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속에 기름진 음식을 먹였다간 탈이날 것 같았기에 아침은 이미 간단한 스프와 빵으로 차려놓았다.
"식탁 위에 아침 차려놨으니 잘 챙겨 먹고, 찬장에 있는 간식은 마음대로 꺼내 먹어도 된단다. 오늘 하루는 푹 쉬고 있으렴."
"...주인님은요?"
아이린이 나를 올려다 보는 시선과 마주했다. 다만 전처럼 내가 나가는 것을 싫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아쉬워하기는 했지만 그런 것은 오히려 내 입장에서 고마웠다. 적어도 아이린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좋아하고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잠깐 알아볼게 있어서 나가봐야 한단다. 저녁 때 전까지는 돌아올테니 걱정 말고 쉬렴. 밖에 비가 잔뜩 쏟아지니 나가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주인님. 안녕히 다녀오세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배꼽인사를 하는 아이린을 나는 다시 한 번 끌어안으며 그녀의 이마에 키스해주었다.
아이린은 내 입술이 닿은 자신의 이마를 양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즐거워했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어제 아이린이 잠들고나서 지난번에 갔었던 디저트 가게를 찾아 조각 케이크와 몽블랑, 슈크림 등의 디저트를 사서 찬장에 넣어두었다.
비에 젖지 않게 하느라 상당히 고생을 했었지. 습기 때문에 눅눅해지지 않도록 마법을 걸어놨으니 보관에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빼먹은 것이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나는 외투 위에 로브를 걸쳐 입었다. 창 밖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제보다 굵어진 빗줄기는 쉽사리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오늘이 휴식일이란 점도 거들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길거리를 로브를 뒤집어 쓴 채 걸었다. 차가운 빗물이 로브를 타고 흘러내리고, 손과 얼굴을 적셨다.
젖은 몸을 얼릴듯이 불어오는 칼바람에 로브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지독한 폭우였지만 오히려 몸에는 힘이 넘쳤다.
내가 빈민가에서 굴러다니다 구원 받은 그날, 그녀가 나를 구한 그 날도 이렇게 비가 쏟아졌었다.
그 날 이후로 비는 내게 있어 행운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움켜쥔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고보면 아이린과 만났던 날에도 비가 왔었지.'
아무래도 내가 비와 인연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성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엄청난 폭우에 성을 지키는 병사들마저 간이 천막을 쳐 놓고는 그 안에 서 있었다.
천막 안에 서 있던 두 병사는 폭풍우를 뚫고 걸어 나오는 나를 보고 움찔하더니 창을 들어 위협했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서야 내 얼굴을 알아보고 창을 거두었다.
"아이고, 이런 날씨에 어딜 가시는 겁니까?"
"하하. 오늘 꼭 구해야 하는 재료가 있어서 말입니다."
입고 있던 로브를 털어 옷에 묻어있던 물기를 흘렸다. 천막 안에 작은 모닥불을 피우고 있던 병사들은 옷이라도 말리고 가는게 어떻냐고 했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병사들의 걱정어린 시선을 받으며 성문을 열고 나왔다. 남쪽 숲은 다른 숲과 달리 성벽에 몹시 인접해 있었다.
흙탕물이 고여 뿌옇게 된 웅덩이를 뛰어넘으며 몇 분 정도 걷자 금세 숲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름대로 길이 개척되어 있고, 안내 표지판마저 있는 다른 숲들과는 달리 남쪽 숲은 개발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독초와 몬스터는 많지만 막상 건질만한 것은 별로 없는 위험한 숲이었다.
지형도 험해 조금만 길을 잘못 들어도 온갖 고초를 겪기 일쑤였다.
쏟아지는 비가 감지 마법을 방해했지만 그래도 정신을 집중하니 대충 숲 속의 몬스터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다시 마나를 거두어들이려 하는 순간, 감각에 기묘한 뭔가가 잡혔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자꾸만 신경쓰이는 무언가.
아주 잠깐 마나의 기운이 느껴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간중간 미끄러운 바위와 범람하는 강가를 뛰어넘어 도착한 곳은 숲의 남쪽 끝자락이었다.
남쪽 숲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라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발걸음을 떼었다.
그렇게 좀 더 걸어가던 도중,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경계'를 넘어서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결계?'
긴장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라면 제법 잘 짜인 결계라는 소리였다.
'이런 영지에서 결계를 보게 될 줄이야.'
어찌됐든 이런 수준 높은 결계까지 있을 정도면 확실히 남쪽 숲에 뭔가가 숨겨져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결계를 넘어 걸어갈수록 쏟아지던 빗줄기는 가늘어졌다.
나중에는 비가 왔던 것이 거짓말처럼 화창한 날씨의 숲이 나왔다. 마치 이곳만 격리된 것처럼.
다른 힌트가 없나 찾아보던 도중 나는 갑자기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전에 모험가에게 들었던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소녀가 있었다.
"...우와. 내 존재를 먼저 눈치챈 건 오빠가 처음이야!"
탐스러운 붉은색 과실의 빛을 띠는 붉은 머리카락, 허벅지가 드러나는 칠흑빛 드레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머리에는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꽃 장식이 달려 있었다.
'인형같다.'
천재 조각가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인형을 만들면 저런 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눈 앞의 소녀는 아름다웠다.
다만 이성적인 아름다움 보다는 잘 만들어진 조각품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이 방방 뛰며 내 주변을 돌았다.
"이때까지 다른 사람들은 전분 내가 말을 걸고 나서야 눈치챘는데. 오빠는 꽤 실력이 좋구나. 헤헷."
어린아이에게 칭찬을 들어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제서야 눈 앞의 소녀의 아름다움에 취했던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결계 안에서 내가 간신히 기척을 잡아낸 소녀.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내가 의심을 하든말든 눈 앞의 소녀는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오빠도 다른 사람들처럼 길을 잃고 여기까지 온거야?"
길을 잃었다기 보다는 직접 내 발로 온 셈이었지만 좀 더 정보를 얻어볼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녀는 그럴 줄 알았다며 빙긋 웃었다.
"그럼 내가 숲 밖까지 데려다줄까?"
여기까지는 그 모험가에게 들었던 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이것 뿐이라면 남쪽 숲에서 일어난 모험가들의 연쇄 실종사건과 연계가 되질 않는다.
"아니. 괜찮아. 그보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본 적은 없니?"
내 질문에 소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에 몇 번인가 다른 아저씨들이 찾아온 적이 있어."
몇 번인가? 영지 내에서 이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그 모험가 하나 뿐이었을텐데.
"내가 숲 밖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더니 그 아저씨들은 나를 덮치려 들었거든. 그래서 혼내줬어!"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아마 그녀가 말하는 '혼내줬다'는 것은 그 모험가들을 죽였다는 것이겠지.
눈 앞의 소녀는 홀릴만한 미모를 가졌으니 평소에 여자를 밝히거나 특이한 성벽이 있는 놈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싶었다.
상대를 알아보지 않고 덤빈게 그들의 사인(死因)이라면 사인이었다.
역시, 눈 앞의 소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몬스터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순수한 마나로 가득찬 것으로 봤을 때, 몬스터보다는 인간에 가까웠다.
'...인간에 가까워?'
그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나는 눈 앞의 소녀의 정체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던 선택지 중 하나였다.
"...호문쿨루스?"
과거 마도학이 극의에 이르렀을 때, 많은 마법사와 연금술사들이 만들어진 인간인 '호문쿨루스'를 제작하는 것에 열의를 불태웠다.
수많은 몬스터와 고아들이 실험에 사용되었고, 그들은 모두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꼴이 되곤 했다.
늘 이성적이어야 하는 마법사들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광기로 가득찬 연구에 결국 국가는 '호문쿨루스' 제작을 법적으로 금지했다.
그 때 만들어진 키메라들의 숫자를 보면 그 당시 마법사들이 얼마나 호문쿨루스 제작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라? 오빠 혹시 마법사였어?"
내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가 의외였는지 소녀는 금세 웃음을 되찾은 채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래. 실력은 별로지만 일단은 마법사지."
다른 마법사들이 들으면 기가 찰 이야기였지만 눈 앞의 소녀는 역시 내가 품은 마나량을 알아보지 못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괜찮아! 모네도 마법사지만 마법은 거의 못쓰는걸!"
모네. 아무래도 눈 앞의 소녀 말고도 다른 호문쿨루스가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대체 누가 이런 존재를 만들었냐는 것이었다.
눈 앞의 소녀는 겉으로 봤을 때 확실한 인간이었다.
비정상적으로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었다면 평범한 어린아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대체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길래.'
단순히 인간의 외형을 본딴 호문쿨루스를 만드는 것은 재료만 있다면 가능했다.
하지만 인간과 마찬가지로 행동하고, 감정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라 불리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포기한 것이 그 때문이었으니까.
"히힛. 아무래도 좋아. 적어도 오빠는 다른 사람들하고는 달라 보이니까, 특별히 저택에 데려가줄게."
크게 선심쓴다는 듯이 아담한 가슴을 편 소녀는 내게 손을 뻗었다.
실크 장갑을 낀 그녀의 손을 맞잡은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제와서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눈 앞의 소녀를 만들어낸 이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이 커져갈 뿐이었다.
그녀를 따라 걷던 도중 나는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결계의 파훼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특정한 길을 걸어야지만 결계 안쪽에 숨겨진 것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