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8/260)

다행히도 저택에서 나설 때 즈음에는 마나를 꽤나 회복했기에 일부러 강력한 마나의 기운을 흘리며 걸었다.

내가 흘린 마나의 기운을 감지한 몬스터들은 쉽사리 나서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덕분에 몬스터들과 정면으로 조우하지 않고 무사히 숲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에 어느새 여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성벽 위에 서 있던 병사 중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 다른 병사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성벽 위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더니 성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하지만 갑옷을 입었기 때문인지 내게 도착했을 때 즈음에는 거친 숨을 몰아내쉬었다.

"허억...허억... 루디 씨.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나흘이 넘게 돌아오지 않으신겁니까?"

나는 미리 준비해둔 변명을 꺼냈다.

"포션의 재료로 사용되는 희귀한 동물을 발견하는 바람에 숲 깊숙히까지 들어갔다가 길을 잃었지 뭡니까. 그래서 며칠이나 숲을 헤매다가 이제 막 빠져나온 참입니다."

내 말에 병사들은 나와 아이린, 릴리스를 번갈아 훑어보고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 밖에.

우리 셋의 옷차림과 모습은 며칠 동안 숲 속에서 조난당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끔했으니까.

오히려 릴리스와 아이린은 각자의 미모를 뽐낼 수 있는 옷을 입어서 그런지 성숙미가 물씬 뿜어져 나오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영주의 딸과 친분이 있는 내게 사실대로 말하라고 호통을 칠 수도 없던 병사들은 찜찜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영지로 돌아가는 길에 들은 바에 의하면 앨리스는 나를 구조하기 위해 병사들을 남쪽 숲에 파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대신 남쪽 성문으로 나가는 길을 완전히 폐쇄하고 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만약 병사들 중 일부가 나를 찾겠다고 숲 속 깊은곳까지 들어왔다면 더 일이 복잡해졌을테니까.

'뭣보다 남쪽 숲은 당분간 출입을 금지시켜 놓는 편이 좋지.'

모네를 비롯한 다른 자매들이 숲을 돌아다니다가 모험가들과 마주치는 불상사는 피해야하니 말이다.

영지 안으로 들어온 나는 남쪽 성벽을 담당하는 분대장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그는 혹시라도 위험한 몬스터가 나오지는 않았는지 물었지만 나는 강한 몬스터는 보지 못했지만 환각을 유발하는 식물과 독초들이 꽤나 많이 자라고 있다고 해주었다.

어차피 그는 앨리스의 명령에 따르는 사람이니 앨리스에게 말해두면 더 이상 숲을 뒤지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성벽을 지나 영지 안으로 들어와 거리를 걷다보니 나를 알아본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다가와서 안부를 물어왔다.

며칠 동안이나 보이질 않던데 몸은 괜찮은건가, 어쩌다 숲에서 돌아오지 못한 것인지를 물어왔다. 나는 그런 그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해주었다.

숲에서 길을 잃어서 그렇습니다. 몸은 괜찮습니다. 신비한 약초들이 많더군요. 그런 대답들을 하던 사이에 인파를 제치며 내게 달려온 사람이 있었다.

정장 차림의 아르웬이었다. 아직 근무시간일텐데 어떻게 왔는지도 궁금했지만 내가 먼저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내게 달려든 아르웬이 나를 끌어안았다.

"루디 씨! 루디 씨가 실종됐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걱정했었는데요!"

상당히 과감한 그녀의 행동에 주변 사람들이 '오오~' 같은 감탄사를 흘리며 나와 아르웬을 은근한 눈길로 쳐다봤다.

아래를 보니 뺨을 부풀린 채 나를 노려보는 릴리스와 차가운 시선으로 아르웬을 응시하는 아이린이 보였다.

......어느 쪽도 내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은 없구만.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내 품에 안긴 아르웬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미안해요. 아르웬. 다음부턴 이런 일은 없을거에요."

"...정말 약속하는거죠?"

아르웬은 새끼 손가락을 걸면서까지 내게 약속을 받아냈다.

"물론이죠."

다행히도 아르웬은 성숙한 성인이었기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다 자신에게 향한 것을 알아차리자 내게서 떨어졌다.

그래도 내가 걱정되는 것은 여전한지 내 몸에 다친 곳이 없는지 계속 훑어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일하고 있는중 아니었어요?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요?"

"...영지를 순찰하던 도중에 루디 씨가 돌아오셨다는 말을 듣고 사무관님에게 허락을 받자마자 뛰어온거에요. 루디 씨가 무사하신 것도 확인했으니 이만 돌아갈게요."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아르웬에게 나는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나중에 아르웬 씨의 여관에 한 번 찾아가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 때 나누도록하죠."

시청에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이미 관계를 몇 번이나 가진 여자의 집에 찾아간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다.

아르웬 역시 이해했는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갔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며 칭찬을 하거나, 아르웬 정도면 참한 여자니 울리지 말고 잘 대해주라는 말도 있었다.

그들의 축하 인사들과는 반대로, 아이린과 릴리스의 눈매는 무척 사나워져 있었다.

특히 릴리스는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앙칼진 표정으로 옆에 세워져 있는 가로수들을 걷어차고 있었다.

'...나무가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데.'

다행히도 다른 사람들은 이쪽에 정신이 팔려 모르고 있었지만, 릴리스가 나무를 한 번 걷어찰 때마다 나무가 크게 흔들리며 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그 행동이 꼭 쓸데없는 짓 하지말고 얼른 돌아가자는 협박처럼 보였기에 나는 슬슬 대화를 그만두고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화가 잔뜩 난 릴리스를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더 이상 다른 길로 새지 않고 곧장 가게로 돌아왔다. 며칠이나 가게를 비웠더니 가게 문을 열자 먼지가 일어났다.

청소가 시급한 상황이었기에 아이린과 릴리스에게 걸레를 빨아 진열장을 닦도록하고 나는 가게 안의 바닥을 빗자루로 쓸었다.

평소의 가게 모습을 찾기 위한 청소가 일단락되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후에는 간단한 저녁을 차려 먹은 다음 피곤한 몸을 그대로 침대에 뉘였다. 물론 그 전에 입고있던 재킷의 아공간 주머니는 따로 꺼내 서랍에 넣어두었다.

아이린 역시 며칠이나 다른 곳에서 지내며 쌓여있던 긴장이 풀렸는지 그대로 곯아 떨어졌고, 릴리스는 저녁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릴리스의 저런 행동이 좀 더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어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딱히 기분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원래 사귀는게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이 가장 친하고 생각했던 사람이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며 질투가 나기 마련이니까.

아마 릴리스는 낮에 아르웬이 내게 안겼던 모습을 보고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이겠지.

"하여간 귀찮은 꼬맹이..."

꼬맹이라니까. 라는 뒷말은 끼이익하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묻혔다. 아이린은 이미 잠든 것을 확인했으니 아닐테고, 남은 것은 당연히 릴리스 뿐이었다.

방금 전의 태도를 봤을 때 갑자기 내 방을 찾아온 것은 조금 의외였지만 원래 아이들은 변덕이 심하니 그러려니 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릴리스는 막상 내게 말을 걸기는 망설여지는지 문 앞에 서서 머뭇거렸다.

"할 말이 있으면 여기 앉으렴."

침대 위의 내 옆자리를 두드리자 그제서야 릴리스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쉽사리 입을 열지는 않았다.

결국 먼저 입을 연 쪽은 나였다.

"그래서 왜 잠도 안자고 내 방에 찾아온거야?"

용건을 묻자 릴리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오빠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예상에서 상당히 벗어난 질문에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쿨럭.

무슨 연인 미만 친구 이상의 관계의 남녀에게서나 나올법한 대사가 릴리스의 입에서 나올 줄이야.

유감이지만 나는 로리콘이 아니었다.

비록 릴리스의 나이가 실제로는 오백살이 넘는다고 하더라도 눈 앞의 릴리스는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에 불과했다. 아이린보다도 작은 키에 빨래판처럼 평평한 가슴.

물론 남녀를 불문하고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긴 하지만 나름대로 내성이 있는 내게는 통하지 않았다.

"성가신 꼬맹이라고 생각하지."

내가 장난기 담긴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자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내 눈치를 보던 릴리스의 몸이 굳었다. 아무래도 상당히 충격을 먹은 것 같았다.

충격을 먹은 릴리스가 또 다시 울음을 터뜨리기 전에 내가 선수쳐서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조용히 있으면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애라고 생각해. 대답이 됐니?"

그제서야 자신이 놀림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릴리스가 붉어진 얼굴로 내 가슴팍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이미 저 주먹의 위력을 실감했었던 나는 황급히 허리를 숙여 릴리스의 주먹을 피했다.

설마 내가 피할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릴리스의 주먹은 그대로 허공을 갈랐고, 릴리스의 몸 역시 내 옆으로 쓰러졌다.

침대가 크게 들썩이며 흔들리자 허리를 숙였던 나 역시 바닥을 짚으며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릴리스가 내 밑에 깔린 채 누운 묘한 자세가 되어 있었다.

창문 사이로 은은한 달빛이 들어왔다.

어두운 방 안에 빛이 들어오며 릴리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이 달빛에 비쳤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릴리스의 색다른 표정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있었다. 저 표정은 마치, 정말로 짝사랑에 빠진 소녀같지 않은가.

어쩐지 지난번의 플로라의 일이 떠올랐다. 사랑을 고백하고 싶지만, 고백을 받아줬을 때의 기대감과 차인 후에 망가질 관계가 두려움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녀의 아버지와도 같은 트라다 쿠스만이 죽었을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의지할 상대를 잃은 방황과 믿을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지독한 갈망. 조금만 생각해도 그녀의 행동에 내재되어 있는 감정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침묵이 이어지며 불편한 시간이 흘러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릴리스였다.

"...오빠는. 내가 싫어?"

여기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간 그대로 울음을 터뜨리겠지. 게다가 이 상황에서 장난을 쳤다간 정말 릴리스에게 맞아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럴리가. 하지만 너는 내게 있어서 동생 같은 아이야. 딱히 널 이성으로 본 적은 없으니까."

릴리스를 이성으로 본다면 그 놈은 릴리스 또래의 남자애거나 당장 감방에 잡아넣어야할 구제불능의 로리콘이었다. 물론 나는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 평범한 성인 남성이었다.

내가 딱 잘라 대답하자 릴리스는 입술을 삐죽내밀며 작게 중얼거렸다.

"...언니들이랑은 했으면서."

넘겨들을 수 없는 말에 나도 모르게 동공이 흔들렸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릴리스의 원망어린 표정을 보니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대체 저걸 어떻게 알았지? 모네가 릴리스에게 이야기했나? 모네와 데이지가 저 어린애한테 그런걸 이야기 할 정도로 비상식인은 아닌 줄 알았는데.

당황한 내가 뇌를 가열차게 돌리며 릴리스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아는 것인지 고민했지만 결국 답은 찾을 수 없었다. 릴리스와 아이린은 분명 내가 방에 도착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방에서 머무르고 있었댔으니 우연히 복도를 지나가다 봤을 가능성도 없었다.

"...어떻게 안거야?"

"예전에 모네가 읽었던 책들 중에 그런게 있었는걸."

그러면서 릴리스는 자신이 봤던 책들의 제목을 읊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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