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39/260)

예상대로 황녀는 나를 비웃으면서도 내기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좋아요. 당신은 어떻게 제 방에 들어올 수 있었던거죠?"

황녀의 질문에 나는 시원하게 대답해주었다.

"은신 마법으로 기척을 숨기고, 환각 마법으로 기사들에게 똑같은 풍경을 복사한 모습이 비쳐보이도록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동화 마법을 사용해서 건물에 붙어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정원에 온 다음에는 벽을 타고 올라왔고요."

내 이야기를 듣던 황녀는 어이가 없는지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뭔가 반박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가 실제로 그녀의 방에 들어온 것도 사실이기에 그녀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 다음은 내가 질문할 차례였다. 생각해둔 다른 질문들이 여러 개 있었지만 나는 문득 궁금해진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왜 제가 이 방에 침입했는데도 다른 사람을 불러내지 않으신겁니까?"

그녀가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비명을 지르거나, 방에서 뛰쳐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나와 대화를 나누는 방법을 선택했다. 평범하다고 보기에는 힘든 행동이었다.

내 질문에 황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이제와서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어차피 죽을 생각이었고, 설령 당신이 날 죽이러 온 암살자라고 해도 딱히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을거에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내 포션은 자살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어쩌면 황녀가 내 가게에서 이 포션을 훔쳐간 것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포션을 도둑맞지 않았더라면 나는 황녀의 이런 의도조차 알지 못했을테니까. 황녀의 죽음도 막지 못했을테고, 바스티안 가문을 비롯한 이 영지는 완전히 파탄났을지도 모른다.

황녀의 죽음은 어쩌면 영지를 비롯해 작위를 모두 몰수당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큰일이었다.

방금 전 내가 들어올 때 열어둔 창문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제대로 닫히지 않은 창문이 요란하게 덜컹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금방이라도 박살날 것처럼 거칠게 흔들리는 창문을 잡았다. 창문 너머를 보니 하늘에는 이미 먹구름이 가득 끼어 있었다.

틈 사이로 희미한 비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이번 장마는 꽤 길거야. 구름이 내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공기가 머금은 차가운 물기를 느끼며 나는 창문을 닫았다.

어느새 방 안을 비추던 달빛마저 사라지고,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다시 황녀와 마주보고 앉자 공기의 밀도가 높아진 기분이었다.

물론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는지 황녀는 여전히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내가 두 번째 질문을 하라는 듯이 황녀에게 눈길을 주자 그녀는 직설적으로 내게 따져물었다.

"당신은 대체 정체가 뭐죠?"

"질문이 추상적이군요. 굳이 말하자면 평범한 포션 가게의 주인입니다."

내 대답에 황녀는 곧바로 반발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세요. 비록 저도 아는 것은 적지만 당신이 만든 포션들이 평범한 가게에 있을만한 수준의 것이 아니란건 알고 있어요. 특히..."

황녀는 입에 그를 언급하는 것조차 기분 나쁘다는 듯이 질색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지크 녀석이 사람을 볼 때 실수한 적은 거의 없으니까요."

지크. 그게 6황자의 이름인가. 그건 그렇고 황녀가 나를 이렇게 고평가 할 줄은 몰랐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뛰어난 사람을 보면 인정하기 싫어하고, 깎아내리고 싶어하니까.

그런 점에서 황녀는 다른 사람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딱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닙니다. 지금은 분명 포션 가게 말고는 다른 일을 하지 않으니까요."

"그럼 전에는..."

황녀가 다시금 질문을 하려하자 나는 그녀의 말을 자르고 규칙을 상기시켜 주었다.

"방금 분명 한 번에 질문 하나씩이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이번에는 제 차례입니다."

"......"

적어도 방금 전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자포자기한 상태로 자살만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어떤 한 가지에 관심을 가질 수 있으니까.

설령 그 관심의 방향이 원망이나 증오, 경멸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나 역시도 어릴 때 몬스터에 대한 증오를 밑바탕으로 이를 갈며 살아왔고,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다.

증오라는 감정이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옛날에 혀를 깨물고 죽었겠지.

"두 번째 질문은 왜 순례에 참여하셨냐는 겁니다. 낮에 보니 딱히 영지의 주민들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지도 않던데요."

마치 질책하는 것처럼 조금은 날이 선 내 말투에 황녀가 움찔했다. 나야 뭐 황녀의 속사정을 알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녀가 순례에 참여하게 된 사정을 모른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들이 자신들은 모르는 황녀의 사정을 이해해줄 필요는 없다.

실제로 황녀가 주민들에게 차가운 태도와 무관심을 내비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까.

황녀는 지금 스스로 적을 만들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자신이 너무 힘들다고, 죽고 싶다면서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것에 불과하다... 라고 말했다간 당장이라도 황녀가 혀를 깨물지도 모르니 조금 돌려 말할 생각이었다.

"...나는. 순례를 돌고 싶어서 지원한게 아니에요. 다른 황녀들이랑, 황자들의 압박에 못 이겨서..."

자신이 말하면서도 궁색한 변명처럼 들리는 것을 아는지 황녀의 목소리를 뒤로 갈수록 기어들어갔다.

순례를 고통의 탈출구로 사용한 황녀에게는 제대로 된 변명을 할 기회조차 없었다.

결국 하던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한 황녀는 침묵했다.

그 와중에도 '언니'나 '오빠'가 아닌 황녀와 황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그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곧 죽어도 그들과 같은 핏줄을 타고났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다는 것이겠지.

"물론 그렇겠지요. 황녀님께도 힘든 상황과 고통이 있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백성들이 그걸 이해해드려야 합니까?"

"......"

"황녀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황녀님도 당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인간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깔보고, 무시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는 당신의 남매들처럼 말이죠.

결국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4황녀는 다른 황족을 혐오하고, 역겨워하지만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다 같은 황족일 뿐이었다.

황녀는 내 이야기를 모두 듣고나서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것인지, 아니면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또 다시 자살을 고민하고 있는지.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은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내가 그녀에게 범한 무례만 하더라도 당장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기에 나는 묵묵히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기를 기다렸다.

그 동안 창 밖의 먹구름은 어느새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기가 창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빗줄기가 더욱 굵어지고 때마침 천둥이 울리는 순간, 황녀는 입을 열었다.

"좋아요. 당신 말대로 나는 순례에는 관심도 없고, 나를 기다렸던 백성들에게 마땅한 인사조차 해주지 않았어요. 역겨운 제 남매와 다를 바 없는 행동들이었어요."

황녀는 담담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나는 속으로 작게 웃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말하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는 생기가 돌고 있었으니까.

황녀가 세 번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제가 그런 행동들을 그만두고 나아지려고 노력한다면 제가 처해있는 상황이 바뀌나요? 저를 괴롭히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건가요?"

황녀의 말에서 나는 그제서야 그녀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이건 일종의 거래였다.

물론 내게 이득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거래였지만 별 수 있나. 이미 황녀는 내가 그녀를 도우려는 의도를 비친 것을 알고 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니 나한테 배신당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일테고, 결국 내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물론입니다. 황녀님이 바뀌시는 순간부터, 제가 황녀님의 주변을 바꿔나갈테니까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근거없는 허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진심이었다.

"...좋아요. 앞으로는 저를 에디스라고 부르세요. 황녀라는 호칭은 다른 황녀들이랑 똑같이 취급받는 것 같아서 진절머리나니까."

"알겠습니다. 에디스님."

에디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속으로 작게 되뇌었다.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이 누군지는 상관없어요. 정체도 묻지 않겠어요. 그저 당신이 정말 나를 도와줄 수 있다면, 저를 이 지옥에서 꺼내주세요."

에디스의 부탁아닌 부탁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밤이 깊으니 이만 주무십시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찾아왔을 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에 에디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낮에는 허공을 응시하던 그녀의 시선은 이제 온전히 내게 머물러 있었다.

그 정도면 대답으로는 충분했다.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신나기도 했다.

릴리스와 함께 지내서 그런 것일까.

남을 돕는 것에 아주 조금 정도는 재미를 들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굵어진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는데도 기사들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러다가 내일 아침에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가볍게 혀를 찬 나는 슬쩍 텔레포트 마법을 발동시켰다.

원래는 황실 기사단이 눈치챌 위험이 있어서 걸어서 돌아가려 했지만 마침 폭우가 오고 있으니 내 마법을 감지하기도, 설령 감지한다 하더라도 마나의 흔적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정원 바닥에 가볍게 마법진을 그린 다음,마법을 발동시키자 새하얀 빛이 잠깐 번쩍였다. 다시 눈을 떴을때,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여전히 밖에서는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처럼 울리고 있었다.

나는 반쯤 젖은 로브와 바지를 벗었다. 젖은 옷을 빨래 바구니에 던져넣고, 욕실에 들어가서 몸을 씻었다.

몸의 물기를 수건으로 모두 닦고 욕실 밖으로 나오자 베개를 품에 끌어안고 있던 아이린이 서 있었다.

설마 아직까지 안 자고 있었을 줄이야. 아니, 내가 욕실에서 씻는 소리 때문에 깬건가.

예상 밖의 상황에 머릿속으로 할 말을 떠올리던 차에 아이린이 선수를 쳤다.

"주인님... 오늘 하루만... 같이 자면 안되나요?"

간절히 애원하는 아이린의 눈빛에 나는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난번에 아이린이 함께 자면 안되냐고 했던날도 분명 이렇게 비가 왔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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