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6/260)

"응응! 근데 저 남자, 엄청 강해보여."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군."

그제서야 할터라고 불린 남자가 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와 잠시 눈이 마주쳤지만 그 뿐이었다.

내게서 특별한 점을 찾지못한 그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정말이지! 할터는 이런 것도 몰라?"

"미안하지만 디아나. 난 너처럼 수인족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라고. 척 보고 상대의 강함을 가늠하는 능력은 없다니까."

할터라는 남자의 말대로 수인족은 본능적으로 눈 앞의 강자를 알아본다고 한다.

짐승같은 제6감. 숙련된 베테랑 모험가들도 그런 감이 발달하게 되는데, 수인족들의 감각은 그보다 좀 더 위였다.

힘을 중시하는 수인족답게, 강자를 보면 한 번 겨뤄보고 싶은 마음이 끓어오르는 것이다.

눈을 반짝이며 금방이라도 덤벼들려하는 '디아나'는 할터의 손에 의해 제지되었다.

"디아나. 너희 종족이 전투광이라는건 알지만, 길드 마스터가 당분간은 사고치지 말라고 했잖아."

할터에게 목덜미를 붙잡힌 디아나는 열심히 버둥거렸지만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할터는 작게 웃으며 고개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딱히 악의를 가지고 이러는 것은 아니니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전히 디아나의 시선은 내 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조만간 또 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괜찮다고, 신경쓰지 말라고 대답하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오랜만에 수인족과 말을 겪어봤기 때문일까. 예전에 모험가로 활동할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좋은 기억도 있었고, 좋지 않은 기억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들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만이 남아있었다.

강자를 숭배하고, 힘의 논리에 충실하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약자를 괴롭히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대련을 신청하는 경우가 훨씬 잦았다.

적어도 같은 파티를 구성하는 일원으로서는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명예를 중요히 여기는 그들은 다른 모험가들처럼 뒤통수를 칠 걱정도 안 해도 되고,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늘 용맹하게 전투를 벌이는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야수와 같았다.

그때 함께했던 녀석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아마 지금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몬스터들을 소탕하고, 강자를 찾아다니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한창 몬스터들에 대한 증오심이 절정에 도달했을때는, 그들에게 작게나마 도움을 받기도 했다.

싸움에서 희열을 느끼는 수인족들은 내게 왜 그렇게 무표정하게 몬스터들을 잡느냐고 했고, 나는 그들에게 어째서 그렇게 즐겁게 몬스터들과 싸울 수 있냐고 물었다.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그들과 나였지만, 그들은 내게 자신들만의 전사의 긍지와 전투의 희열에 대해 알려주었다.

몬스터에 대한 증오심이 사그라 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조언 덕분에 나는 무표정하게 몬스터들을 학살하던 행위에 조금이나마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좀 더 높은 경지의 강함을 추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 역시 그들이었다.

사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종족들은 다들 내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던 것 같다.

수인족도, 엘프도, 드워프도 각각의 개성을 가진 좋은 녀석들이었다. 결국에는 인간이란 종족이 문제였다. 어디서든 그랬다.

다른 모험가들에게 몬스터를 몰아와서는 파티를 몰살시키는 악질적인 놈들이나, 같은 파티의 모험가를 배신하고 재물을 훔쳐 달아나는 도둑놈들도 있었다.

그런 녀석들 때문에 세간에 모험가에 대한 평가가 바닥인 것이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조심스레 아이린의 방문을 열어 아이린이 곤히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내 방으로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었다.

창 밖으로는 깜깜해진 하늘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들이 보였다.

눈을 감고 침대에 눕자 나는 육체의 피곤 때문인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그 날은 과거 모험가로 활동했을 때의 동료들에 대한 꿈을 꾸었다.

x x x

그 시각, 바스티안 가문의 저택에서는 성대한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본래 검소한 생활을 하는 바스티안 가주였지만, 자그마치 황자와 황녀를 상대로도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

평소에는 준비시키지 않는 진귀한 식재료들과 고급 술들로 음식을 만들었다.

이윽고 만찬장에 앉은 바스티안 가주와 앨리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황자와 황녀가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황자와 황녀의 뒤에 서서 대기를 하고 있는 바스티안 가문의 시녀들이 긴장하고 있는 것이 역력해 보였다. 평범한 귀족과는 급이 다른 황족.

그런 사람을 상대로 실수라도 했다간 자신 뿐만 아니라 바스티안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과 다름 없었기에 시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고 있었다.

"...잘 먹었어요. 저는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황녀는 입맛이 없는지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습니까. 준비된 방으로 가시는 길은 저희 메이드가 알려드릴 겁니다. 늘 황녀님의 방 앞에 대기하고 있을터이니 필요하시면 바로 부르시면 됩니다."

바스티안 가주가 손을 들어올리자 황녀의 뒤에 서 있던 메이드가 허리를 숙이며 앞장서서 식당을 빠져나갔다.

황녀는 그런 시녀의 뒤를 따라 나갔고, 황자만이 식탁에 차려진 만찬을 만끽하며 쉬지 않고 접시에 손을 뻗었다.

"황녀님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셨나 보군요. 아쉽습니다."

"걱정말아요. 바스티안 경. 누나는 원래 저러니까."

앨리스는 조신하게 앉아서 나이프로 고기를 썰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이 직접 황자와 이야기 할 일은 없으니 얌전히 아버지 곁에 앉아 기품 있는 영애의 역할을 연기하면 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앨리스는 눈 앞의 6황자에 대해 조금 경계하고 있는 중이었다.

황자와 황녀가 타고온 마차에 들어있던 짐들을 옮기는 것은 바스티안 가문의 식솔들의 일이었기에 앨리스가 그것을 지휘했는데, 단촐한 황녀의 짐과는 달리 황자의 짐은 그 양이 상당했다.

슬쩍 그 안을 들여다보니 대부분이 제국의 역사서와 정치와 관련된 서적들이었다. 지역별로 분류되어 있는 특징과 주의할 점들이 기록되어 있는 노트도 있었다.

고작해야 열 살의 어린아이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방대한 양의 책이었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얼굴마담에 불과한 순례에는 필요없는 것들이기도 했다.

어쩌면 6황자가 순례에 참여한 것은 다른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앨리스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집중해서 아버지와 황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 내가 제안한 것은 생각해 보았나요. 바스티안 경?"

"하하. 변방의 기사 나부랭이가 어찌 주군을 고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제국이라는 이름에 제 명예와 충성을 바칠 뿐입니다."

황자와 아버지의 문답에 앨리스는 곧바로 그 의미를 유추해낼 수 있었다.

'파벌 싸움.'

이미 수도에서 영지로 내려오는 길에 6황자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파벌로 들어오라고 제안했던 것이다.

앨리스는 아무리 왕위 계승 쟁탈전에서 소외된 6황자라고는 해도 황족인데 이렇게 거절해도 되나 싶었지만 의외로 황자의 반응은 덤덤했다.

"그래요? 조금 아쉽기는 해도 어쩔 수 없죠. 나라고 해도 지금의 내 편이 되고 싶을 생각은 들지 않을테니까."

오히려 자조하듯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황자의 태도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했다.

앨리스는 경계를 한 단계 더 올렸다. 뭔가 이상했다.

조금 영특한 아이라고 생각했던 소년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파벌로 들어올 것을 제시하고, 거절당했어도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끌어낸다.

그것도 수십년 동안 황궁에서 근무하며 이런 정치적인 일에 노련한 자신의 아버지를 상대로 말이다.

어쩌면 눈 앞의 소년이 순례에 자원한 것은 이런식으로 귀족들을 회유하고 설득해서 자신만의 파벌을 일궈내려는 속셈인 것일까.

'어차피 6황자가 황궁에 남아있어봤자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 이런 선택을...?'

황궁 안의 인물들은 이미 자신의 형들에게 포섭되어 있으니 제국의 외곽에 위치한 다른 귀족들을 긁어모을 생각인 것일 수도 있었다.

"내 제안은 언제든 유효하니까,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말해줘요. 바스티안 경처럼 제국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귀족도 드무니까, 기왕이면 내 편이 되어줬으면 하거든요."

황자의 말에도 바스티안 가주는 작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황자는 방금 전의 노련한 모습을 순식간에 지우고는 평범한 어린애처럼 접시에 담긴 음식들을 우물거리며 먹어댔다.

그렇게 만찬이 끝나고 난 뒤, 황자는 자신에게 배속된 시녀에게 내 방으로 가는 것 대신 누나의 방에 먼저 들르자고 했고, 시녀는 황자의 명령대로 황녀의 방으로 안내했다.

황녀의 방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는 갑작스런 황자의 방문에 당황했지만 황녀를 만나고 싶다는 그의 명령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두어 번 노크를 하고는 황자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렸다.

잠깐 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방 안에서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오라고 해요."

황녀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힘이 없었지만 황자는 거리낌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 때문인지 문은 '쾅' 소리를 내며 그대로 닫혔다.

방에 들어온 황자는 주변을 둘러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우와. 바스티안 가문은 검소하게 지낸다고 들었는데 꼭 그런것만도 아닌데?"

황녀의 방에는 꽤나 값이 나갈 것 같은 도자기와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우리 방만 이런거야. 오면서 본 다른 방들은 최소한의 가구 말고는 없어."

황녀가 차갑게 대꾸하자 그는 입맛을 다시며 탁자 옆에 놓여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누나. 이번 순례에 관심이 없는건 알고있지만 너무 냉담하게 굴면 나도 곤란해져."

그의 목적은 이번 순례에서 자신만의 파벌을 만들고 인재를 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움직이는 황녀가 이래서야 귀족들에게 썩 좋은 반응을 얻어내기 힘들었다.

그런 황자를 황녀는 날카롭게 노려봤다.

"넌 목적이 있어서 순례에 지원했겠지만 나는 강제로 쫓겨난거야. 내가 그들에게 살갑게 굴어줘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

황자도 4황녀인 그녀가 어째서 자신과 함께 순례에 참여하게 됐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를 시기한 다른 황녀들이 '시녀' 출신의 자식인 공주와 함께 있지 못하겠다며 계속해서 괴롭혔고, 그녀의 어머니가 평민 출신인 탓에 마땅한 파벌도 없었다.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존재가 아무도 없었기에 그녀는 다른 황녀들의 압박을 견뎌내지 못하고 도망치듯이 순례에 자원하게 된 것이었다.

황자는 황녀가 처한 상황이 안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더 넓은 인맥과 파벌에 들어올 인재들이었으니까.

유감스럽게도 4황녀에게는 그가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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