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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온 황녀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오늘도 입맛이 없어서 결국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부터 할 일을 생각하면 자신의 속에 음식을 밀어넣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녀가 양 손으로 붙잡고 있는 약병은 낮에 루디의 가게에서 훔쳐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럴 생각이 아니었다. 어떤 포션이든 판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에 따라 들어갔을 뿐이었다.
최근 불면증과 우울증에 계속해서 시달렸기 때문에 수면제나 진정제가 있다면 몇 개 사서 돌아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게의 점주가 마지막으로 소개했던 이 포션이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몬스터조차 쓰러뜨릴 수 있는 마취제.
기본 성분에 마취 효과가 있고, 인간의 몸에는 치명적이라고 했으니 이 포션을 먹으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다행히 이야기에 정신 팔린 황자와 점주는 자신이 포션을 슬쩍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품 안에 넣어서 방까지 들고왔다.
병의 마개를 빼기 전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일어날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아마 자신의 아버지는 별로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전혀 관심조차 없었으니까.
자신의 남매들인 황녀와 황자들은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기뻐할 것이다. 꼴보기 싫은 년이 죽었다는 것을 즐거워하면 했지, 슬퍼할 사람은 없다.
결국 자신의 죽음에 눈물을 흘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치도록 비참했다.
게다가 성녀 암살 미수 사건으로 소란스러운 지금, 황녀가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하니 황실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은폐할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있으나 없으나한 4황녀. 이번 기회에 존재했던 기록을 완전히 말소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황녀는 더 이상 망설임없이 병의 마개를 따버렸다. 자신이 살아있든, 죽어있든 비참해질 것이라면 고통 없는 저승으로 가고 싶었다.
포션의 마개를 따자 역한 냄새가 화악 올라왔다. 대체 무슨 재료로 만들었는지 차마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하긴. 독약이 향기로우면 그게 더 웃긴 일이라고 자조한 황녀는 출렁거리는 검은빛의 포션을 자신의 입가에 천천히 가져다댔다.
우습게도 그 때 떠오른 생각은 오늘 찾아갔던 포션 가게의 점주에 대한 것이었다.
자신이 죽고난 다음 자신의 사인을 조사하면 이 포션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질테니까. 어쩌면 그 점주가 황녀 암살의 용의자로 지목받을지도 모르겠다.
'유서라도 써둘까?'
자신의 자살에 다른 죄 없는 사람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잠시 고민했지만 황실에서 자신의 죽음을 그 정도로 조사할 것 같지도 않았기에 그만뒀다.
그리고 정말로 포션을 마시기 위해 입가에 포션병을 갖다대는 순간.
창문에 그림자가 비쳤다.
자신의 방은 2층이라 창 밖에 사람이 있을리가 없는데도 몇 번이나 거칠게 덜컹거리며 흔들리던 창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는 한 남자가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휴우. 아직 안 늦었나. 다행이네."
그 순간 열린 창문 사이로 거친 바람이 불며 그가 뒤집어 쓰고 있던 로브의 모자를 벗겨내고, 찬란하게 빛나던 보름달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황녀는 자신의 방에 난입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생각했었던 포션 가게의 점주.
오늘 낮에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그가 그곳에 있었다.
병에 입술을 댔던 황녀는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나머지 손에 쥐고 있던 병을 놓쳐 버렸다.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깨질 것만 같던 포션병은 바닥에 닿기 직전 허공에서 멈췄다.
자세히 보니 점주의 손에서는 푸른빛의 마나가 일렁이고 있었다. 손을 한 번 까딱이자 허공에 멈춰있던 포션병이 스르륵 움직이더니 그의 손으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포션병을 달빛에 비춰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잖습니까. 황녀 암살의 용의자로 연루된다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인데 말이죠."
상상만으로도 끔찍한다는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여유가 흘렀다. 지나치게 담담한 그의 태도에 황녀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저 남자는 어떻게 이 방에 들어온걸까. 저택 주변에는 황실 기사단이 교대로 경비를 서고 있을터였다.
비록 자신이 왕위 계승권에서 완전히 밀려난, 간신히 이름만 유지하는 황녀라 할지라도 황실기사단은 황족에게 충성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에게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황실 기사단은 이 남자가 내 방으로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말일까. 그것 역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기사단장은 이미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고, 다른 병사들 역시 엄선된 기사들로만 이루어진 기사단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제국의 자존심이 짓밟히는 것과 다름 없었다.
때문에 황녀는 무의식적으로 그 가정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남자가 자신의 방에 난입한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기에 우선은 눈 앞의 남자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실수로라도 말을 더듬지 않도록, 황가의 기품을 지키는 황녀에 어울리는 태도로 말이다.
"당신은 분명... 낮에 봤던 가게의 점주가 맞죠?"
황녀의 물음에 루디는 감탄했다. 황녀의 목소리는 처음 들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고운 목소리였다. 마치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에 루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 때문에 로브가 벗겨졌고, 이미 상대도 자신의 정체를 알아본 것 같았으니 숨겨봤자 의미도 없었다.
루디의 덤덤한 반응에 오히려 말문이 막힌 것은 황녀쪽이었다. 자그마치 황족의 창문을 열고 뛰어들어왔으면 뭔가 좀 극적인 반응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그가 들어오고 나서 한 것은 자신이 훔쳤던 약병을 회수한 것 뿐이었다. 마치 그것 말고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이 자신을 신경쓰지 않는 태도를 보이자 조금 이상한 기분을 느꼈던 황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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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들어오고 말았다. 내가 미쳤지. 그나마 어느 정도 마나가 돌아와서 망정이지 만약에 몸의 마나가 덜 돌아온 상태였다면 이곳에 들어올 엄두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황실기사단은 모두 소드 마스터에 준하는 기사들. 그런 기사 열 명의 눈을 속이고 숨어 들어오는 것은 상당한 집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은신 마법에 환각 마법, 그리고 동화 마법을 겹쳐 사용하고 나서야 간신히 담을 넘을 수 있었다.
원래는 여기까지 올 생각도 없었다.
황녀가 죽든 말든 그것은 내 알 바가 아니었고, 운이 좋으면 죽지 않고 반신불수로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이곳에 오는데는 나도 꽤나 깊은 고민이 필요했다.
황녀가 포션을 마시게 놔두고 다른 지역으로 몰래 넘어간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이 영지에 남겨둔 이들이 너무 많아서 그럴 수 없었다.
마리안, 플로라, 아르웬, 앨리스까지.
특히 앨리스는 이 영지를 다스리는 영애인만큼 황녀를 모시고 있던 자신의 저택에서 황녀가 죽었을 경우 황가에서 직접적으로 바스티안 가문에 강한 징계를 내릴 가능성이 높았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앨리스에게도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은 썩 유쾌하지 않을테니까.
황녀가 자살을 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녀의 성격상 혼자서 끙끙 앓아댈 가능성이 높았다.
아직 한창 때의 소녀가 정치적인 일로 고민하며 가슴 졸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었기에 내 선에서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포션을 회수하는데 성공했다. 만약 일 초라도 늦었더라면 일이 복잡해질 뻔했는데 운이 좋았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사실 이대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그랬다간 또다시 이번 같은 일이 일어나겠지. 결국 황녀의 자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앨리스에게는 몇 번이나 신세를 졌었으니, 특별이 이번 한 번 정도는 도와주기로 했다.
"황녀님이란 분께서 도둑질이라니.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내 손에 들려있는 포션병을 보이며 그렇게 묻자 황녀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좋아. 저 반응을 보니 당장 경비를 부를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최악의 상황은 면했고, 지금부터는 그녀를 설득할 차례였다.
"솔직히 저로서는 황녀님을 쉽게 이해하기 힘들군요. 명예로운 황가의 핏줄을 이어받으신 분이 아닙니까. 그런 분이 뭐가 아쉬워서 이런 선택을 하셨습니까."
물론 거짓말이었다.
황제에게 예쁨 받는 6황자와 다르게 완전히 관심 외인 4황녀가 암살 위협을 당한 적이 있다는 것과 다른 황녀들에게, 특히 2황녀에게 미움받고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상황도 모르는 주제에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놈처럼 행동하며 그녀의 억눌린 감정을 건드리는 편이 더 좋았다.
내 말에 황녀의 굳어있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그래, 차라리 터뜨려라. 파벌이라고는 없는 4황녀가 다른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리가 없다.
오직 나만이. 그녀에 대해 알지 못하고,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인 나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황녀는 얼굴을 푹 숙이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우는 것인지, 아니면 분노를 참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당신이."
"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런 소리야!!"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그녀에게서 방금 전처럼 우아한 황가의 기품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상처입은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그래, 차라리 그렇게 폭발시켜라.
적어도 괜찮다고 스스로마저 속이는 것보다는 저렇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털어놓는 편이 뒤탈도 적었다.
"복도를 걸어다닐 때마다 시녀들이 나를 비웃고, 기사들은 벌레가 팔 위를 기어다니는 것처럼 소름끼치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내 언니라는 작자들은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당신이 대체 뭘 안다고 지껄이는건데!"
물론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예측했던 나는 이미 이 방 전체에 방음 마법을 걸어두었다. 다행스럽게도 황실 기사단이 내 마법을 눈치챈 기색은 없었다.
씩씩대며 소리를 지른 황녀는 그제서야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지만 방 밖에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의아해했다.
그야 그 정도로 크게 소리를 쳤으면 시녀나 기사 한 두 명쯤은 문을 열고 들어올 법도 한데 마치 아무도 자신의 고함을 못 들은 것처럼 있었으니 말이다.
그제서야 내가 뭔가 수작을 부렸다는 것을 깨달은 황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만 나를 노려보는 시선은 방금 전보다 더 차가워져 있었다.
마치 원수를 쳐다보는 것처럼 노려보는 황녀의 시선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이래서야 대화로 풀어가는 건 물 건너갔군.
"...이제 좀 진정이 되셨나 보군요."
"......"
황녀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이미 밤이 깊었고, 당장 내일 황녀가 자살을 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아두기 위해서는 조금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서로 문답을 교환하는 겁니다. 어차피 황녀님도 제 정체가 궁금하실테고, 저도 황녀님에 대해 궁금한게 있으니 서로 한 번씩 번갈아가며 질문하는 겁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죠?"
"어쩌면 제가 황녀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황녀는 코웃음치며 나를 비웃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라고해도 갑자기 자신의 방에 쳐들어온 남자가 황실 내부의 암투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는 믿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녀가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있어서는 잃을게 없는 내기였으니까.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나에 대해서도 정보를 캐낼 수 있다. 아마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겠지.
그녀가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어느 쪽으로든 내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