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 괜찮아! 모네는 착한 걸! 분명 이해해 줄거야!"
여기서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드러난다.
어른은 미래의 두려움을 우선시하지만, 어린아이는 현재의 즐거움을 우선시하니까.
'뭐, 자기가 그렇다는데 내가 신경쓸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혼나는 것은 릴리스이니 그건 내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다.
문제는 아이린이 릴리스를 보고 어떻게 반응할지인데... 지난번에 자신을 버리고 다른 아이를 구해오는 것은 아닐까 싶었댔으니, 혹시 릴리스를 보고 다시 오해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 못 박았지만 아직 신경쓰고 있을 수도 있다.
아이린에게 릴리스를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고민하며 나는 릴리스와 함께 남쪽 숲을 빠져나왔다.
결계에서 나온 후에는 방금 전의 화창한 날씨가 거짓말인 것처럼 다시금 폭우가 쏟아졌다. 릴리스는 '비'를 처음 보는지 자신의 머리에 떨어진 물방울을 보고 놀라워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드레스와 몸을 적시는 차가운 빗줄기에 불만을 터뜨렸다.
결국 나는 마법으로 릴리스의 머리 위에 투명한 막을 하나 쳐주었다. 곡선을 그리는 투명한 막이 우산처럼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흘려냈다.
"우와! 이것도 마법으로 만든거야?"
"그래. 근데 너 내 집에 가면 네 또래의 여자애가 하나 있을텐데 걔랑 사이좋게 지내야한다?"
딱 봐도 말괄량이 같은 릴리스와 아이린이 어울리는 모습은 쉽사리 상상이 되질 않았다. 잘 지내면 좋겠는데.
"뭐야. 오빠 사실 유부남이었어?"
"그럴리가 있냐. 그냥..."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문득 릴리스에게 마땅히 설명할 단어가 없다는 것을 자각한 나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화제를 돌렸다.
"큼큼. 아무튼 내 자식은 아니야. 그보다 너, 갈아입을 다른 옷은 없어?"
지금 릴리스가 입고 있는 검보랏빛의 고딕 드레스는 어딘가 마녀를 연상시키는 옷이었다.
물론 릴리스의 인형같은 외모가 받쳐주니 그리 어색하진 않았지만 평범한 사람이 입는 옷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건 주인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소중한 옷인걸. 청결 유지 마법이랑 보호 마법도 걸려 있어!"
자신의 옷을 자랑하는 릴리스를 보니 머리가 아파왔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당장 영지 안에 들어가면 경비병들이랑 마을 사람들이 그 애는 누구냐고 물어올게 뻔했다.
하다못해 평범한 옷을 입고 있다면 모를까 이런 드레스를 입고 있으면 시선을 사로잡을 것은 자명한 사실.
마음 같아선 가게로 텔레포트를 사용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내가 나가는 것을 목격했던 남쪽 성문의 경비병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이었다.
나간 적은 있는데 들어온 기록은 없으니.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한 나는 결국 정면돌파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다시 저택에 찾아가기 전까지는 릴리스를 내 가게에서 지내게 해야할텐데, 저 꼬맹이가 얌전히 가게 안에만 있을리가 없었다.
어차피 사람들에게 보일 것이라면 처음에 제대로 소개를 시키는게 낫겠지. 나중에 플로라가 내게 따져들고, 앨리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볼 것이 벌써부터 상상됐다.
남쪽 성벽에 도착하자 성벽 위에 서 있던 병사가 나를 알아보고 황급히 성문을 열었다.
"아이고! 이제 오셨습니까! 그런데...옆에 분은?"
딱 봐도 꼬맹이였지만 일단 1급 시민인 내 동행인이라 그런지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 병사였다.
"숲 속에서 발견한 아이입니다. 일단은 데려오긴 했는데..."
단순한 미아라고 하기에는 릴리스가 입고 있는 고딕 드레스가 눈길을 끌었다. 게다가 좁은 영지인만큼 경비병은 영지민들의 얼굴을 대부분 외우고 있었다.
릴리스처럼 아름다운 소녀는 이때까지 바스티안 영지에서 본 적 없었다.
내 앞에 서 있는 경비병은 이미 릴리스의 미모에 홀려 정신을 반쯤 놓은 상태였다. 화장 하나 없이, 이런 빗줄기 속에서도 릴리스의 아름다움은 시들지 않았다.
"우선은 앨리스 님과 상담해볼 생각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경비병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그는 말을 더듬으며 내 말에 수긍했다.
"...아. 아아... 애, 앨리스 님이요..."
그는 여전히 내 옆에 미소 짓고 서 있는 릴리스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지만 결국 나를 통과시켜 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데려가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심지어 자신의 직속 상사인 영주의 딸이랑 만나겠다는데.
평범한 미아라면 경비대에서 보호를 받다가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부모를 찾지 못할 경우 고아원으로 가겠지만 이렇게 발견자인 내가 직접 데려가겠다고 하면 그들 입장에서는 막을 수도 없었다.
'신분 보증도 1급 시민 증명서가 있으니 안심이고.'
영지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들은 모두 엄격한 신분 검사를 받기 마련이지만 1급 시민이 보증하는 사람에 한해서는 그런 것도 생략할 수 있었다.
일반적이라면 신분 검사를 할 필요조차 없는 고귀한 사람을 위한 규칙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신원 불명의 꼬맹이를 몰래 들여오는데 사용되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 경비병을 지나쳐 성문을 통과한 나는 릴리스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걸었다.
영지 내에 들어가면 이목을 잡아끌 것이라는 내 예상이 무색하게도 휴일에 이 지독한 폭우 속을 돌아다니는 다른 사람은 없었다.
역시 비는 내게 있어 행운의 상징과도 같았다. 비가 온다는 것에 이렇게 감사했던 적이 또 있던가.
그렇게 집에 돌아올 때까지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잠시 후 방문을 열고 뛰어나오는 아이린의 모습이 보였다.
해맑게 웃으며 나를 향해 달려오던 아이린이 내 옆에 있는 릴리스를 보고 멈췄다.
"주인님? 옆에는...?"
"오빠. 저 애가 오빠가 말했던 그 애야?"
어느 쪽이든 열셋 전후로 보이는 아이들에게 들을 호칭은 아니었다.
오빠라는 단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릴리스같은 어린애한테 들으니 기분이 좋은 것보다는 쇠고랑을 차야 할 것 같은 배덕감이 더욱 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이린과 릴리스에게 서로를 소개시켜 주었다. 잔뜩 경계하는 아이린과 달리 릴리스는 아이린이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아이린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나하나 설명해주었고, 그제서야 아이린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린이 마족이라는 사실과 릴리스가 호문쿨루스라는 사실을 서로 알게 됐지만 딱히 적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릴리스의 경우에는 처음보는 마족이란 존재에 잔뜩 흥분해서는 날뛰기 일보 직전이었다. 반면 아이린은 냉정하게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럼 모든 시련을 통과하면 주인님이 저 애의 주인이 되는건가요?"
아이린의 시선은 방긋 웃고 있는 릴리스에게 향해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렇게 되는건가. 유산이라고 하길래 그가 남긴 마도학의 연구 기록과 마도 공학품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오히려 받아봤자 곤란하기만 할 뿐이고.'
저택에서 보였던 호문쿨루스는 최소 열 명이 넘었다.
당장 릴리스 한 명만으로도 버거운데 그녀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여력이 내게는 없었다.
릴리스에게 물어봐도 그녀는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그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모네를 찾아가서 물어보기로 했다.
서로의 자기소개가 끝나고 아이린과 릴리스를 두고 나는 마법진을 그려 앨리스를 불러냈다. 휴식 중이었는지 편한 잠옷 차림으로 있던 앨리스가 허공에서 떨어졌다.
예전에는 귀여운 비명도 자주 질렀는데, 이번에는 아무런 변화 없이 담담하게 내 품에 안겨들었다.
"뭐 해요? 어서 내려주세요."
어쩐지 이런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된 앨리스를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늘 재밌게 가지고 놀던 장난감에 질린 것 같은 감각이었다.
앨리스의 요구대로 그녀를 바닥에 내려주자 그녀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가게 안을 휙 둘러봤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일이에요?"
나는 손짓으로 가게 구석에 있던 아이린과 릴리스를 불러냈다.
릴리스를 처음 본 앨리스 역시 그녀의 외모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한 번 릴리스를 보여준 후에는 내가 겪었던 일에 대해 설명하는게 좀 더 쉬워졌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쉽사리 믿지 못할 이야기였지만 이미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앨리스였기에, 그리고 이 '릴리스'를 직접 본 이상 믿을 수 밖에 없었다.
"하아...정말이지. 루디 씨가 저희 영지에 오고 이상한 일이 자꾸만 생기는 것 같아요."
"딱히 저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아니었으면 해결하지 못할 문제니 제가 감사를 받아도 모자랍니다만."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앨리스는 질린다는 듯한 표정과 함께 한숨을 폭폭 내쉴 뿐이었다.
"설마하니 대마법사인 트라다 쿠스만의 유산이라니. 게다가 호문쿨루스 제작이라면 제국에서도 금지한 불법의 비술이잖아요. 이걸 들켰다간...황실에서 대체 뭐라고 할지..."
상상하기도 싫은지 자신의 양 뺨을 감싸며 한숨을 내쉬는 앨리스였다.
"걱정하지 마.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 없으니까."
"정말 문제 없는 거 맞아요?"
"...아마도."
앨리스의 물음에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릴리스는 분명 감정의 표현도 풍부하고, 어리광 부리는 모습은 또래의 어린아이와 똑같았다. 정말로 '인간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모습과는 별개로 그녀의 '지나친 아름다움'은 역설적으로 '인간답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게하고 있었다.
여신이 강림한 것 같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홀리는 아름다움이었다.
'이 무슨 모순인지.'
인간과 완전히 똑같은 인격을 구현했으면서도 인간답지 않은 아름다움 때문에 의심 받는 것을 걱정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앨리스도 들어올 때 마주쳤던 경비병과 마찬가지로 릴리스의 얼굴에서 쉽사리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게다가 조금 얼굴이 붉어져 있는걸 보니 릴리스의 외모의 파괴력은 동성에게마저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앨리스의 옆구리를 가볍게 꼬집자 비명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