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사귀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아르웬 씨도, 저도 술김에 일어난 일이니까요."
"...그럼,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건 아니란거죠?"
"물론입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어차피 제시카가 아르웬에게 그런 것을 물어볼 정도로 친하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게 아르웬은 제시카보다 다섯 살은 더 많았으니까.
제시카는 아까도 아르웬을 계속 아르웬 씨라고 불렀다. 여자들이 친해지면 언니라고 부르는 것과 달리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는 뜻이었다.
옆 방에서 지내는만큼 간단한 인사는 할 수 있더라도 이런 민감한 질문은 쉽사리 못할 것이 분명했다.
예상대로 제시카는 닫혀 있는 아르웬의 방문을 한 번 노려보고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그렇지. 어젯밤에 시끄러워서 잠도 제대로 못잤다고요."
나름 나를 타박하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것 같지만,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는지 발그레 홍조를 띤 얼굴로 말해봤자 설득력이 없었다. 나는 제시카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물러나기로 했다.
지금이야 속여넘겼다 하더라도 계속 이야기하다보면 허점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안젤리카를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 역시 이유 중 하나였다. 늘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다니니까. 물론 지난번 플로라와 섹스 도중에 찾아왔을 때는 좀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만.
제시카가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는 동안 인사를 하고 계단을 내려오던 도중 밑에서 걸어 올라오고 있던 안젤리카와 마주쳤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희미한 미소만을 머금고 있었다.
모르는 척 할 수도 없었기에 살짝 고개를 숙이자 그녀 역시 살짝 목례를 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1층으로 내려오니 식당 쪽에 있는 모험가들이 보였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오늘 몬스터를 사냥할 곳을 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위에서 내려온 나를 신경쓰지 않고 자기들끼리 대화를 이어나갔다.
여관을 나오는 길에 가게 문을 열며 환기를 시키던 할머니가 다 알고 있다는듯이 킬킬대며 나를 놀렸다.
"끌끌. 아주 체력이 넘치더구만? 새벽 내내 여관이 떠들썩 했으니 말이야."
노골적인 말에 나는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여전히 음담패설을 해대는 할머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도망치듯이 여관에서 빠져나왔다.
이미 날이 밝으며 사람들은 가게를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예상 이상으로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나는 속으로 아이린이 아직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몰래 방으로 돌아가려 했던 내 바람이 무색하게도 가게로 돌아왔을 때, 내 예상과는 달리 아이린은 이미 깨어 있었다. 지난번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잠에서 완전히 깬 아이린은 체념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아이린의 앞에 서 있었더니 머릿속이 하얗게 됐다.
지난번에도 몇 번인가 느꼈던 외도를 아내에게 목격당한 남편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치 숨기고 있던 모든 것을 들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예전에 메두사와 눈이 마주쳤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다만 그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 뿐만 아니라 양심의 가책 역시 느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아이린을 지나 들어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미안해 해야 하는가.
아이린을 아끼고 챙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이린은 내 소유물인 노예에 불과했다.
노예가 주인의 생활에 간섭할 권리 따윈 없었다.
일반적인 주인이라면 오히려 뻔뻔하게 모르쇠로 일관하는게 더 정상적인 방식이겠지.
아니. 어쩌면 주인을 저런 시선으로 쳐다본다고 뺨을 갈기는 녀석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러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아이린을 상대로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우습게도 나는 아이린을 과거의 내게 겹쳐보고 있었다.
빈민가에서 빵 한 조각, 먹다 버린 과일을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졌다.
그렇게 간신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경계에서 방황하다가 운 좋게 거두어졌다.
지금도 내게는 그 순간의 기억이 선명했다. 이유 없는 선의는 없다고 생각했던 내가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그때였다.
나를 거두어 줬었던 그녀는 모두에게 상냥한 사람이었다.
모든 마을 사람이 그녀를 좋아했고, 나 역시 진창에서 허우적대던 나를 구해준 그녀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했었다.
'자그마치 이십 년도 더 된 일인가.'
만약 그때의 내가 나를 거두어준 그녀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는 것을 알게 됐으면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린의 기분이 확 와닿았다.
단순한 질투심이 아닌 자신이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배신감이 들었을 것 같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며 입 안의 침이 바싹 말랐다. 분명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도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나는 비틀어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됐다.
아이린은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에는 분노나 원망은 없었다. 그저, 그녀의 눈은 이때까지 본 그 무엇보다 슬퍼보였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순간 목구멍에 걸려 있던 말이 다시 들어갔다. 차갑게 식은 머리와는 정반대로 심장은 전에 없이 두근거렸다.
결국 나는 말하는 것 대신 그녀를 끌어안았다. 따스한 온기가 온 몸에 닿는 것과 함께 그녀의 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집을 비우고, 밤에 돌아다닐 때마다 아이린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 동안 내 품에 안겨 있던 아이린은 울음을 터뜨렸다.
곧 세상이 멸망한다는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서럽게 울어대는 아이린의 등을 토닥여주며 나는 한참동안 그러고 있었다.
한참을 운 아이린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다.
나는 아이린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이린은 눈물이 마르며 눈이 붓고, 뺨에는 눈물 자국이 잔뜩 남아있었다.
아이린은 아무 말도 않고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가냘픈 팔과 자그마한 체격의 그녀는 내가 조금만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았다. 새삼 그녀가 아직 어린아이라는 점이 떠올랐다.
뭐든지 척척 해내고, 생각 역시 어른스러워서 내 멋대로 아이린을 어른처럼 대했지만 알맹이는 겁이 많은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내 딴에는 아이린을 배려한다고 했던 행동들마저 아이린에게는 부담으로 느껴졌다는 것을 깨닫고 반성했다.
그 날은 아이린과 좀 더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상대로 아이린은 내가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슬쩍 돌려 말하긴 했지만 자신의 등 뒤에 달려 있는 날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서큐버스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보랏빛 날개.
'자신은 평범한 사람과 조금 다르다고.'
마족과 인간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었지만... 그래도 아이린은 자신이 마족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 몇 번이나 '조금' 다를 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여러 종족을 만나본 내 입장에서야 인간이든 마족이든 별 차이 없으니 상관없었지만.
내가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가까이하게 된다 하더라도, 아이린이 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배움이 늦는다 하더라도.
나는 절대 그녀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몇 번이나 약속을 해주고 나서야 아이린은 안심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아이린은 내가 '비정상적'으로 대우를 잘해주니 조금이라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버릴 것이라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듯하다.
'확실히 일반적인 주종 관계와는 거리가 멀지만.'
노예는 상품과 마찬가지다. 인간의 대우를 받지 못한다.
그래도 일단 사람 취급을 받는 화전민과 달리 노예는 주인이 심심풀이로 죽여도 문제삼지 않는다.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노예는 말 그대로 물건처럼 사용될 뿐이다.
남자 노예는 힘쓰는 일에 최소한의 식량만을 배급받으며 죽어라 일하고, 얼굴이 반반 여자 노예는 주인의 육변기로 전락한다.
어느쪽이든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이린 역시 그런 삶을 살게될 것이라고 상상했던만큼 내 과한 호의를 최후의 만찬처럼 받아들인 것 같았다.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고, 대체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한동안 태우지 않던 연초를 오랜만에 입에 물었다.
아이린은 감정의 소모가 극심했는지 금세 잠이 들었다.
그래도 오해를 풀고 안심을 시켜준 것이 좋게 작용했는지 조금은 밝아진 표정을 지은채 고롱고롱 자고 있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물기를 머금어 무거워진 공기가 느껴졌다.
연초에 불을 붙이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독한 냄새와 함께 연기를 내뱉는 순간.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타닥. 타닥. 가느다란 실선의 궤적을 그린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처음에는 조금씩 쏟아지던 빗줄기가 어느새 굵어졌다.
연초를 모두 태운 나는 남은 부분을 바닥에 던졌다. 쏟아지는 두꺼운 빗줄기가 순식간에 연초의 불씨를 사그라뜨렸다.
옷에 묻은 물기를 한 번 털어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창 밖에는 계속해서 쏟아지는 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창 밖으로는 여전히 비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조금 열자 서늘한 공기와 함께 빗줄기가 손가락에 튀었다.
아무래도 비가 쉽사리 그칠것 같지는 않았다.
비가 들치지 않도록 다시 창문을 닫고는 여전히 꿈나라에 가 있는 아이린을 깨웠다. 비가 와서 정확한 시간은 모르지만 아마 이른 아침일 것이다.
"으응..."
눈을 부비적대며 일어난 아이린을 한 번 꼬옥 안아주자 아이린은 배시시 웃으며 기뻐했다.
"헤헤...주인님 냄새..."
별로 좋은 냄새도 아닐텐데 아이린은 내 어깨와 목덜미의 냄새를 즐겨 맡곤 했다. 그렇게 아이린을 안아주던 도중 아이린의 배꼽시계가 성대하게 울렸다.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리자 아이린은 안고 있던 나를 밀어내며 숨기려 했지만 나는 이미 다 들은 후였다.
'어제 그렇게 울고 그대로 잠들었으니 당연하지.'
하루종일 굶은 아이린의 배가 공복을 호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