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33/260)

몇 번이나 해대고도 지치지 않던 모네와 데이지와 다른 걸 보면 확실히 릴리스는 일반적인 호문쿨루스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고통을 느끼고, 피로 역시 느낀다는 것이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안심되는 부분이었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릴리스를 보다 사람답다고 느낄 수 있을테니까.

'물론 저 외모는 어떻게 안 되겠지만.'

조각 인형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본 대부분의 남자들이 한참동안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눈을 반쯤 뜬 채 비틀거리던 릴리스는 그대로 내 쪽으로 쓰러졌다. 나는 그런 릴리스를 몸으로 받아내 주었고, 내 품에 안긴 릴리스가 잠꼬대를 해댔다.

"흐아암... 에이...오빠...거기가 아니라 좀 더 깊숙히...."

다만 잠꼬대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기에 나는 릴리스를 흔들어 잠을 깨우며 조심스레 아이린이 주변에 있지는 않은지 확인했다.

다행히 아이린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릴리스를 결국 차가운 물로 세안까지 시켜주고 나서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으풉......차갓...! 어...오빠?"

새로 꺼낸 수건으로 릴리스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주니 릴리스는 헤실거리면서도 내게 달라붙어왔다.

"오빠...훨씬 더 멋있어졌는걸? 혹시 새벽에 나랑 한 것 때문...읍!!"

또다시 위험한 소리를 해대는 릴리스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냥 너무 길게 자랐길래 자른 것 뿐이야. 것보다, 아이린 앞에서는 절대로 우리 관계에 대해서 말하지마. 알겠지?"

"흐응... 왜?"

내 당부에도 릴리스는 영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혹시 릴리스에게 질투라도 하는 것인지 뾰루퉁한 표정으로 틱틱대는 릴리스에게 약속하지 않으면 다음부터 섹스해주지 않겠다고 하니 그제서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에는 평소처럼 가게를 열었다.

그 날은 예상 외의 손님들이 여럿 찾아왔다.

뒤늦게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플로라는 릴리스와 아이린 몰래 찐한 키스를 나누었고, 모험가 자매인 안젤리카와 제시카도 찾아와서 내 안부를 물었다.

정중한 안젤리카의 물음에 나는 정말로 괜찮다고 응대했고, 안 그런 척하면서도 정말로 괜찮은 것인지 몇 번이나 물어보는 귀여운 제시카에게도 적당히 답해주었다.

직접 찾아오는게 아닌 편지를 보낸 사람도 있었다.

창관의 오너인 카르멘에게서 온 편지에는 상투적인 안부 인사가 담겨 있었지만 그것이 그녀 나름대로의 표현이라는 것을 아는 나는 수필로 답장을 작성해서 우체부에게 수고비와 함께 들려주었다.

아쉽게도 성녀인 마리안은 직접 찾아오지 못했지만, 그녀를 대신해서 찾아온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임시 영주 대리, 백작가의 영애이자 영지의 실세인 앨리스였다.

그녀는 늘 입는 은빛 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가게에 들어왔다. 그녀는 가게에 놓인 의자를 끌고와서는 내 앞으로 가져와서 앉았다.

"정말이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에요?"

"설명하자면 꽤나 복잡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별 일은 없으셨고요?"

앨리스에게는 내가 겪은 일에 대해 설명해줄 의향이 있었지만 릴리스와 아이린이 있는 가게에서 할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내가 직접 그녀의 저택에 찾아가서 상세한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이었다.

'적어도 릴리스는 아직까지 진실을 모르니까.'

"그렇게까지 큰 일은 없었어요. 다만 사소한 것들이 몇 개 있다면... 먼저 마리안 씨가 제게 루디 씨가 괜찮은지 알아봐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하더라고요."

'대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거에요?'라고 짜게 식은 눈으로 묻는 앨리스의 질문에 나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 점은 조만간 제가 신전에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것 말고는 수도에서 일어난 신전 내부의 암투가 얼추 정리가 되었다는 모양이에요. 당장은 아니겠지만 두세 달 후에는 성녀인 마리안도 수도로 올라가고, 그 다음에는 대륙 전체를 횡단하는 순례를 돌 예정이라고해요."

확실히 마리안은 신전에 몇 명 안되는 성녀니 이런 변경의 영지에 있는게 신전의 입장에서는 압도적인 손해였다.

머리로는 그녀가 돌아가는 것을 이해하지만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앨리스는 그것말고도 간단한 이야기들을 몇 개 더 들려주었다.

주로 수도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 이야기들 중 일부는 마리안과도 관련이 있었다.

첫 번째로, 수도에 있는 마탑들 중 몇 군데와 마리안을 암살하려는 파벌의 커넥션이 있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 마탑들은 지금 국가 차원에서 억류에 들어갔다고 한다.

물론 마탑은 국가의 제재에 반발했지만, 황실기사단과 함께 앨리스의 아버지와 같은 소드 마스터 여럿이 밀어닥치자 결국은 울며 겨자먹기로 사실을 인정하고 조사에 협조할 수 밖에 없었다고한다.

"그렇게 조사받고 있는 마탑이 황색마탑, 녹색마탑 등 총 6군데라고 했어요."

마탑은 내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 별로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때는 하루하루가 지옥같았기에 1년이 마치 100년 같았다.

내가 마법을 배운 흑색마탑과 내 스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지만 적색마탑과 청색마탑은 대륙의 사람들 대부분이 알 정도로 유명하다.

마법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원소마법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마탑이니까.

그 중에서도 불과 얼음 마법을 다루는 마법사는 모험가로 활동할 때도 가장 크게 대우받는 직업이었기에 적색과 청색마탑을 나온 마법사들의 몸값은 부르는게 값이었다.

그 두 마탑이 너무 압도적이긴 하지만, 사실 다른 마탑이라고 해도 마탑 출신의 마법사들은 어느 정도 쳐주는게 보통이었다.

혼자서 독학을 한 것이 아닌, 마탑에서 전해지는 정수를 학습하고 효율적인 마법을 배웠다는 뜻이니까.

황색마탑. 땅과 관련된 마법을 배우는 곳이다.

그곳의 마탑주의 얼굴은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대머리인 주제에 늘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다니곤했다. 참고로 내 스승은 그를 '등 굽은 고블린'같은 놈이라고 불렀다.

녹색마탑의 마탑주는 본 적이 없지만 스승에게 딱히 좋은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스승이 그나마 괜찮게 평가하는 사람은 청색마탑과 적색마탑의 마탑주 뿐이었다.

내 스승에 그나마 비견될 수 있는 사람들이 두 사람 뿐이기도 했고 말이다.

아무튼, 녹색 마탑과 황색 마탑을 비롯한 마리안의 적대 파벌에 협력한 마탑들은 죄다 풍비박산이 났다고한다. 마탑의 제자를 그만두고 모험가로 들어간 이도 많다고.

"큰일이긴 하지만, 우리와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군요."

성녀의 암살 미수 사건에 관련된 마탑. 그 사실은 제국을 진동시키고 한동안 수도의 일간지를 장식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점이 있다면, 그 사건이 일어났던 이 영지에서는 정작 그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작은 규모의 마법사 길드조차 없는 이런 영지에 있는 마법사들은 대부분 독학으로 마법을 배운 안젤리카와 같은 비슷한 케이스들이었다.

아니면 다른 마법사 모험가들에게 야매로 배웠거나.

마탑에서 제대로 마법을 배운 마법사들은 절대 이런 영지에 오지 않는다.

그들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도의 마탑에 들어갈 정도면 꽤나 엘리트라는 뜻인데, 그런 마탑의 지식을 배워온 마법사라면 당연히 콧대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

'결국 나와는 상관 없는이야기지.'

"두 번째는 제 4황녀님과 제 6황자님께서 한 달 정도 후에 저희 영지에 찾아오실 예정이에요."

나는 별 생각없이 입에 갖다댔던 찻잔을 흠칫 떨었다. 황족의 방문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데.

"딱히 황가에서 당신에 대해 알아낸 것은 아니니 걱정 안 하셔도 되요. 그저 이번 사건이 생각보다 커지는 바람에 황가에서도 민심을 잠재울만한 역할이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왕위 계승권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제4황녀와 제6황자가 마리안 성녀와 함께 순례를 돌기로 하신거죠."

바스티안 가문의 저택에서 보름에서 한 달 정도 머무르며 마리안과 안면을 트고, 함께 수도로 올라가 본격적으로 순례를 돌기 시작할 것이라는 앨리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석연찮은 부분이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으니까.

'그 부분은 나중에 델론즈 녀석한테 물어보면 되겠고.'

수도에 관한 일이라면 빠삭한 녀석이니 무리 없이 정보를 입수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4황녀에 6황자쯤되면 황족이라 보기도 어려웠다. 왕위 계승권의 순위 밖일 뿐더러, 왕권을 둔 파벌 싸움에서도 애매한 위치일 수 밖에 없다.

가진 권력도, 인맥도 애매할테니. 한쪽에 빌붙는 것도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순례에 적격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황족이 내려온 동안은 당분간 출입을 자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만에 하나라도 릴리스가 황자의 눈에 띄거나, 황족의 호위들 중 누군가가 아이린의 정체를 알아본다면...

'어쩌면 영지가 통째로 뒤집어질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으로는 바스티안 가문에 새로운 '길드'가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본래 존재했던 영지의 대표 길드가 지난번 '던전 브레이크' 때문에 박살나고, 그 자리를 비운 채 남아있는 모험가들로만 유지하고 있었지만, 황족이 영지에 내려오는만큼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길드를 구해야했다.

앨리스는 최근 수도가 소란스러워지면서 다른 영지를 찾아 떠나는 길드가 많았던 덕분에 이전 길드보다도 더 강한 길드를 영입할 수 있었다고 했다.

아무리 마리안의 일로 수도가 소란스러워졌다고는 해도, 이런 변방의 영지에 오는 길드의 수준이 높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나는 자그마치 A랭크 길드라는 말에 더욱 놀랐다.

A랭크쯤 되면 부유한 수도 옆의 후작가나 백작가의 대표 길드를 맡는게 훨씬 나을텐데, 왜 굳이 이런 영지로 오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물론 영지의 후계자인 앨리스 앞에서 차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기에 속으로만 생각했다.

앨리스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났다.

신경쓸만한 것이 있다면 앨리스의 아버지인 바스티안 가주 역시 황자와 황녀와 함께 영지로 돌아온다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 양반은 조금 껄끄럽다. 황실 기사단에 근무했던 인간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고지식하고 깐깐한 성격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앨리스와의 관계 역시 들켰다가는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랐기에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자신의 외동딸인 앨리스를 치료해줬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는 그는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 정체를 안다면 경계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나는 깍지를 낀 손을 풀었다.

이야기를 마친 앨리스는 타고온 마차로 돌아갔다. 앨리스가 가게를 나가자 내 방에 숨어있던 릴리스와 아이린이 달려나왔다.

두 소녀는 내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보다가 적당히 풀어서 설명해주자 대충 알아들었다.

하지만 한 달 정도 외출에 주의 한다면 된다는 것을 이해하자 평소처럼 워드와 함께 놀기 시작했다.

워드 녀석은 내 생각보다 훨씬 머리가 좋은 놈이어서 꽤나 신기한 재롱도 여럿 부리곤 했다.

릴리스가 생선을 던져주면 몸을 휙 던져서 생선을 낚아채서 잡아먹는 모습에 아이린은 작게 입을 벌리며 신기하다는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워드는 그런 아이린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아이린쪽으로 엉금엉금 기어와서는 꼬리로 욕조를 탁탁치며 올려다봤다.

나는 아이린에게 달콤한 과일을 반으로 자른 것을 건네주었고, 아이린이 그걸 내밀자 워드는 입을 쩍 벌리고는 과일을 우적우적 씹어댔다.

맛있는 것을 먹어서 기쁜지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애교를 피우는 워드의 매력에 빠진 아이린과 릴리스는 한동안 욕조 앞을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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