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260)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진정시킨 것은 다름아닌 릴리스와 다른 메이드들이 다투는 모습이었다.

그녀들이 다투고 있는 이유는 누구부터 마나 재계약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였다.

순위가 뒤로 밀려나면, 그만큼 사망 확률도 올라간다. 내가 아무도 죽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걸 완전히 믿는 사람은 릴리스 뿐이었다.

이에 다른 메이드들은 '첫 번째 자식부터' 순서대로 계약을 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첫 번째 자식은 다름 아닌 릴리스, 그 다음은 모네였다. 그런 순서대로 한다면 자신들이 목숨을 잃은 확률이 가장 높은데도, 그녀들은 그렇게 할 것을 주장했다.

물론 릴리스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평소 자신의 외형과 정신 연령 때문에 그녀들을 언니라 부르기는 했지만, 가장 오래 산 것은 자신이라며 당연히 늦게 만들어진 자매부터 계약을 해야 한다고 외쳤다.

하지만 그런 릴리스의 말은 대부분의 자매들의 반대에 그대로 묻혀버렸다.

릴리스의 자매들은 한결같이 '릴리스만큼은' 안 된다고 말하며 반드시 릴리스를 첫 번째 계약 상대로 해야한다고 했다.

서로 자신이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보기 흔치 않은 광경에 나는 잠시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내게 다가온 것은 저기서 빠져 있던 모네였다.

"...릴리스가 신경쓰이십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뭔가 숨기고 있는게 계시죠?"

별 기대 없이 던진 내 질문에 모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수긍하는 그 태도에 오히려 내가 놀랐다.

"이번 시련이 끝난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죽는다면, 다른 자매가 루디 씨에게 알려드릴 겁니다. 릴리스만 첫 번째로 할 수 있다면, 저는 제일 마지막에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릴리스를 첫 번째 계약자로 정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허리까지 숙이는 모네의 부탁을 거절하기는 쉽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자매들의 의견 역시 모네와 같았기에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지만.

그 후로도 릴리스와 자매들이 한참동안 옥신각신하는 동안 나는 착실히 마법진을 뜯어고치고, 새로운 술식을 그려냈다.

처음에는 긴장해서 무거웠던 손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물 흐르듯 움직이며 새로운 마법진을 새겨나갔다.

이렇게 집중해서 마법을 준비해본 것이 얼마만인지. 어느새 땀까지 흘리며 완전히 심취한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제한 시간까지 다섯 시간 정도 남긴 때였다.

새벽이 늦었기도 하고, 어린아이에게 보여줄만한 모습은 아니었기에 나는 아이린을 저택의 다른 방으로 보내두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한참을 달래고 나서야 아이린은 방 안으로 돌아갔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조금만 실수하면 호문쿨루스 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목숨을 잃는다. 지금 내가 그린 마법진이 그랬다.

계약에 들이는 시간과 마나를 줄이는 대신, 내 정신과 계약자의 정신을 직접 이어주기 때문에 계약에 문제가 생기면 양 쪽 모두 피해를 입는다.

그래도 이 정도의 방법을 쓰지 않는 이상 스물 넷이나 되는 호문쿨루스들과의 재계약은 거의 불가능했다.

마음 같아서는 저택의 창고를 털어 트라다 쿠스만이 마셨다는 그 마나 포션이라도 만들어 마시고 싶었지만, 제조하는데 사나흘은 걸리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었다.

마지막 마법진을 그려넣은 다음 나는 호흡을 고르며 대기하고 있던 릴리스와 자매들에게 지시를 했다.

입고 있는 모든 옷을 벗은 채 각 문양이 새겨진 자리에 앉으라고 말이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을 발동시키며 그녀들의 몸에 마나가 끊어지지 않게 계속 주입해주기 위해서는 이 방법 뿐이었다.

내 명령이 떨어지자 메이드 복을 입고있던 그녀들은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녀들 모두 메이드복을 입고 있었지만 디자인은 조금씩 달랐다.

각자의 체형에 딱 맞는 스타일의 옷을 트라다 쿠스만이 손수 제작해준 것 같았다.

엉덩이나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노골적인 미니스커트 형식의 메이드복부터, 모네처럼 클래식한 메이드복 안에 가터벨트와 스타킹을 받쳐입은 경우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는 인간답지 않았던게, 그녀들은 나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스스럼 없이 옷을 벗었다.

속옷 한 장 남기지 않고 벗어 알몸이 되었음에도 그 와중에 다소곳이 옷을 개어 구석에 밀어놓는 모습은 나를 하나도 의식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평소에 이런 경험이 자주 있는지 자기들끼리 가벼운 담소를 나누며 차갑게 굳어있던 분위기를 풀어주기도 했다.

자신들의 풍만한 가슴과 음부를 훤히 내보임에도 그녀들의 얼굴에 수치심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늘 냉정한 모습을 보이던 모네마저도 알몸으로 가지런히 앉은 채 의식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유일하게 옷을 벗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다름 아닌 릴리스였다.

처음에는 다른 자매들과 마찬가지로 망설임 없이 옷을 벗어던졌던 릴리스였지만 내가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갑자기 쭈뼛거리며 더 이상 벗지 않고 있었다.

계속 내 쪽을 힐끔거리고 있기에 상황을 눈치챈 다른 자매들 중 한 명이 내게 조언을 해주었다.

"아무래도 저희 막내가 부끄러워 하는 것 같은데 뒤로 돌아서 주실래요?"

"...그러죠."

다른 감정은 잘도 넣어놨으면서 부끄러움은 넣지 않은 것인지.

알몸으로 웃으며 내게 말을 거는 그녀의 모습은 내 욕망에 불을 지폈다.

그래도 지금은 이럴 상황이 아니었기에 속으로 마법 술식을 읊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곧이어 '다 됐어요~'하는 가벼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덜 여문 자신의 가슴을 한 팔로, 그리고 음부를 한 손으로 가리고 있는 릴리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 있을 때는 알몸으로 잘도 돌아다녀놓고,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기는."

내 중얼거림에 릴리스가 울컥했는지 변명을 해댔다.

"따, 딱히 부끄러워하는게 아니거든! 언니들이랑은 자주 알몸으로 있었지만, 다른 사람이랑 있는건 처음이니까...왠지 몸이 떨려서..."

보통은 그런걸 부끄럽다고 할텐데, 어찌됐든 벗었기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지금부터 할 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바닥에 새롭게 새긴 마법진을 통해 저택 전체에 걸쳐 펼쳐진 트라다 쿠스만의 마법을 뜯어고칠 것이다. 다만 술식 전체를 뜯어고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번거로운 작업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으니, 이번에는 트라다 쿠스만으로 지정되어 있던 주인을 나로 바꾸는 작업 정도만 하기로 했다.

그 다음에는 그녀들의 몸 속에 있는 마나 계약의 흔적을 지우고 그 위에 나와의 새로운 마나 계약을 덧씌운다.

문제는 그 작업을 하는 중에도 스물네 명의 호문쿨루스 모두에게 내가 계속해서 마나를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신속하면서도 정확하게 작업을 해야하는만큼 최상의 컨디션으로 집중해서 해내야만 했다.

"그럼 모두 마법진 위에 누워주십시오."

마나가 가장 많이 뭉쳐 있는 곳인 심장. 심장을 바닥에 갖다대면 보다 쉽게 그녀들의 몸에 마나를 흘려보낼 수 있다.

쿵쾅쿵쾅 뛰어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와 마찬가지로 몇 명은 몸을 떨고 있었다.

저렇게 두려워하면서도 어떻게든 릴리스를 살리기 위해 배려하던 이들이었다.

"눈을 감고, 잠시 후 제가 작업을 시작하면 바닥의 마법진에서 흐르는 마나를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알몸의 미녀들이 일제히 바닥에 누워있는 모습은 상당히 초현실적인 광경이었지만 지금의 내게는 그런 것을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내 판단과 집중력에 따라 사람의 생사가 갈린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그녀들이 누워 있는 위치 역시 사전에 협의가 되어 있었다. 릴리스를 제외한 모두의 만장일치로 먼저 만들어진 순서대로 재계약을 하기로 했다.

덕분에 릴리스는 내 바로 앞에 누워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의 가슴과 음부를 양 손으로 가리던 자세 그대로 누워 있는 릴리스에게 작게 속삭였다.

"양 손 허리에 붙이고, 몸 쫙 펴."

움찔. 눈을 감고 있던 릴리스는 천천히 자신의 치부들을 가리던 손을 물리고는 내 지시대로 허리에 양 손을 붙였다.

그녀의 다른 자매들은 진작에 이 자세였기에 준비는 모두 끝났다.

"몸 안에 남아있던 흔적을 지우고 새롭게 새기는 작업이라 중간에 아플 수도 있습니다. 최대한 참아주세요."

내 말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녀들 모두가 이해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가장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진 내 발밑의 바닥에 손을 갖다댔다.

내 손이 바닥에 닿는 순간 찬란한 빛이 흘러나오며 물이 흘러가듯이 마법진을 따라 빛이 퍼져나갔다.

온 몸의 기운이 쫙 빠져나가는 탈력감에 잠시 정신이 혼미했지만 어떻게든 정신줄을 잡았다.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돌리자 이미 방 안은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법진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의 목숨이 걸린 세 번째 시련의 시작이었다.

몸 안의 마나가 빨려나가는 감각은 빈말로도 좋다고 하기 힘들었다. 마치 뱀파이어에게 물려 피를 빨리는 기분이었다.

계속해서 마법진에 마나를 주입하는 것은 집중력을 상당히 갉아먹었지만 나는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릴리스의 몸에 새겨진 마나 회로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호문쿨루스인만큼 심장 주변에 새겨진 마나 회로들이 그녀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보조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해야할 일은 이 회로를 움직이는 트라다 쿠스만의 마나를 지우는 것과 동시에 내 마나로 바꿔넣는 것이었다.

릴리스의 가슴 위에 손을 올리자 그녀가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은채 새끼 고양이처럼 몸을 오들오들 떨어대는 모습은 반드시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약속은 꼭 지키마.'

나는 원래 약속이란 것을 잘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아주 드물게 약속을 하는 경우는, 그것을 반드시 지킬 자신이 있을 때 뿐이다.

릴리스의 심장 안에서 요동치는 마나의 파동을 느꼈다. 이것이 트라다 쿠스만의 마나. 순도 높으면서도 정제된 마나는 내 스승을 떠올리게 했다.

덕분에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스승의 마나와 비슷한 느낌이라면 좀 더 쉽게 밀어낼 수 있으니까. 마법을 배우며 스승의 마나는 수백 번도 넘게 겪어 보았다.

트라다 쿠스만의 경지가 높은 덕분에 마나에는 불순물도 전혀 섞여 있지 않았다.

순수하게 마나만을 끌어내면 됐기에 일이 한결 수월했다.

정신을 집중해서 릴리스의 심장 주변에 흐르고 있는 마나를 모두 끌어냈다.

릴리스의 심장 부분이 푸른 색으로 잠시 빛나더니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푸른 빛이 나며 흘러나온 마나는 허공으로 떠으로며 녹아내렸다. 하지만 나는 그쪽에 시선을 줄 겨를도 없이 릴리스의 심장에 내 마나를 새로이 흘려넣었다.

내 손에서 뻗어나간 마나가 릴리스의 가슴에 닿자 새로운 문양을 새기며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상상 이상으로 많은 마나가 빠져나가는 감각에 나는 몸을 주춤거렸고 흔들리는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다른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차가운 바닥이 손에 닿자 정신이 바짝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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