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구다.
그것이 재물이든, 사람이든, 무언가를 좋아한다면 필연적으로 품게 되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전의 내게는 그런 감정이 결여되어 있었다. 소중한 것을 잃고 받은 충격이 너무 컸기에, 그 후로는 절망과 슬픔이 두려워 무엇도 좋아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지난번에 플로라의 고백과 더불어 점점 스스로가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모험가로서는 실격이지만,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합격이었다.
나쁘지 않는 변화에 만족하며 갈아입은 셔츠를 잡아당겨 몸에 딱 맞췄다. 더 이상, 남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때와 다르게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지킬 힘이 있고, 반드시 지켜내고 말겠다는 열정이 있으니까. 절대 남이 내 것을 망가뜨리게 둘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다짐하며 손에 쥐고 있던 마리안의 '성수'가 담긴 포션병을 기념품으로 삼기로 하며 서랍을 열어 조심스레 밀어넣었다.
오늘은 지난주에 못 했던 다음 시련들을 이어서 할 생각이었다.
평소 집에서 벗어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내 엉덩이를 떼게 할 정도로 나는 트라다 쿠스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내 스승은 나를 '역겨운 천재놈'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 말에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얼빠진 천재가 어딨다고. 나는 그저 재능이 있을 뿐, 천재는 아니었다.
이런 나와 달리 트라다 쿠스만은 진정한 의미의 천재였다.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고작인 나와 달리 스스로 연금술이라는 학문을 창조했고, 대륙을 마도 공학의 시대로 끌어냈다.
단순히 마법만 잘 사용하는 것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대해 박식하며 자신의 힘을 이용해 대륙을 주름잡았다.
'마법사'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때문에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어째서 그 모든 명예와 재물을 팽개치고 이런 구석의 영지까지 찾아왔는지.
그리고 대체 무슨 목적으로 호문쿨루스들을 만들었는지.
나처럼 단순한 회의감 때문에 온 것이 아닌, 그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을거라 믿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트라다 쿠스만이 남겨놓은 시련을 모두 통과할 생각이었다.
아이린과 릴리스를 데리고 남쪽 숲으로 향했다. 물론 워드의 물을 한 번 갈아주고 시장에서 사온 생선을 수조 안에 던져주는 것도 있지 않았다.
녀석은 그걸 받아먹고는 우걱우걱 씹어대며 물고기를 뼈도 남기지 않고 삼켰다. 그리고는 평소처럼 몸을 물 위에 둥둥 띄운 채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아이린은 그런 워드와 놀고 싶어 보였지만, 혼자서 가게를 보겠냐는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내게 따라붙었다.
남쪽 성문에 도착하자 이미 앨리스의 명령을 들었는지 병사들은 아무 말도 않고 문을 열어주었다.
대신 남쪽 숲의 입구에는 '당분간 남쪽 숲의 출입을 금합니다.' 라는 글이 적힌 나무 팻말이 꽂혀 있었다.
물론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었기에 무시하고 숲 안으로 들어갔다.
고작 일주일 사이에 무성하게 자란 풀숲이 시야를 가렸다.
간신히 내 허리까지 오는 아이린도 나를 따라오기에 급급했기에 나는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 앞장서는 릴리스의 뒤를 따라갔다.
릴리스는 몇백년 동안이나 이 숲에서 돌아다녀서 그런 것인지 능숙하게 길을 찾았다.
중간에 고블린 무리를 한 번 마주치기도 했지만 내가 나설 차례도 없이 릴리스가 살기를 한 번 내뿜자 겁을 먹은 고블린들은 그대로 줄행랑쳤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몬스터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며, 전투적인 종족이었다.
인간과 마주치면 목숨을 끊기 위해 달려드는게 당연한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을 살기만으로 쫓아내는 것은 숙련된 모험가들에게도 힘든 일이었는데 릴리스는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
애초에 호문쿨루스가 저 정도로 살기를 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였다.
아이린은 릴리스의 처음 보는 모습에 조금 무서워 했지만, 고블린들이 사라지자마자 내게 달려와서는 칭찬해 달라고 어리광 부리는 릴리스를 보고 긴장을 풀었다.
그 후로는 별다른 몬스터나 동물과 마주치지 않았다. 지난번처럼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 공간의 결계를 넘어가자 저택의 모습이 드러났다.
몇 번을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웅장한 크기의 저택이었다.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있었는지 저택의 입구에는 모네가 서 있었다. 그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차가운 눈초리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릴리스'를 향해 노려봤다. 모네의 시선을 받은 릴리스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내 등 뒤로 숨었다.
"...오셨군요. 오늘 찾아오신 건 두 번째 시련을 치르기 위해서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맡고 있는 아이가 있는데, 함께 가도 될까요?"
모네는 아이린을 잠시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저택의 안쪽으로 안내했다.
지난번에 공터에서 샌드골렘과 전투를 벌여 통과한 '무력의 증명'과 달리 두 번째 시련인 '지혜의 증명'은 저택 안의 서고에서 이루어졌다.
전에 한 번 들어온 적이 있었기에 기억에 남아있다.
"죄송하지만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것은 한 명 뿐입니다. 시험이 끝나기 전까지 이 아이는 저희가 돌보고 있겠습니다."
모네가 손가락을 튕기자 지난번에 본 적 있는 메이드복을 입은 상냥한 누님으로 보이는 호문쿨루스들이 나타나 아이린을 데리고 갔다.
남아있던 릴리스는 모네가 한 번 째려보자 그대로 달아나려 했지만 가만히 놔둘 모네가 아니었다.
"으갹!"
달려가려다 모네에게 목덜미를 잡혀 꼴사나운 소리를 지르는 릴리스의 눈은 꼭 도축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소의 눈과 닮아 있었다.
물론 나는 남의 가정사에 참견할 정도로 오지랖이 넓지 않았기에 그런 릴리스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했다.
"지난번에는 잘도 멋대로 행동했던데. 아무래도 제 '교육'이 부족했던 모양이네요."
릴리스의 머리를 꽉 잡은 모네는 경멸마저 담긴 시선으로 릴리스를 내려다봤다.
릴리스는 방금 전 고블린들을 살기만으로 쫓았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들오들 떨어댔다.
"...후우. 이번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 하도록 하죠. 그럼, 두 번째 시련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네는 가까이 있던 책장에 다가가 아무렇게나 책을 한 권 뽑아 내게 건넸다.
"저는 주인님이 남기신 대부분의 보고서와 서적에 대해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이 책을 읽고 그 이론을 제게 설명해주시면 됩니다."
모네가 내게 준 책은 오히려 보고서에 가까웠다. 트라다 쿠스만이 자필로 적은 이론과 연구 결과에 대해 정리되어 있었다.
책의 제목에는 '마나 포션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마나 포션. 당장 내 가게에도 몇 개 취급하고 있을 정도로 흔한 포션이었다.
조금씩 제조법에 차이는 있지만 대개 푸른 빛을 띄는 포션으로 복용자의 마나를 회복시켜준다.
지난번에 아이린과 앨리스가 마법 연습을 할 때 잔뜩 만들어서 먹였던 포션이기도 하다.
많이 팔리는 상품은 아니지만 꾸준히 팔리는 상품이다.
수준 있는 마법사들은 어설픈 마나 포션에 의존할 것도 없이 스스로의 마나 회복량이 높지만, 이 영지에 머무는 모험가들 중에 그런 마법사들이 있을리가 없다.
이제 막 마법을 배웠거나 모험가로 몇 번 활동하지 않은 풋내기 마법사들에게는 꼭 필요한 포션이었다.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마나를 잔뜩 담은 마법을 한 두 번 사용하고는 마나 탈진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때 이 마나 포션을 마시면 조금이나마 마나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나 포션의 효력은 단순히 체내의 마나를 회복시키는 것 뿐만 아니었다.
몸 안의 마나를 끌어낼 줄 모르는 검사들도 소드 오러를 비슷하게나마 만들어낼 수 있는게 바로 마나 포션 덕분이었다.
물론 진짜 소드 오러에 비하면 위력은 턱없이 약하지만 검에 마나 포션을 흘리면 조금이나마 검에 마나가 부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봤자 아주 조금이라 검사들이 마나 포션을 사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마법사와 사제가 마나 포션의 주요 고객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마나 포션의 제조법이나 원리가 대충 알려져 있지만, 트라다 쿠스만은 500년 전의 사람이었다.
그는 마나 포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 기대하며 나는 책장을 넘겼다.
첫 장에는 필요한 재료에 대해 적혀 있었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부터 고개를 갸웃거렸다.
책에 적혀 있는 재료들은 내가 마나 포션을 만들 때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재료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평소 내가 마나 포션을 제작할 때 사용하는 재료는 크게 세 가지였다.
트롤의 피, 쿠민 꽃의 줄기, 마지막으로 늑대의 간이었다.
트롤의 피는 대부분의 포션 제작에 들어가기 때문에 당연한거고, 쿠민 꽃의 줄기와 늑대의 간은 그래도 비교적 구하기 쉬운 편에 속했다.
쿠민 꽃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리는 꽃일 뿐더러 공기 중의 마나를 머금고 더욱 덩치를 키우기 때문이었다.
늑대의 간 역시 몬스터를 사냥할 용기는 없는 초보 모험가들이 자주 구해오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수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 적혀 있는 재료들은 쉽게 구하기는 커녕 재료 하나하나가 지금의 마나 포션 몇 병 값을 호가하는 것들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하피의 깃털.
하피는 새와 인간의 모습이 반반씩 섞인 몬스터로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날다가 급속도로 하강하며 발톱으로 모험가들을 할퀴곤 했다.
공중전에 능한 몬스터였기에 검사들은 하피를 잡는 일에 아무 쓸모도 없었고, 마법사의 전격 마법이나 화염 마법만으로만 하피를 상대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런 마법을 사용해서 하피를 잡을 경우 하피의 날개에 꽂혀있는 깃털들이 모두 상해버리기 때문이다.
상하지 않은 하피의 깃털은 주로 귀족들의 부적으로 비싼 가격에 거래됐다.
거기다 포투나 꽃의 잎. 쿠민 꽃과 마찬가지로 공기의 마나를 흡수하며 성장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녀석은 주변의 마나를 모두 빨아들여 다른 식물의 양분마저 모두 자신의 것으로 가져온다.
그런 주제에 크기는 무척 작아서 이런 꽃이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잦다.
포투나 꽃은 그야말로 마나 덩어리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응축된 마나가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에 활용 가치가 무궁무진했다. 그러고보니 지난번 이 저택의 정원 구석에서 이 꽃을 본 것 같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다른 재료들 역시 쉽사리 구하기 힘든 재료들 뿐이었다.
와이번의 비늘, 오우거의 힘줄, 블러드 울프의 눈 등 각양각색의 재료들이 적혀 있었다.
이 재료들의 가격을 모두 합치면 어지간한 집 한 채는 사고도 남을 것 같았다. 만약 이런걸 상점 매대에 올려놨다간 이런걸 누가 사겠냐고 욕을 바가지로 먹겠지.
책장을 넘기자 예상대로 트라다 쿠스만이 이 포션의 문제에 대해 적어놓은 점이 눈에 들어왔다.
값비싼 재료들의 값 때문에 지금은 마나 포션을 복용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는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마나 포션을 복용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는 말과 함께 마나 작용이 인간의 몸에 미치는 영향들에 대해 다양하게 서술해 놓았다.
첫 번째로 마나 포션을 마신 직후 느껴지는 어지럼증.
이건 주로 마나 탈진 현상을 겪고 체내의 마나를 회복시키기 위해 포션을 마신 마법사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증상이다.
마나 탈진 상태에서 마나 포션으로 강제로 마나를 회복시키려 하기 때문에 몸이 본능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마나 포션이란 것 자체가 체내에 남아있는 적은 마나의 양을 늘리는 효과이기 때문에 이미 더 이상 사용할 수 있는 마나가 없다고 생각하는 뇌와 마나가 회복된 몸의 신경이 충돌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예전에 이것과 비슷한 내용의 논문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트라다 쿠스만은 좀 더 전문적이고 구체적으로 증상과 해결책에 대해 제시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마나 포션을 마시는 것으로 영구적인 마나량을 늘리는 것에 대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