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260)

위인전에 기록되어 있던 친구와 가족을 끔찍히도 아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다.

방금 전에 내가 마리안을 생각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교황인 자신의 친구를 생각하고 한 행동이겠지.

마리안이 마시고 남은 찻잔을 정리하고나자 살짝 열린 방문 틈 사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두 쌍의 눈동자가 보였다.

다른 사람이 있는지 두리번거리던 두 녀석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내 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주인님. 방금 전에 찾아오신 분은..."

그렇게 말하는 아이린의 표정은 창백해져 있었다.

마리안은 걸어다니는 신성력 폭탄과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보니 마족인 아이린은 벽 너머로도 그녀의 존재를 느낀 것 같았다.

평소에는 살짝 쳐져 있던 그녀의 꼬리와 날개가 바짝 서 있었다.

"성녀님이 오셨었단다. 걱정 마렴. 널 해치러 왔던건 아니니까."

젠장. 나도 마리안이 찾아온 것이라고는 생각 못해서 깜박 잊고 있었다.

더 많은 신성력을 다루는 사제일수록 마족의 기운에 민감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린의 존재를 들키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라 할 수 있었다.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들어서... 주인님이 가르쳐 주셨던대로 마나의 흔적을 감췄어요."

아이린이 전에 내게 배웠던대로 마나의 흔적을 감춰 간신히 마리안의 감각을 속였던 모양이었다.

만약 아이린이 반쪽짜리 마족이 아니라 제대로 된 마족이었다면 얄짤 없이 걸렸겠지.

"잘했다. 고생 많았구나."

마리안이 가게에 조금만 더 머물렀다면 정말로 큰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창백한 아이린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진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토닥여주었다. 아이린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 품에 안긴 아이린의 거센 심장 박동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녀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주인님..."

나를 찾는 아이린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아이린을 달래주니 그제서야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반면 릴리스는 마리안의 존재를 느끼고도 별 감흥이 없었는지 뾰루퉁한 표정으로 아이린과 내가 붙어있는 것을 질투하고 있었다.

"오빠! 나도 안아줘! 빨리!"

칭얼거리는 릴리스를 한 손으로 밀어내며 아이린을 다시 진정시키려던 순간, 아이린이 릴리스를 향해 혀를 내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눈을 깜박였을 때 아이린은 방금 전처럼 울먹거리며 내 품에 안겨 있었다.

음. 내가 잘못 본거겠지. 우리 착하고 순진한 아이린이 그런 짓을 할리가.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 어느새 점심 때가 되어 있었다.

아이린은 아직도 신성력의 여파 때문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릴리스는 평소처럼 어리광을 부려댔기에 도저히 요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나질 않았다.

결국 아침은 밖에서 사 먹는 수 밖에 없었다. 아이린은 괜찮다고 했지만 릴리스가 배가 고프다고 어리광을 부려댔기 때문이다.

어차피 릴리스의 옷도 사야했기에 오늘은 임시 휴업을 하고 외출을 하기로 했다.

아이린과 릴리스가 외출복으로 갈아입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혹시라도 손님이 찾아왔을 때를 대비해 메모지에 '오늘은 쉽니다.'라고 적힌 것을 가게 창가에 붙여놓았다.

가게 문을 걸어잠근 다음 릴리스와 아이린을 데리고 거리를 걸었다. 어째서인지 두 사람은 나란히 내 좌우에 서서는 손을 맞잡았다.

아기자기한 둘의 손은 투박한 내 손에 비해 무척 작고, 앙증맞았다.

어린 여자아이 두 명과 양손을 잡은 채 걷는 남자.

그런 모습은 당연히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평범한 여자애가 아니라 엄청난 미소녀인 아이린과 릴리스였기에 특히나 한 번 달라붙은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들 중에는 나를 알아보고 내 옆에 서 있는 릴리스의 존재를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는 못했다.

그들은 그저 홀린 것처럼 릴리스와 아이린의 미모에 현혹되어 있었다.

고작해야 열살 전후의 아이들의 미모가 대단해봤자 얼마나 대단하겠냐 싶겠지만 아이린은 남심을 홀리는데 타고난 서큐버스였고, 릴리스는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결점이 없는 완벽한 외모였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릴리스는 거장의 작품을 보는 것처럼 경건한 마음이 들게 한다면, 아이린의 경우에는 마음이 간질간질 해지게하는 묘한 색기가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무사히 식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식당에 도착하고 나서야 우리 뒤를 쫓아온 이들의 모습을 보고 침음을 삼켰다.

말만 걸지 않았다 뿐이지 그들은 마치 홀린 것처럼 뒤를 따라온 것이었다.

척 봐도 그들의 수는 서른이 넘어 보였고, 그들 전원 남자였다.

다행히 이성은 남아있는지 그들은 얌전히 식탁에 앉아 메뉴를 주문했다. 물론 그들의 시선은 계속해서 우리 테이블에 향해 있었다.

적당히 하다가 말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하품을 했다.

메뉴판을 열심히 들여다보던 릴리스와 아이린은 각각 스테이크와 오믈렛을 시켰다.

나는 적당히 샌드위치를 주문하자 메뉴를 다시 한 번 확인한 점원은 잠시 후에 샐러드가 담긴 접시를 들고 돌아왔다.

"샐러드 먼저 나왔습니다."

먹기 좋게 잘 버무려진 샐러드가 탁자 위에 올려지자 포크로 샐러드를 찍어 먹었다. 적당히 달콤한 소스와 샐러드 특유의 아삭한 식감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집에서 가까운 아무 음식점이나 들어온 것인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다시 샐러드를 찍어 먹으려는데 샐러드를 우물거리는 릴리스의 반응이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챘다.

릴리스는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자 그제서야 정신을 되찾은 릴리스는 깜짝 놀라며 자신이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다봤다.

"우와...오...가 아니라, 아저씨. 여기 샐러드 엄청 맛있어!"

순간 오빠라고 부르려고 했던 것 같지만 주변의 시선을 감지한 릴리스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

그런데 샐러드가 그 정도인가? 물론 맛있긴 하지만 이 정도는 평범한 가게에서도 충분히 나오는 수준이었다.

"으응...모네가 해준 샐러드는 완전히 풀맛밖에 안 난단 말이야. 싱겁기만 한걸."

아무래도 그 저택의 식사는 500년 전의 것에 맞춰져 있는 모양이었다.

그 때는 샐러드에 소스를 버무린다거나 과일을 넣는다는 생각이 없었겠지.

아무래도 릴리스는 샐러드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포크로 샐러드를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무척 맛있게 먹는 모습에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아이린과 릴리스가 쟁탈하듯 샐러드를 먹는 것을 지켜봤다.

접시에 담겨 있던 샐러드는 금세 동이났고, 요리가 나오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렸기에 탁자에 가만히 앉아있는데 가죽 옷을 걸친 두 남자가 다가왔다.

두 남자의 눈동자는 기분 나쁜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추잡한 욕망이 담긴 시선은 차마 어린애들에게 건네도 될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물론 릴리스의 실제 나이는 500살이 훌쩍 넘지만, 적어도 눈 앞의 이들은 그 사실을 모르니 로리콤이라 봐도 무방했다.

자연스레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도 이야기라도 들어보자는 생각에 주먹을 쥐었던 손을 폈다.

그들은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릴리스에게 그 같잖은 낯짝을 들이밀었다.

"이 마을에서는 처음 보는데, 네 이름은 뭐니?"

그렇게 말하며 그는 은근슬쩍 릴리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그 뒤의 일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죽기 싫으면 당장 더러운 그 손 떼."

듣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경멸의 목소리. 방금 전 내게 어리광을 부리던 릴리스는 없었다.

그저 살기로 번득이는 눈으로 남자의 손목을 꽉 쥐고 있는 괴물이 있을 뿐이었다.

손목을 잡힌 남자의 옆에 있던 녀석이 나서려 했지만 릴리스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오히려 뒷걸음질을 쳤다.

그럴 수 밖에. 지금 릴리스의 눈은 사람 몇 정도는 가볍게 죽여본 이의 눈이었으니까.

기껏해야 가죽 갑옷 정도만을 받쳐입은 모험가들의 수준은 뻔하다. 견습, 혹은 초보 모험가겠지.

이 영지에 머무르는 모험가들 중 실력이 괜찮은 이들은 모두 외우고 있으니 눈 앞의 두 남자는 별 볼일 없는 수준이 분명했다.

릴리스가 손에 힘을 주자 손목을 잡힌 남자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손목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을 참고 있는 것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나는 그 시점에서 릴리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남자를 노려보고 있던 릴리스는 내 행동에 움찔했지만 자신의 몸에 닿은 이가 나라는 것을 알고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더니 잡고 있던 남자의 손목을 놔주었다.

경고는 이 정도로 충분했다. 두 남자는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쳤고, 릴리스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내게 어리광을 부렸다.

"왜 말린거야. 아저씨! 저런 놈들은 그냥..."

"앞으로 영지에서 지내려면 조용히 있는게 좋을거다. 물론 저 놈들이 한 번 더 그런 짓을 하면 그 땐 박살내도 돼."

"정말이지? 약속한거다!"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란 것을 깨달은 주변의 남자들이 침을 꿀꺽 삼키는게 보였다. 가시가 가득한 장미. 아마 릴리스에 대한 소문은 그 정도가 될 것이다.

물론 얼간이 같은 놈들이 몇 번 정도는 더 집적거릴지도 모른다. 그 때는 직접 박살 내주면 된다. 물론 릴리스가 아니라 내 손으로 말이다.

어설픈 모험가 흉내나 내는 놈팽이들을 처리하는데 진심을 보일 필요도 없었다. 팔과 다리, 한 짝씩 부러뜨려주마. 그렇게 소란이 일단락되고 나자 잠시 후 식사가 나왔다.

부엌 안쪽에 들어가 있던 점원은 방금 전의 상황을 보지 못해 갑자기 고요해진 식당의 분위기를 기이하게 여겼지만 화사한 웃음을 지은 채 요리가 담긴 접시를 세팅했다.

노릇하게 구워진 스테이크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오므라이스를 본 릴리스와 아이린은 군침을 다셨다. 방금 전의 살기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스테이크를 처음 먹는 릴리스에게 나이프로 고기 써는 법을 가르쳤다. 고기를 한 입 먹더니 그 후로는 아무 말도 않고 식사하는데 집중했다.

아이린도 마찬가지로 복스럽게 오므라이스를 맛있게 먹었다.

반면 우리를 따라 가게에 들어온 다른 이들은 썩 입맛에 맞지 않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저런, 저렇게 먹다가는 체할지도 모르는데.

누구든 작은 릴리스를 건드리면 아주 뭣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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