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260)

"딱히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딱 잘라 대답하자 여직원들은 재미없다는 듯 에에~하고 투덜댔지만 나는 그녀들을 무시하고 아르웬에게 말을 걸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루디 씨 덕분에요. 오늘 찾아오신 건 세금 납부 때문이시죠?"

나는 품 안에 넣어뒀던 장부와 납부해야 할 세금이 들어있는 가죽 주머니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아르웬은 장부를 건네받으며 내게 작게 속삭였다.

혹시 내가 거북해한다고 생각했는지 아르웬은 내게 미안해하며 사과했다.

"괜히 저 때문에 죄송해요. 나쁜 아이들은 아닌데 그런 쪽의 이야기를 좋아해서..."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내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괜찮다고 하자 그제서야 아르웬은 걱정스런 표정을 거두었다. 뭐, 사실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고.

부담스러운 것은 맞지만 저 정도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르웬은 내게 받은 장부를 한 장씩 넘기며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녀는 중간중간 작게 감탄사를 흘렸다.

아르웬의 감탄사를 들은 직원들도 조금 떨어져 있다가 다시 호기심이 도졌는지 아르웬의 등 뒤에 서서 장부를 함께 확인하기 시작했다.

"엄청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네."

"결산 내역도 하나도 빠짐 없이 기록되어 있고."

"수정할 부분 하나 없는걸."

그녀들의 말에 아르웬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다른 분들은 빼먹거나 날조하셔서 그걸 찾느라 고생했는데 루디 씨는 역시 다르시네요."

나를 믿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는 아르웬의 뒤에 서 있는 여직원들에게서 다시 지방 방송이 흘러나왔다.

"저거 봐. 눈에서 꿀 떨어진다니까?"

"언제쯤 사귀려나..."

"결혼식 주례는 사무관님이 보시는건가?"

어이. 너무 앞서 나가잖아.

나는 내 앞에 놓인 가죽주머니를 아르웬 쪽으로 밀었다.

"장부에 기록된 수익의 3할 입니다. 확인하시죠."

대부분의 영지에서는 4할, 영지민을 핍박하는 곳은 5할까지도 걷는다.

하지만 바스티안 백작가는 기본적으로 상인들의 교류도 적고, 대부분 영지 내에서의 교류가 이뤄지기 때문에 세금도 적게 걷는 편이었다.

'그야 세금을 많이 받으면 상인들이 오려고 할 리가 없으니.'

아르웬은 가죽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금화와 은화를 모두 센 다음 3분의 2쯤 되는 동전들을 내 쪽으로 다시 밀어냈다.

아르웬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내게 그녀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왜 이런지 궁금하시죠? 우선 장부에 기록된 것들 중 가장 큰 결제 내역이었던 저희 시청에 공급한 포션들."

루디 씨가 파격적으로 가격을 깎아주신만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세금을 걷지 않기로 했어요. 이건 영주님에게도 허락 받은 부분이에요.

아르웬의 말에 나는 앨리스가 떠올랐다.

아마 지금 영주 대리 역할을 맡은 앨리스가 허락한 것 아닐까?

시청에 공급했던 포션들의 양이 내가 그전까지 팔아치운 포션들의 절반쯤은 됐다.

확실히 거의 밑지는 가격에 포션을 공급하긴 했는데, 이렇게 배려해줄 줄이야.

'나중에 좀 더 귀여워 해줘야겠네.'

하지만 아르웬의 설명은 그것이 다가 아니였다.

"그리고 1급 시민에게는 절반의 세금 감면 혜택이 있어요. 거기서 또 절반을 빼면 이렇게 되는거죠."

아르웬의 앞에 놓인 동전들은 내 앞에 놓여있는 것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정말로 이래도 되는건가.

혹시나 싶어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른 여직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르웬에게 수긍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돌려받은 금화와 은화들을 가죽 주머니에 담았다.

이런 푼돈에 연연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원래 내야 하는 돈이 나가지 않은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동전을 모두 털어넣은 가죽 주머니를 품 안에 넣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는 아르웬에게 주기 위해 가져온 초콜릿을 건네주는 것도 불가능했다.

지금 그랬다간 당장 뒤에서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여직원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방금 전까지 다른 손님을 상대를 하고 있던 직원마저 합세해서는 네 명이서 두런두런 나와 아르웬의 관계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들을 쫓아낸 것은 다름 아니라 사무관이었다.

"무슨 일인가? 슬슬 볼 일 끝났으면 다들 퇴근하자고."

박수를 두어 번 치며 여직원들을 해산시킨 사무관은 그녀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내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사무관은 흐뭇한 표정으로 나와 아르웬을 번갈아보고는 층을 올라가서 시청의 등불을 모두 끄며 내려왔다.

아르웬과 여직원들은 그동안 탈의실에 들어가 정장을 갈아입고 나왔다.

나는 바로 돌아가도 됐지만 아르웬을 집까지 바래다주는 길에 방금 전에 들었던 이야기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나보다 훨씬 오랫동안 이 영지에서 머무른 아르웬이라면 뭐라도 알고 있지 않을까.

게다가 모험가들의 의뢰를 발주하고 확인하는 것 역시 아르웬의 일이었다.

'하는 김에 남쪽 숲에 대해서도 슬쩍 물어보고.'

결론을 내린 내가 건물 밖에 서서 잠시 기다리자 아르웬과 여직원들이 함께 나왔다.

아르웬은 내가 아직도 남아있는 줄 몰랐는지 살짝 놀랐고 다른 여직원들은 묘한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어딘가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밤길이 어두우니 집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여직원들이 '꺄악!'하는 비명과 함께 자기들끼리 끌어안으며 역시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댔다.

아르웬 역시 당황했는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은 내 손을 맞잡았다.

어느새 건물 안을 확인하고 나온 사무관도 그윽한 눈길로 나와 아르웬을 응원해주고 있었다.

다행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달랐기 때문에 다른 여직원들이 귀찮게 하는 일은 없었다.

아르웬의 따스한 손을 맞잡은 채 밤의 거리를 함께 거닐었다.

평소 혼자서 걸을 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어쩐지 오늘은 조금 달랐다.

아무 말도 없이 길을 걷던 도중 나는 품 안에 넣어뒀던 초콜릿을 꺼냈다.

아르웬은 내가 꺼낸 초콜릿의 상표를 보고는 반색했다.

"이거 혹시 수도에서만 파는 '프로쉐 초콜릿' 아니에요?"

"맞습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아르웬은 이 영지에서 태어났으니 이 초콜릿에 대해서 모를 줄 알았는데 한 눈에 알아보길래 조금 신기했다.

"그야 당연하죠! '프로쉐'는 여성 잡지에 매달 신작 디저트의 그림이 올라오는 것과 동시에 '수도에 가면 꼭 가봐야 하는 가게'중 하나인걸요!"

그 가게가 그 정도로 대단한 곳이었나. 나보다 아르웬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루디 씨는 이 초콜릿을 어디서 구해 오신거에요?"

"...예전 친구가 오랜만에 찾아오면서 선물로 줬습니다."

온도 조절 마법과 시간 왜곡 마법을 함께 사용해서 일 년이 넘게 눅눅하지 않게, 녹지도 않게 유지시켰다고 할 수도 없었기에 적당한 변명을 꺼냈다.

아르웬도 내가 이 초콜릿을 얻은 계기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았다.

그저 내 손에 들려 있는 고급스런 포장지에서 시선을 떼질 못할 뿐이었다.

"그렇게 쳐다보지 않으셔도 드릴겁니다. 큭큭."

너무 뚫어져라 초콜릿을 보고 있었단 것을 자각한 아르웬이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니에요. 그런 귀한 걸 받을 순 없는걸요. 게다가 친구 분이 주신 선물이라면서요."

"괜찮습니다. 혼자서 먹기에는 양도 너무 많고, 아르웬 씨도 요즘 밤까지 고생하실텐데 힘내시라는 의미에서 드리는 겁니다."

"루디 씨..."

아르웬은 내 말에 감동받았는지 부드럽게 부드럽게 웃으며 내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아르웬에게 내가 들고 왔던 초콜릿 두 개를 건네주자 그녀는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초콜릿의 포장지를 천천히 벗기기 시작했다.

길을 걸으면서 포장을 벗기다보니 자연스레 걸음걸이가 느려졌지만 나는 그런 아르웬의 보폭에 맞춰 걸음을 늦췄다.

아르웬은 조심스레 초콜릿의 윗부분 포장을 벗겨냈고, 은박 포장지 너머로 드러난 갈색 초콜릿을 한 조각 손으로 떼어냈다. 그리고는 내 입 앞에 내밀었다.

"...아...아앙?"

자신도 부끄러워하면서 왜 그러는 것인지. 아르웬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손을 회수하지 않았고, 나는 별 수 없이 아르웬의 손에 들려 있는 초콜릿을 물었다.

아르웬의 모습이 귀여워 혀로 손가락을 낼름 핥자 아르웬은 '꺄웃!'하는 귀여운 신음을 흘리며 황급히 손을 뺐다.

초콜릿을 혀로 살살 핥으니 입 안 가득 달콤한 향기가 퍼졌다.

크림으로 만들어 빵에 찍어먹는 것도 괜찮지만 역시 초콜릿 그 자체로 녹여 먹는 것이 좋았다.

첫 조각을 양보한 아르웬은 초콜릿을 다시 한 조각 뗴어내서 자신의 입 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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