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260)

황자는 더 이상 그녀에게서 긍정적인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왔다.

방을 나오는 황자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본 시녀들은 잔뜩 긴장했지만 황자는 금세 표정을 풀고는 또래의 어린아이들처럼 가벼운 어리광을 부렸다.

"헤헤. 누나가 요즘 기분이 별로 안 좋나 봐요. 그래도 누나들이 조금만 챙겨주세요."

잘생겼다기 보다는 예쁜, 그것도 곱상하게 생긴 미소년이 그런 말을 하자 시녀들도 긴장을 조금 풀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황자님."

한편 문 너머로 황자가 떠나가는 소리를 들은 황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방금 전에 황자에게 한 짓은 투정에 불과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아이에 대한 질투.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뒤집기 위해 노력하는 황자와 다르게 자신은 이렇게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절망적인 이 상황을 조금도 바꿔나갈 수 없다는 사실에 다시금 절망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황녀가 아니라 단순한 한 명의 소녀에 불과했다.

불운한 소녀 '에디스'는 눈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에디스는 방 밖의 시녀에게 들리지 않도록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창 밖의 달은 그녀를 측은히 여기는지 은은한 달빛으로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가게 밖이 소란스럽길래 대충 옷을 걸쳐입고 나가보니 나이트 울프의 길드원들이 가게를 막 여는 점주들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가게에서 나오는 것을 본 길드원들 중 한 명이 다가와서는 다른 점주들과 마찬가지로 주의를 주었다.

황자와 황녀가 오늘부터 영지를 순서대로 돌며 순찰을 다닐 것이기에 혹시라도 그들이 가게에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절대 무례를 범하지 말고, 최대한 비위를 거스르지 말라는 소리였다.

다행히 이 거리에서 내 평판은 썩 좋은 편이었기에 그들도 별로 신경쓰지 않고 간단한 주의만을 주고 돌아갔다.

하지만 빵이나 간식거리를 파는 가게들의 경우 만에 하나 황족이 상한 것을 먹고 배탈이 나면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니 조심하라고 재차 경고했다.

부산스러운 다른 가게들과는 달리, 나는 평소처럼 단출한 아침식사를 차리고 가게 앞마당을 쓸어 청소했다. 냄비에 끓인 스프의 고소한 향이 가득 퍼질 때쯤에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황자와 황녀가 머무르는 한달 동안은 조심해서 행동해야한다고 한 내 말 때문인지 방에서 나오지 않고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손짓을 해서 부르자 아이린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자면서 몸을 뒤척였는지 아이린의 잠옷에는 주름이 꽤나 접혀 있었다.

"잠은 잘 잤니?"

"네. 주인님."

내 옆에 찰싹 달라붙는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냄비에 담긴 스프가 모두 끓자 화덕의 불을 꺼뜨렸다.

그렇게 스프와 함께 남아있던 빵으로 아침을 때운 다음에는 진열장을 깨끗하게 닦았다.

비어있던 자리를 미리 만들어뒀던 포션들로 채워넣고, 아이린에게는 가게 바닥을 걸레로 닦게했다.

평소 같았으면 아침 일찍 포션을 사러 오는 모험가들도 어젯밤에 그렇게 술을 마셔대서 그런지 오늘은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손님 한 명 없이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 때가 되어 아이린을 데리고 외식이나 하고 올까, 생각하는 참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멈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한 곳에 향해 있었는데, 나는 그 이유를 잠시 후에 알 수 있었다. 이 거리는 앨리스의 저택과 꽤 거리가 있는만큼 좀 더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황녀와 황자가 벌써 이 거리에 도착한 것이었다.

거리의 끝에 위치한 옷가게부터, 음식점들도 천천히 둘러보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황자와 황녀가 이미 거리에 온 것을 보고도 가게를 비우는 짓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자리를 지켜야했다.

두 사람은 순서대로 가게를 둘러보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황자는 음식점이나 잡화점을 직접 안까지 들어가서 둘러보고 나온다면 황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게 앞에 서서 황자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미소를 지으며 즐겁게 점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황자와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내 가게 앞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두 처녀가 속삭이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황자님 무척 착해보이지? 우리 같은 평민들한테도 거리낌 없이 말도 걸어주시고."

"정말. 황자님에 비하면 황녀님은..."

두 사람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아무것도 관심 없다는 듯이 무표정한 황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저 탁한 동공을 가끔씩 깜박이기만 할 뿐이었다.

무슨 데드맨도 아니고, 네크로맨서가 부리는 시체도 저것보다는 움직임이 클 것이다.

마치 석상처럼 굳어 있던 황녀는 황자가 나오고 나서야 그를 따라 다음 가게로 이동했고, 또 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영지의 주민들의 평가가 어떻게 갈렸는지는 두고 볼 것도 없었다.

평민인 자신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는 황자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신경쓰지 않는 황녀.

몇몇 사람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놓고 황녀의 뒷담화를 하기도 했다.

황자가 한 가게도 빼놓지 않고 둘러보는 바람에 시간은 조금 걸렸지만 결국 내 차례가 왔다.

그는 건너편에 있는 크루거의 빵집에 먼저 들렀다 왔는지 빵이 가득 담긴 봉투를 들고, 입에는 식빵을 물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황자의 곁에는 바스티안 가문의 집사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오늘 황자에게 영지의 안내를 맡은 모양이었다.

"호오... 여기가 이 영지에 하나 뿐인 포션 가게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이 곳의 점주는 실력이 무척 좋아서, 온갖 포션을 다 만들어서 팔고 있답니다. 저희 가문의 아가씨의 병을 치료해낸 것 역시 그입니다."

창 밖의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러고보니 어제 본 앨리스 영애는 무척 아름다우셨지. 수도에 있을 때는 분명 불치병에 걸려서 힘들어 하셨다고 들었는데, 이곳에 오고 만났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열 살짜리 꼬맹이가 저런 말투를 쓰니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황자는 우물거리고 있던 빵을 꿀꺽 삼키고는 가게 문을 열었다.

거기까지는 다른 곳과 다를 바 없었지만, 문제는 황자 쪽이 아닌 황녀 쪽에서 발생했다.

이때까지 시종일관 관심을 보이지 않던 황녀가 황자를 따라 들어온 것이었다. 거리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향한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왜 하필 내 가게에서 이러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나 뿐만이 아닌지 황자도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가게에 들어온 황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진열장에 올려져 있는 포션들 힐끔거리고 있었다.

황녀가 내게 말을 할 기색이 보이지 않자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황자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포션의 명장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인재라지?"

"과찬이십니다. 황자님."

이런 짓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원래 사람 사는 일이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황자에게 대답했다.

황자는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는 포션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탁한 회색빛을 띠는 포션을 가리켰다.

"이건 어떤 효과를 가진 포션인가?"

"그건 냄새를 지워주는 탈취 포션입니다. 포션 병을 따서 바닥에 흩뿌리면 주변의 냄새를 모두 지워주는 것이지요."

"오오. 그럼 이건?"

"그건 마법사들이 자주 사용하는 마나 포션입니다. 마법을 사용하는 모험가들에게 있어서는 여벌의 목숨과도 같은 포션이지요."

내가 막힘없이 대답하자 황자는 신기해하며 진열장이 전시되어 있는 포션의 효과를 모두 물어보았다.

재료도 희귀하고 수도에서도 구하기 힘든 고급 포션이 이런 작은 가게에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는 무척 놀라며 이런 포션을 만들 수 있는데도 어째서 이런 변방에서 머무르는 것이냐는 말까지 들었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아서 그렇다고 대답하니 황자는 아쉬운지 입맛을 다셨다.

"그럼 마지막으로 이 포션은 어떤 용도인가?"

"그건..."

황자가 가리킨 것은 최근 숲에서 출몰하는 오크를 잡기 위해 특별제작한 포션이었다.

그것은 다른 포션들과 비교되는 새까만 색은 겉으로 딱 봐도 위험해 보였다.

"강력한 효과의 마비 포션입니다. 화살촉이나 검에 발라서 사용하면 오크나 고블린 따위는 손쉽게 잡을 수 있지요. 하지만 실수로 조금만 마셔도 인간의 몸에는 무척 치명적이니 조심해서 다뤄야합니다."

내 충고에 검은 포션병을 잡으려던 황자가 흠칫하고 손길을 멈췄다.

"그렇군. 확실히 자네는 이런 곳에서 머무르기엔 아까운 인재야. 어떤가? 그대 정도의 연금술사라면 내가 황궁에 자리를 만들어 줄 수도 있는데..."

황자는 각양각색의 효과를 가진 포션들과, 특히 고급 포션을 만들 수 있는 메리트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나를 포섭하려 했지만 나는 허리를 깊숙히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저는 이 곳이 좋아서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황자는 여전히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가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황자에게 시간이 다 됐다고 말하고 나서야 황자는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얼마든지 자신을 찾아오라는 말과 함께 가게를 나갔다.

황자가 내게 계속해서 설득을 하는 동안 진열장에만 붙어있던 황녀도 잠시 나를 쳐다보다 그의 뒤를 따라나갔다.

후우. 그래도 무사히 넘긴건가.

오랜만에 긴장을 했다가 풀려서 그런지 공복이 몰려왔다. 결국 점심도 먹지 못했고. 괜히 체력만 소모했다.

아쉬운대로 부엌 찬장에 넣어둔 간식이라도 꺼내 아이린과 나눠 먹을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나는 진열장의 한 켠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 이건 또 무슨."

푸른색, 붉은색, 녹색 등 각양각색의 색깔을 띠는 포션 병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곳에서, 단 한 병 뿐이었던 검은색 포션병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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