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서큐버스도 아니고 둘 다 어찌나 성욕이 왕성한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을 때까지 해대다가 나중에 모네가 들고온 체력 포션을 마시고 나서야 간신히 회복할 수 있었다.
물론 모네가 처음에 내게 줬던 포션이 체력 포션이 아닌 더 약발이 센 미약이란 것을 알아차린 내가 난리를 쳐서 제대로 된 체력 포션을 들고 오게 한 사건도 있지만...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니 넘어가도록 하자.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이 저택에 올 때 입은 로브가 아닌 과거 트라다 쿠스만이 만들어 놓은 옷들 중 한 벌이었다.
모네가 재킷을 내 몸에 걸치는 순간 은은한 마나가 내 몸을 휘감으며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신체 보조 마법이 걸려있는 것 같았는데, 평소였다면 그 원리를 파악하려 들었겠지만 온 몸에 힘이 없는 지금은 재킷에 걸려있는 마법에 고마움을 느낄 뿐이었다.
모네와 데이지는 각각 내 왼쪽과 오른쪽에 서서 복도를 걸었다. 두 사람 모두 실컷 즐긴 덕분인지 얼굴에 윤기가 흘렀다. 분위기 역시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가뜩이나 아름다운 두 사람이었기에 어쩐지 이 둘이 내 소유물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아이린과 릴리스는 다른 자매들이 돌보고 있답니다."
모네의 말에 나는 그제서야 아이린과 릴리스를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기절한 뒤로는 아직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릴리스 녀석. 자기 언니들을 살려달라고 그렇게 울고불고 하더만, 그래도 일이 잘 마무리되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녀의 자매들 중 한 명이라도 재계약에 실패했다면 나는 릴리스를 볼 면목이 없었으니까.
"릴리스는 어떻습니까?"
"처음 일어났을 때는 당장이라도 루디 씨한테 달려가려 했는데, 극심한 마나 소모 때문에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니까 얌전해졌어요."
"그 녀석 성격이라면 그런 말도 안 듣고 달려왔을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오히려 릴리스가 루디 씨를 정말로 걱정하니까 그런 것이겠죠. 겉으로는 어린애 같아도 나름대로 생각이 깊은 아이랍니다."
하긴, '그' 트라다 쿠스만의 동생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재킷과 바지를 만지작거리다보니 어느새 어제 재계약을 했던 강당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지막 기억과 달리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방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마나 계약을 하며 피를 토했던 것과 마나의 여파로 조금씩 움푹 파였던 홈들 역시 깔끔하게 메꿔져 있었다. 다른 메이드들이 힘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방 한 켠에 놓인 테이블의 의자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릴리스와 아이린을 보며 나는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려는 순간, 두 소녀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곧바로 달려왔다.
"여어..."
다른 점이 있다면 릴리스는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 내 품에 안겨들었지만 아이린은 달려오다가도 가까이 오자 멈춰서서 걱정스런 눈길로 나를 올려다봤다.
"커억!"
내 가슴팍에 그대로 머리를 쳐박은 릴리스의 돌진에 나는 뼈가 부러지는 고통과 함께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드러누운 내 위에 올라탄 릴리스는 눈가에 눈물까지 머금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얼핏 오해할 수도 있는 위험한 자세였기에 릴리스를 놀려먹으려 했지만 릴리스가 울기 직전인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릴리스의 모습을 본 다른 자매들 역시 입을 다문채 지켜보고 있었다.
"히끅...나는...오빠가 쓰러졌다고 해서....흑...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렇게 울먹거리는 릴리스는 주먹을 들고는 내 가슴팍을 두들겼다. 번갈아가며 양 손의 주먹으로 내 가슴팍을 토달이는 릴리스였지만, 상상 이상으로 강한 힘에 나는 갈비뼈가 아작나는 기분이었다.
아이린이 이런 행동을 했다면 귀엽게 받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었겠지만 몬스터도 맨손으로 때려잡는 릴리스가 이런 짓을 했더니 실시간으로 죽음에 가까워지는게 느껴졌다.
다행히도 내 안색이 퍼렇게 질리는 것을 알아차린 아이린과 모네가 릴리스를 끌어낸 덕분에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아이린과 모네가 반강제로 끌어냈음에도 릴리스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본격적으로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나는 지친 몸을 일으켜서 릴리스를 품에 안았다.
훌쩍거리며 몸을 들썩거리는 릴리스의 몸을 꼬옥 안아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이래봬도 네 주인님이니까. 이런 일 정도로 다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히끅...정말...?"
릴리스는 그제서야 내 말이 들리는지 훌쩍거리면서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물론이지. 언제까지고 네 곁에 있어줄테니 걱정 안해도 돼."
"......으응."
몇 번이나 확답을 받고나서야 릴리스는 울음을 그쳤다.
내 등을 양 손으로 휘감은 채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내 가슴팍에 비벼 닦았다. 입고 있는 재킷이 축축하게 젖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런 릴리스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렇게 대충 상황이 정리가 되고나자 나는 모네를 비롯한 다른 자매들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다.
여기까지 오는길에 모네에게 들었던 말에 의하면 릴리스를 제외한 자매들은 저택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아마 호문쿨루스라는 존재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일어날 일을 우려한 것이겠지.
하지만 나는 트라다 쿠스만과 같은 방식을 고수할 생각이 없었다. 릴리스와 마찬가지로 그녀들 역시 5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저택에 갇혀 있는 신세였다.
물론 저택 주변의 숲에는 꽤나 위험한 몬스터들도 있었기에 릴리스 같은 힘을 가지지 못한 그녀들은 주의가 필요하겠지만, 저택 주변을 거닐거나 산책 정도는 할 수 있게 해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트라다 쿠스만의 창고에 남아있던 마도구들 중 그녀들의 호신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 법한 도구들에 마나를 담아 돌려주었다.
마나를 사용할 줄 모르는 그녀들이라 하더라도 고블린이나 오크 정도의 몬스터를 상대로는 충분히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마도구였다.
내 말에 그녀들은 무척 기뻐했다.제아무리 저택이 넓고 크다고 해도 진짜 숲에는 비견할 수 없는 법이었다.
별 것 아닌 일에도 기뻐하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니 영지에 데려와 구경을 시켜주고 싶었지만 처음보는 이방인을 몇십 명이나 데리고 영지를 돌아다녔다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이 분명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다음에 기회가 나면 한 명씩 마법으로 모습을 감춘 채 영지를 함께 구경시켜 주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음으로 한 행동은 창고와 서고에 쌓여있던 마도구들 중 가게에 가져가서 연구할 수 있을만한 것들을 찾았다.
일정 재료를 배합하면 자동으로 음료를 만들어주는 도구나 마도구를 만들어내는데 필요한 제작틀 역시 존재했다.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것들 위주로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뿐만 아니라 트라다 쿠스만이 정리해놓은 서적들 중에서도 호문쿨루스와 마족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서적들 위주로 정리해서 담았다.
그렇게 정리를 하고 있는 동안 메이드들은 릴리스와 아이린의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주고 저택에 남아있는 옷을 입혀보고 있었다.
디자인도 괜찮고, 무엇보다 트라다 쿠스만이 직접 만든 옷이라 그런지 체내의 마나 순환을 보조하는 효과도 붙어 있었다.
"이 정도면 얼추 됐나."
원래는 내가 들고 다니는 아공간 주머니를 채울 정도만 들고가려 했지만 모네가 창고에 있던 트라다 쿠스만이 만들어놨던 아공간 주머니를 주는 바람에 시간이 더 걸렸다.
참고로 트라다 쿠스만이 만든 아공간 주머니는 내가 쓰던 것보다 다섯 배 이상 공간이 넓었다.
정리를 대충 끝내고나자 이미 준비를 마친 아이린과 릴리스가 한껏 단장을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릴리스는 평소에 입고 있던 드레스에 더욱 화사한 프릴을 달아 돋보였고, 평범한 천으로 만들어진 원피스를 입고있던 아이린은 귀족가의 영애나 입을 법한 고급스런 실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트라다 쿠스만이 마법 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감각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준비는 다 됐니?"
"응! 빨리가자. 오빠!"
"네. 주인님."
방금 전에 펑펑 울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릴리스는 방방 뛰며 출발을 재촉했고, 아이린은 그런 릴리스와 대비되게 담담한 목소리로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보니 정말로 귀족같은 아이린의 모습에 나는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내 등을 쿡쿡 찌르는 모네의 손길에 몸을 돌렸다.
"이전의 주인님이 만약 새로운 주인님이 생기면 전해달라고 하신 물건입니다."
모네가 들고있던 박스를 열자 그곳에서 나온 것은 의외의 것이었다.
"...반지?"
그것도 보석을 가공한 반지도 아닌, 낡은 구리 반지였다. 반지의 중앙에 이상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지만, 문양이 희미해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무슨 특별한 마법 처리가 되어있는 것은 아닌가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그런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정말로 평범한 구리 반지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트라다 쿠스만이 당부했으니 특별한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반지를 검지에 끼웠다.
'약지에 꼈다간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니.'
반지를 검지에 끼자 내 손가락 크기에 맞게 조정되었다. 차가운 반지의 감촉에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럼 나중에 또 찾아올게."
""다녀오십시오. 주인님.""
마지막으로 저택을 지키는 모네와 다른 메이드들의 정중한 배웅을 받으며 나는 아이린과 릴리스를 데리고 저택을 나왔다. 결계를 지나 빠져나오니 이미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그러고보니 나흘이 넘게 가게를 비웠는데 경비병들과 거리 사람들에게는 이미 소문이 퍼졌을지도 모르겠다.
'앨리스가 또 고생중이겠네.'
앨리스는 내 정체를 알고 있으니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골머리를 썩히며 병사들을 파견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고 있겠지.
나는 내 양옆에서 걷는 릴리스와 아이린의 손을 맞잡은 채 영지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물질적으로 얻은 것들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기쁜 것은 내 마법적인 능력이 한 단계 진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자기 자랑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마법이란 영역의 정상에 도달했다고 자부했기에 더 이상 발전할 여지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정체되어 있던 내게 트라다 쿠스만의 기술과 마도구에 담겨 있는 마력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나와 생각이 겹치는 부분도 있는가하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마나를 운용해놓은 부분도 있었다.
나는 그 부분을 보고 새로운 영감을 얻는 한편 수정해야 할 부분을 고쳐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 내기도 했다.
마법사에게 있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도 없었다.
당분간은 트라다 쿠스만이 남겨놓은 유산들을 연구하며 시간을 때울 생각이었다.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에겐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기에, 내게는 목숨과도 같은 것들이었다. 물론 트라다 쿠스만의 유산뿐만 말고도 내게는 해야할 일이 남아 있었다.
아이린이 성인이 될 때까지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를 평범한 소녀로 키우는 것이었다.
어차피 수도에 있는 일정 수준 이상의 마법사나 소드 마스터 급이 아닌 이상 아이린이 반마족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사람은 없었다. 앨리스야 그녀가 워낙 특이한 경우니 제외하고.
지금처럼 변경의 영지에서 조용히 살아가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절반은 서큐버스니 아무래도 인간보다 노화가 늦고 수명 역시 훨씬 더 길겠지만 최근에는 마녀사냥 같은 일도 적으니 그녀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은 적었다.
만약 그녀가 서큐버스로서의 삶을 찾아 돌아간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꿈꾼다면 나는 그녀를 최대한 도와줄 생각이었다.
문득 어릴 때 그런 힘든 일을 겪고도 삐뚤어지지 않고 이렇게 자란 아이린이 대견했다.
손을 잡고 걸어가던 아이린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자 영문을 모르는 아이린은 부끄러워하며 한 손으로 내가 입을 맞춘 자신의 이마를 매만졌다.
바스락거리는 수풀을 헤치며 걷다보니 어느새 숲의 끝자락에 도달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