다른 건물들의 불이 하나씩 꺼져갈 때, 유일하게 모든 창에 불이 들어와 있는 건물이 보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영업을 끝내고 세금 납부를 위해 찾아왔던 몇몇 사람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시청 안으로 들어가니 다섯 명의 직원들 중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르웬은 그 한 명에 해당하지 않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르웬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손을 흔들어 반겨주었다.

그런 아르웬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다른 여직원 중 하나가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앗. 루디 씨다!"

"뭐? 정말?"

곧이어 다른 여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웅성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나를 쳐다봤다.

예상 외의 반응에 나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그녀들이 저런 극적인 반응을 보일만한 짓을 한 기억은 없는데.

혹시나 싶어 머릿속의 기억을 뒤져봤지만 짚히는 것은 없었다.

그 사이에도 쉬고 있던 여직원들은 가장 오른쪽에 있던 아르웬의 자리 뒤로 가서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심지어 지금 업무를 보고 있던 직원도 연신 이쪽을 곁눈질 하는 것을 보니 일이 끝나면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 같았다.

"......"

결국 쏟아지는 시선을 받아내며 나는 아르웬의 앞자리에 앉았다.

아르웬은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는 다른 직원들을 밀어내며 화를 냈지만 방긋방긋 웃는 직원들이 물러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호기심 어린 질문들을 내게 던져왔다.

"루디 씨. 정말 아르웬이랑 사귀는거에요?"

"고백은 누가 먼저 했어요?"

"좀 더 자주 찾아 오셔야 하는거 아니에요?"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자기들끼리 쫑알거리는 모습을 보니 머리가 아파왔다. 아르웬과 친하게 지냈던게 그렇게 퍼진건가.

원래 여자들이 그런 소문을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아르웬에게 그런 소문이 날 줄은 몰랐다.

차라리 매일같이 들러붙는 플로라와 사귄다는 소문이 퍼지면 납득할 수 있겠지만.

'물론 지난번에 분위기를 타서 한 번 해버리긴 했다만.'

내가 간간히 찾아가거나 스스로 찾아오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아르웬은 유일하게 나와 단 한 번만 몸을 섞은 여자였다.

물론 그날 밤에 엄청난 쾌락을 얻었지만 아르웬도 나도 성숙한 나이인만큼 단순한 감정보다는 현실과 평판을 신경쓰는 편이었다.

그래서 분위기를 탔던 그때 이후로 아르웬과는 야시시한 분위기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아아. 정말이지! 루디 씨랑은 그냥 친구라고 말했잖아!"

참다못한 아르웬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화내자 그제서야 그녀들의 쫑알거림이 수그러들었다.

"하지만...아르웬은 늘 루디 씨 이야기 뿐인걸."

"맞아맞아. 지난번에 루디 씨 집에 갔다온 이후로는 어쩐지 분위기도 바뀌었고."

"그때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에요?"

의심스런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여직원들의 감은 상당히 날카로웠지만 순순히 진실을 말해줄 의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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