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건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테니 괜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호칭은 미리 바꾸는게 좋겠지.
"응? 오빠는 아직 젊은데 왜 아저씨라 불러야해?"
내 나이 서른하나. 어디 가서 젊다는 소리 듣기는 힘든 나이인데도 릴리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얘, 500살이 넘었지.
릴리스와 다른 호문쿨루스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몇 살이든 모두 비슷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릴리스에게 작은 거짓말을 추가해서 그녀를 이해시키기로 했다.
"그건 릴리스 네가 너무 예뻐서 그렇단다. 다른 남자들이 네가 날 오빠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질투해서 관심을 가지게 됐다간, 네가 호문쿨루스라는 사실을 들킬 수도 있어서 그래."
뭐, 그래도 반쯤은 진실이었다. 릴리스의 외모는 당장 며칠동안 영지의 이목을 단번에 잡아끌 정도로 아름다웠으니까.
적어도 보름 이상은 가게에 릴리스를 보러 찾아오는 놈들이 있을거라는게 내 예상이었다.
물론 아직 앳되고 몸도 미성숙한 릴리스지만 원래 모험가란 놈들이 윤리는 희미하고 본능에 충실한 놈들이었다.
당장 결계 너머에서 릴리스를 덮치려 들었다가 박살난 놈들만 봐도 그렇고.
다른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내 설명을 듣고 창피해하며 장난치지 말라고 했겠지만 릴리스는 순진한 어린아이였기에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맞아. 오빠 말고 다른 남자들은 날 기분 나쁜 눈으로 봤어."
다행스럽게도 릴리스는 내 설명에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저씨라고 부르기로 약속했다.
아이린과 릴리스는 밀크티를 모두 마신 다음 내가 미리 꺼내놓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예상대로 아이린의 옷은 릴리스에게 조금 커서 헐렁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조금 불편하더라도 내일 릴리스의 옷을 사러가기 전까지는 그걸 입기로 했다.
릴리스의 주인인 트라다 쿠스만에 대해 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피곤했는지 눈을 깜박거리며 하품을 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오늘은 일찍 잠들기로 했다.
릴리스에게 있어서는 오늘 있었던 일들이 모두 첫 경험 투성이였을테니 긴장이 풀려 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럼 릴리스는 내 방에서 잘래?"
아이린의 방에서 함께 자기에는 침대가 비좁을테고, 폭우 때문에 서늘한 한기가 올라오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내 방의 침대에서 함께 자는 것이 최선이었다.
"오빠랑 같이 자는거야?
"그래."
내 대답에 릴리스와 아이린의 반응이 대비됐다.
릴리스는 즐거워하며 내 허리에 안겨들며 뺨을 비벼댔지만 아이린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런 릴리스와 나를 보며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도 있는걸까. 아이린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녀의 동태를 살폈다.
잠시 후 결심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아이린은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말라 있던 눈가에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주인님. 저도 번개 때문에 혼자 자는게 무서운데... 같이 자면 안 될까요?"
만약 내가 계속 아이린의 눈치를 보고 있지 않았다면 깜박 넘어갈 정도로 완벽한 연기력이었다.
눈 앞의 아이린이 분명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런 아이린을 거절할 수 없는 스스로가 정말로 팔불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아이린에게도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는 수 밖에 없었다.
확실히 집 안의 온도는 평소보다 낮았다.
창 밖의 폭우와 거친 바람이 창문을 계속해서 두들기고 있었고, 문틈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칼바람은 이불을 꼭 끌어안아야 할 정도로 차가웠다.
그러니 지금 이불 속에서 두 소녀가 내 몸의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왼쪽에는 릴리스가 내 팔을 자신의 가슴팍에 꼭 끌어안은 채 달라붙어 있었고, 오른쪽에는 아이린이 내 팔을 베개 삼아 누워 있었다.
문제는 두 소녀가 이불 속에서 소리 없는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연신 이불이 들썩거리며 이불 아래에서 두 사람이 내 몸을 두고 다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린은 내게 과도하게 달라붙는 릴리스를 떨어뜨리려 했고, 릴리스는 그런 아이린에게 반발하며 오히려 과시하듯이 더욱 다가왔다.
'내 입장에서야 둘 다 똑같지만.'
이제는 내 배 위로 손까지 올리는 릴리스의 행동에 제지를 해야하나 싶었지만 방금 전 욕실에서 했던 것처럼 '위험한 느낌'도 아니었고, 단순히 배를 더듬는 것에 불과했기에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 릴리스의 도발에 아이린은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나를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래봤자 아이린이 내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있을리 만무하다.
오히려 아이린이 내게 매달리는 듯한 자세가 되었지만 릴리스는 그것이 또 질투났는지 내 배를 더듬던 손을 좀 더 올려 내 가슴팍을 더듬기 시작했다.
다행이라 해야할지 그 이상의 일은 없었다.
릴리스도 하루 종일 걸어다닌 것이 꽤나 피곤했는지 금세 곯아떨어졌고, 아이린도 평소처럼 잠들었다.
잠이 든 아이들과 달리 나는 한참동안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앞으로는 '평범하게' 살겠다며 이런 변방의 영지까지 내려왔고, 실제로 반 년 정도는 누구에게도 튀지 않고 조용히 살아왔다.
하지만 노예 상인에게 아이린을 구매한 뒤로는 내 주변을 맴도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 보고 관계를 맺게 된 사람도 있고, 원래 알고 있었지만 관계가 진전된 사람도 있었다.
나를 이용하기 위해 다가온 사람도 있었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나쁘지만은 않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내가 조용히 살고 싶었던 것은 더 이상 과거의 흔적만을 쫓지 않기 위해서였다.
명확한 대상과 목적이 있는 복수는 달콤하다.
하지만 허상과 허울뿐인 복수는 공허하고 비참할 뿐이었다. 내가 모험가를 그만둔 것은 그런 절망감을 느꼈을 때였다.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도 알기 힘들어서, 본능적으로 도피했다.
악몽도 매일같이 꿨다. 물론 악몽은 어릴때부터도 계속 꿔왔던 것이라 새삼스럽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정신적으로 몰려있던 상황에서 아이린을 만난 덕분에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불을 살짝 들춰 내 허리를 양 팔로 감고 있는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살랑거리는 자줏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잠이 얕게 들었는지 내 손길에 반응해 살짝 눈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금세 행복한 표정으로 잠꼬대를 했다.
"으응...주인님...사랑해요..."
......혹시 아직 안 자고 있는거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사랑스러운 말을 할 수가 있겠냐고. 마음 같아선 아이린을 꼬옥 끌어안아주고 싶었지만 왼편의 릴리스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방금 전까지 고민에 빠져 있던 것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나는 그런 아이린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고는 기분좋게 눈을 감았다.
창 밖으로는 여전히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오랜만에 몸이 무척 개운했다. 분명 릴리스와 아이린이 양 옆에 붙어 있어 꽤나 불편한 자세로 수면을 취했는데도 평소보다 개운한 몸에 조금 의아했다.
밤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덮고 있던 이불은 침대 옆으로 반쯤 흘러내렸고 릴리스는 침대 구석까지 밀려나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바닥에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모습에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릴리스를 침대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잠버릇이 안 좋은 꼬맹이구만.
반면 아이린은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은 채 여전히 세상모르고 기분좋게 자고 있었다.
그나마 이 쪽은 평범하긴 한데, 자꾸만 아이린의 숨결이 가슴팍에 닿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린이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몸을 떼어낸 다음 침대를 빠져나왔다.
창 밖을 보니 이미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새벽까지 쏟아지던 빗줄기가 거짓말인 것처럼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가게 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거리에는 어제 비가 왔던 것이 꿈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듯이 중간중간 물 웅덩이들이 남아있었다.
욕실에 들어가 머리를 감고 세안을 마친 다음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았다.
욕실에서 나오니 가게 안에 들어와있는 손님의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내미니 찬장의 포션들을 기웃거리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손님과 눈이 마주쳤다.
"루, 루디 씨?!"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의 시선은 내 가슴팍에 고정되어 있었고, 나는 그제서야 아직 웃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했다.
설마하니 이 시간대에 손님이 올 줄은 몰랐으니까. 나는 몸을 돌려 손에 들린 셔츠를 입었다. 못 볼 꼴을 보였구만.
특히 이런 일에 내성이 없어서 그런지 '마리안'은 얼굴이 불그스름해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방금 막 씻고 나온 참이라."
"아니에요. 오히려 약속도 없이 멋대로 찾아온 제가 죄송하죠."
그렇게 말하는 마리안의 시선은 자꾸만 내 가슴팍으로 향했다. 몇 번이나 알몸도 본 사이면서 이 정도로 뭘 그러는지 모르겠다. 아마 여자만의 감성이라는 것이겠지.
"혹시 급한 용건이 있어서 오셨습니까? 그런거라면..."
그러고보니 요즘 여러 일이 있어서 마리안을 일주일이 넘게 찾아가지 않았다. 그 전에는 사흘에 한 번은 찾아갔는데 말이다.
"아뇨. 그런건 아니에요. 그냥 루디 씨가 어떤 곳에서 지내는지 궁금해서 와본거에요."
"다른 성기사 분들은 안 오셨습니까?"
"기사님들은 저를 배려해서 가게 주변의 순찰을 돌겠다고 하셨어요."
마리안이 영지에서 지낸지도 두 달이 넘었다. 교회 내부의 일을 처리하고, 파벌 싸움이 끝나면 돌아간다고 했지만 그게 언제쯤인지는 아직도 불투명하다.
그러고보니 지난번에 앨리스가 '마리안 씨가 영지에 좀 더 머물러 주면 좋겠는데요.'라고 했었다.
이런 변경의 영지에서 성녀가 찾아오는 것은 몇십 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한 일이다.
그런데 그 뿐만 아니라 고아나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교육까지 시키자 자연스레 영지민들의 사기와 충성도도 올라가는 것이다.
예전 던전 브레이크 때 퍼졌던 불안감이 마리안의 존재로 해소됐다고 볼 수 있다. 그 덕에 마리안은 지금 영지 어디를 가도 환영받는 존재였다.
고귀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상냥하게 보듬어주고, 영지민들과도 곧잘 인사를 나눈다. 몇 년 전부터 영지에서 살았던 것처럼 지금은 영지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그럼 차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비록 지난번에 제가 대접받은 것만큼은 아니지만 괜찮은 차가 있습니다."
"어머, 그럼 감사히 마실게요."
부엌의 의자를 꺼내주자 마리안은 그 위에 다소곳이 앉았다.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베어들어 있었다.
게다가 마리안의 자애로운 미소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에 남아있던 근심마저 날아가버리는 것 같았다.
아이들도 마리안의 저 미소를 보고 그녀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겠지. 물론 나는 마리안의 미소 뿐만 아니라 다른 표정도 잘 알고 있다.
쾌락에 젖어 헐떡이는 표정과 애태울 때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표정도 말이다. 평소에는 그런 표정을 보여줄 일이 없으니 마리안의 그런 표정은 나만의 것이라 해도 좋았다.
찬장에서 찻잎을 꺼내고는 주전자에 담긴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