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260)

그렇게 평화롭게 시간은 흘러갔고, 어느새 황족과 앨리스의 아버지가 돌아오기로 한 날이되었다.

한 달 동안 나는 릴리스와 아이린을 데리고 영지의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보름에 한 번 서는 야시장과 공원, 영지의 한켠에 숨겨져 있는 아름다운 정원까지.

별 볼일 없는 영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유명한 곳은 있었기에 그런 곳을 위주로 돌아다녔다.

릴리스도, 아이린도 그런 장소를 가보는 것은 처음인지 무척 즐거워했다.

특히 야시장에서 팔던 '아이스크림'을 가장 좋아했다.

나중에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법을 서적으로 배워서 직접 집에서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리고 약속의 날이 오자, 나는 릴리스를 남쪽 숲의 저택에 돌려보내기로 했다.

황자의 눈에 띄는게 아니더라도, 다른 기사들의 눈에 띄면 일이 귀찮아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릴리스는 나와 떨어지기 싫다며 난리를 피웠지만 오랜 시간이 걸릴 것도 아니고 한 달 정도만 저택에서 지낸다면 된다는 것과, 오랜만에 모네를 비롯한 언니들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냐고하니 릴리스는 그제서야 조금 누그러졌다.

물론 여전히 투덜거리는 릴리스에게 대신 나중에 돌아왔을 때 잔뜩 섹스하게 해준다고 하니 그제서야 내 말을 들어주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발랑까진건지.'

처음 섹스를 한 날 이후로 릴리스는 하루가 멀다하고 내게 섹스를 하자고 들러붙었다. 섹스 뿐만 아니라 키스를 요구하는 것은 일상다반사였다.

그렇게 나는 릴리스와 이틀에 한 번 꼴로 몸을 겹쳤고, 장소는 주로 거리의 뒷골목이나 아이린을 심부름 보낸 가게에서였다.

화장실에 갔다온다면서 아이린을 벤치에 앉아 기다리게 하고, 릴리스와 섹스를 하고 돌아갔을 때의 죄책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화장실에 갔다오고 무척 즐거워 보이는 릴리스와 죽을 상인 내 얼굴이 대비되어서 그런지 아이린이 몇 번인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본 적도 있었다.

물론 릴리스가 단순히 육욕에 빠진 것이라면 나도 그녀를 제어하려 했지만, 릴리스가 정말로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매일같이 붙어있던 전과는 조금 거리가 있을 수 밖에 없었기에 나는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저택에 찾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약속까지 하고 나서야 나는 릴리스를 저택에 돌려보낼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린까지 저택에 맡기고 싶었지만, 아이린의 목걸이에 새겨진 노예 각인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주인에게서 일정 범위 이상 벗어나면 노예 각인이 발동되는 방식으로, 주로 탈주 노예들을 잡아내기 위한 술식이었다.

남쪽 숲 깊은 곳에 위치한 저택과의 거리를 가늠해봤을 때 그녀를 저택에 맡기기는 힘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아이린의 목걸이를 뜯어버리고 싶었지만 저걸 떼버리는 순간 아이린과 나는 주종의 관계가 아니게 된다.

이때까지의 관계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관계가 되는 것이다.

저걸 떼어내고도 아이린이 내 곁에 남아있을지, 혹여 도망이라도 가는 것은 아닐지, 온갖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내 비틀린 통제욕, 그리고 소유욕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차마 그걸 놓아주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자조적으로 웃었지만 결국 나는 차마 아이린의 목줄을 풀어주지 못했다. 대신 아이린의 몸에 걸어둔 마법을 더욱 강화시켰다.

목에 찬 족쇄를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녀의 어깻죽지에서 삐져나온 마족의 날개를 감추는 술식을 몇 겹으로 겹쳐 강화시켰다.

한 달 동안 여러가지가 바뀌었다.

가장 먼저 길거리의 순찰을 도는 모험가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가죽 갑옷에는 회색빛의 늑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번에 새로 영지에 정착한 A랭크 길드, '나이트 울프(Night Wolf)'의 표식이었다. 그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진상을 부리거나, 수상한 이들은 없는지 살피고 있었다.

본래 거리의 상인들은 달에 일정 금액의 '보호비'를 영지의 길드에 납부하고, 길드에서는 상인들의 편의를 적당히 봐주기 위해 길드원들을 순찰시키거나, 드물게 난장을 피우는 놈들을 손보기도 했다.

시청 옆쪽에 남아있던 이전 길드의 건물을 증축하고 길드원 모집 공고를 내서 영지에 있던 모험가들중 몇 명을 길드원으로 새로 받아들였다.

A랭크 길드답게 길드원 하나하나의 수준이 높고,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제시카와 안젤리카가 찾아왔을 때, 나이트 울프에 한 번 신청해보는 것이 어떻냐고 했지만 그녀들은 어딘가에 얽매이는 것은 조금 그렇다며 거절했다.

황녀와 황자의 순례 소식은 어느새 영지에도 퍼지게 되었고, 소란스러워진 영지를 통제하고 진정시키는 것들 역시 그들의 몫이었다.

신기한 점이 있다면 나이트 울프의 길드원들은 절반 이상이 수인족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고양이 귀나 개의 귀를 달고 있는 모험가들이 꽤나 여럿 보였다.

처음 수인족들이 영지에 들어왔을 때는 주민들도 당황했지만, 의외로 평범한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 이후로는 평범하게 모험가로 대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수인의 피가 짙은 이들은 거의 없었기에 귀나 꼬리만 가리면 인간이라고 해도 충분히 믿을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본래 짐승의 외형에 가까운 수인일수록 더욱 강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지능이 그에 반비례하며 제대로 된 소통조차 힘들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보통 인간들의 국가에서 모험가로 활동하는 수인족들은 대부분 하프(half), 혹은 쿼터(quater)였다.

수도에 있을 때는 저런 수인족들만을 노리는 악질도 꽤나 있었다.

수인족에게는 노예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강제로 납치하거나 죄목을 뒤집어 씌워서 자신들의 노리개로 삼는 귀족들도 드물지 않았다.

때문에 수인족들 중 일부는 인간과 귀족들을 무척 혐오하기도 했다.

게다가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은근히 수인족을 차별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술집에서 수인과 인간의 드잡이질도 그리 드물지 않았다.

물론 바스티안 영지에 내려온 나이트 울프의 길드원들은 수준이 높아서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 모험가들이 나이트 울프 길드의 수인족들을 피해다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조금은 긴장된 분위기에서, 드디어 황자와 황녀의 행차 소식이 들려왔다.

앨리스의 지시로 그날은 모든 영지민들이 일을 멈추고 북쪽 성문앞에 모였다. 물론 나 역시 아이린을 데리고 다른 사람들 틈에 껴서는 성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앨리스는 병사들과 함께 성문 위에 서 있다가, 마차가 달려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성문??열게했다.

그 다음에는 황자와 황녀를 마중하기 위해 성벽 아래로 내려왔다.

지난번에 내 가게에 찾아왔던 가문의 집사와 안면이 있는 고든을 양 옆에 대동하고 있던 앨리스는 열린 성문 너머로 달려오는 속도를 늦추고 있는 마차를 기다렸다.

황가의 인장이 찍혀있는 금빛의 사두마차. 마차의 옆에 박혀있는 포효하는 황금빛 사자의 각인이 인상깊었다.

수도에서는 질리도록 봤던 것일텐데, 저 각인을 이곳에서 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거칠게 달려오던 마차가 속도를 늦추며 성문에 다가왔고, 앨리스의 바로 앞쪽에서 멈췄다. 마차 주변을 호위하듯이 말을 타고 달려오던 기사들 역시 말을 진정시켜 멈췄다.

황금 사자가 그려진 갑옷을 보니 황실기사단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 수가 예상보다 적었다. 눈대중으로 보니 기사들의 숫자가 스물밖에 되지 않았다.

눈 앞의 기사들의 숫자가 지금 마차에 타고 있는 '4황녀와 6황자'의 입지였다. 자그마치 왕족 두 명의 호위라고 보기에는 턱없이 적은 숫자였다.

'물론 저만한 병력으로도 충분하지만.'

황실기사단은 한 명 한 명이 소드 마스터에 근접한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파벌과 관계없이 오로지 황족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충성스런 집단이었기에 배신을 걱정할 일도 없었다.

수도의 어린 남자애들은 늘 왕족을 호위하는 황실기사단이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말에서 내린 기사들은 절도 있게 정렬해서 섰다. 그리고 그들 중 기사단장으로 보이는 이가 철컥,철컥하고 소리가 울리는 갑옷을 입은 채로 마차의 문을 두드렸다.

"도착했습니다. 황녀님. 황자님."

이윽고 마차 안에서는 작은 대답이 돌아왔다. 잠시 후, 드르륵하고 마차의 문이 열리며 걸어나오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탁한 검은빛을 띠는 내 머리카락과는 달리, 황자와 황녀의 머리카락은 흑요석처럼 윤기가 흘렀다. 마차에서 먼저 걸어나온 쪽은 작은 체구의 소년이었다.

아직 열 살이나 되었나 싶을 정도로 어린 소년의 모습에 나는 조금 놀랐다. 릴리스보다도 키가 작아 보이는데, 저 작은 소년이 순례의 일원으로 선발되다니.

저 작은 몸으로 정복을 차려입고 있으니 오히려 귀엽게 느껴졌다. 얼굴도 무척 곱상하게 생겨서는 나중에 여자 여럿 울릴 것 같았다.

그는 마차에서 내려오며 나를 비롯한 다른 영지민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귀여운 소년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자 영지의 처녀들은 끔벅 죽었다.

우레와 같은 처녀들의 환영을 받으며 내려온 황자는 기사단장의 곁에 섰다.

조만간 델론즈에게 4황녀와 6황자에 대해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황자의 뒤를 따라 내리는 황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황녀는 황자와 달리 화사하게 웃어보이지도, 손을 흔들지도 않았는데, 아무것도 응시하지 않는 공허한 눈동자는 쉽게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그런 차가운 반응에도 그녀의 미모는 숨길 수 없었다. 비단같이 흘러내리는 흑요석빛 머리카락, 오똑한 코와 앵두같은 입술,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새하얀 피부까지.

이미 다른 남자들은 황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 같았다.

'아무리 황족이라 관리를 잘 받았다고는 해도, 저 정도면 타고난건가.'

아무리 마법을 쓰고, 몸에 좋은 약초를 먹어가며 외모를 보정해보려고 해도 타고난 외모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아마 황자와 황녀는 특별한 관리를 받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잘생기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렇게 황녀 역시 남성 주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려왔다.

황녀는 마차에서 내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황자와 황녀가 곁에 서자 기사단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한쪽 발을 두 번 구르고 주먹을 쥔 손으로 가슴팍을 두 번 두드렸다.

"제국을! 위하여!"

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 주민들은 곧바로 기사의 행동을 따라하며 소리쳤다.

"위대한 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식이 일단락되자 황자와 황녀는 다시 마차에 올라탔고,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앨리스의 저택으로 향했다.

나는 말 네 마리가 달리며 이끄는 마차를 뒤에서 멍하니 지켜보다가 아이린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황족이 영지에 방문한 날은 늘 그렇듯이 거리는 축제 분위기였다. 아주 가끔씩 황족들이 대륙의 순례를 돌긴 하지만 그것은 일부 핵심 영지들 뿐이다.

바스티안 가문 같은 변방의 영지에 사는 주민들이 살면서 또 황족을 볼 일이 있을까?

거리에는 술을 죽어라 마셔대는 모험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오늘 본 황자와 황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그들의 외모에 관한 이야기였다.

물론 황족을 상대로 위험한 농담을 취는 사람은 없었지만, 술에 취하자 황녀에 대한 자신의 음심을 슬그머니 털어놓는 놈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린을 데리고 그런 축제 분위기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온갖 간식과 음식들을 한 두개씩 맛보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영지에 이런 활기가 흘러넘치겠지.

물론 이렇게 분위기가 달아오른 것은 오늘 뿐일 것이다. 내일부터는 길드와 바스티안 가문 차원에서 제어에 들어갈테니까.

왕족이 영지에 머무르는 동안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난다면 오롯이 그들의 책임으로 돌아가니 그들 입장에서는 평소보다 더욱 날카롭게 굴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침부터 계속 서서 기다려서 그런지 피곤해보이는 아이린이 먼저 자도록 방에 들여보낸 나는 워드에게 고기 한 조각을 던져주었다.

워드 녀석은 그것을 낼름 받아먹었다. 고기를 우걱우걱 씹어대는 워드를 내버려 두고 조용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여전히 소란스러운 거리를 지나쳐 뒷골목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났다. 뒷골목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홍등가의 등불들이 나를 반겼다.

다만 소란스러운 거리와는 정반대로 홍등가는 평소보다 더욱 절제된 모습이었다.

늘 짙은 향기의 분을 바르고 헐벗은 옷을 입은 채로 남자들을 유혹하던 창부들은 보이지 않았고, 홍등가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괜찮은 창관을 추천하는 바람잡이도 없었다.

심지어 술에 취한채로 돌아다니는 사람마저 없는걸 보니 이미 길드에서 정리를 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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