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야 예전부터 많이 먹어온 초콜릿이라 그리 큰 감흥이 없었지만 아르웬에게는 다르게 느껴졌는지 자신의 양 손으로 뺨을 감싸며 행복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한 조각을 자그마치 5분 가까이 우물거리며 음미한 아르웬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고작해야 초콜릿 한 조각으로 저런 소리라니. 여자들 중 단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이번 일로 다시 확신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내 질문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아르웬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사실 잡지 같은 걸 보면서 수도에서 유행하는 옷이나 간식을 보는게 제 취미였거든요. 정말 고마워요. 친구분한테도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 말을 기점으로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나는 아르웬과 직장과 아이린에 대한 가벼운 잡담을 나누면서 길을 걷다가 슬슬 본론을 꺼냈다.
"그러고보니 최근에 모험가들에게는 별 일 없습니까?"
"네. 딱히 이렇다 할 큰일은 없는데요. 왜 그러세요?"
"오늘 시청에 가는 길에 신기한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내가 들었던 이야기를 아르웬에게 들려주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며칠 전에 들었어요. 그 모험가 분이 시청에 직접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지만 아무래도 쉽사리 믿기 힘든 이야기다 보니 시청에서도 보류 상태에요."
"그럼 남쪽 숲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없습니까?"
"그게 사실..."
이어진 아르웬의 설명에 나는 남쪽 숲에 분명 뭔가가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최근 남쪽 숲에 있는 몬스터 토벌이나 재료 수집 의뢰를 받고 떠났던 모험가들이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아르웬은 남쪽 숲과 관련된 의뢰가 무척 적고, 모험가들이 실종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에 증거가 부족하다고 했지만 나는 분명 소문과 오늘 들은 이야기가 관련이 있다고 판단했다.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모험가로 활동하며 갈고닦은 감이 분명 남쪽 숲에 뭔가가 있다고 경고해왔다.
어쩌면 방금 전 들은 이야기와 모험가들이 실종된 것은 관련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남쪽 숲을 한 번 둘러볼 필요는 있었다.
'둘 다 관련 있을 수도 있고.'
동떨어져 보이던 두 사건이 사실 하나였다는 것은 드문 이야기도 아니었다.
나름 결론을 내린 나는 그 사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눈 앞에는 무척 즐거워하는 아르웬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와 이렇게 대화하는게 얼마만이더라.
마지막으로 만났던게 지난번에 아이린과 어색해졌을 때니 보름이 훨씬 넘은 것 같은데.
아르웬은 나보다 어린 여자들 중에서는 가장 성숙한 편이었다.
그래봤자 8살이나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 막 성인이 된 플로라와 앨리스보다는 현실을 직시할 줄 알았고, 감정에 쉽게 휘둘리지도 않았다.
덕분에 나도 아르웬을 대할 때 친한 동생을 대하는 느낌으로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아이린도 요즘 동네 아이들이랑 잘 지내는 것 같던데. 남자친구는 없데요?"
아르웬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했지만 나는 담담한 척 연기했다.
"...아직 그런 건 없는 것 같더군요. 솔직히 조금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에이~. 루디 씨도 너무 과보호시다. 그 나이쯤이면 가장 관심있는게 연애일걸요?"
아이린에게 남자친구라...
흠.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인지는 몰라도 눈에 밟히면 박살을 내주마.
아이린을 지키려면 적어도 나 정도는 이길 수 있어야겠지.
"아이린의 연애 문제까지 간섭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온전히 그녀의 자유니까요."
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좀 찝찝한 것은 사실이었다. 딸이 시집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아버지의 기분이 이럴까.
아르웬은 그런 내 반응이 재밌는지 키득대며 계속 놀렸다.
"에이.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표정이 잔뜩 굳어있는데요? 사실 싫으신거 아니에요?"
"...딱히 그렇진 않습니다만."
내가 무심한 척 말해도 아르웬은 여전히 입가에 걸린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하하... 죄송해요. 늘 냉철해 보이던 루디 씨의 그런 반응이 재밌어서."
얼마나 웃어댔는지 그녀의 눈가는 살짝 젖어 있기까지 했다.
"...괜찮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아르웬의 집에 도착했다. 시청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여관이었다.
"평소에는 여기서 시청에 출근하고, 주말에는 본가에 돌아가서 부모님을 뵙고 오거든요."
아무래도 본가가 시청에서 머니 직장에 가까운 곳에 방을 구해 자취를 하는 모양이었다.
"바래다 주셔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 바람이 차니 어서 들어가십시오."
어느새 밤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져 별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르웬도 바래다줬겟다, 이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등 뒤에서 아르웬이 내 소매를 붙잡았다.
"...저기. 루디 씨."
어딘가 망설이는 듯한 아르웬은 숨을 한 번 고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이 뒤에 일정 없으시면... 술 한 잔 하고 가지 않으실래요?"
아르웬도, 나도 늦은 저녁에 자기 집에서 '술을 마시자'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모를 정도로 순수하지는 않았다.
내 소매를 잡고 있는 아르웬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도, 홍조를 띠고 있는 아르웬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물들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아르웬에게 되묻는 것은 그녀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아무 말 없이 돌아가려던 몸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다른 사람과 함께 술을 마시겠군요."
유감스럽게도 아이린은 아직 너무 어려 내 술상대가 되주지 못했다. 지난번에 카르멘과 술을 마신 것이 마지막이었다.
내가 아르웬의 초대에 응하자 그녀는 기뻐하며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여관은 총 2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층은 프론트와 식당이 있었다.
식당은 이미 문을 닫았는지 불이 꺼져 있었고, 여관의 주인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아르웬을 보며 반색했다.
"아이구. 우리 아르웬 아녀. 뒤에는..."
"안녕하세요. 루디라고 합니다."
아르웬과 상당히 친분이 있는 사람으로 보였기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런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할머니는 끌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부드럽게 맞잡았다.
"흐흐. 우리 아르웬 신랑감답게 참 싹싹하네."
"그런거 아니에요! 할머니!"
아르웬의 말에도 할머니는 음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려그려. 혹시 뭐 필요한건 없고?"
"혹시 맥주 좀 마실 수 있을까요?"
"부엌 안쪽 창고에 보면 통에 들어 있으니 마시고 싶은만큼 퍼가. 홀홀. 잔은 내일 부엌에 다시 갔다놓고."
"맥주 값은..."
"에잉. 돈은 무슨. 대신 너무 큰 소리는 내지 말라고. 홀홀. 옆방 사람들이 잠에 못 들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든 할머니가 다른 손의 검지로 원 안에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노골적인 할머니의 태도에 아르웬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져 있었다.
결국 감사하다는 말을 한 아르웬과 나는 부엌의 창고에 들어왔다. 빛이 잘 들지 않아 맥주가 든 오크통을 찾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 다음에는 부엌 구석에 놓여 있는 나무 맥주잔을 오크통 안에 넣어 가득 퍼올렸다. 평소에 마실 때는 몰랐는데 잔을 가득 채운 맥주잔은 상상 이상으로 묵직했다.
'평소 점원들은 이런 걸 양손에 쥐고 서빙하는건가.'
새삼 그녀들의 노고를 깨달은 나는 아르웬의 몫까지 잔을 채웠다.
"무거우시면 제 잔은 제가 들게요."
"아뇨. 괜찮습니다."
연약해 보이는 아르웬이 이 잔을 받아들었다간 제대로 걷지도 못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양 손에 잔을 든 채 아르웬을 따라갔다. 아르웬의 방은 2층 가장 오른쪽 방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전등을 켜니 어두운 방 안에 빛이 들어왔다. 평소 아르웬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정돈된 방 안과 불필요한 가구 없는 단촐한 방이었다.
"너무 휑하죠? 혼자서 지내다보니 별로 방을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아닙니다. 오히려 단정한 분위기라 좋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는 방보다는 훨씬 마음에 들었다.
구석에 놓여있는 책장에는 아까 말했던대로 여성향 월간 잡지들과 유명한 소설 몇 권이 꽂혀 있었다.
책들이 제목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고 아르웬의 꼼꼼한 성격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혼자 사는 방이라 의자가 하나 밖에 없었기에 바닥을 가볍게 닦은 다음 자리를 잡았다.
들고 온 맥주 잔을 바닥에 놓자 아르웬은 부엌에서 간단한 안주를 들고왔다.
육포와 땅콩 한 주먹을 접시에 담아 놓고는 서로 잔을 들어올려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