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260)

아이린이 천둥 치는 소리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오늘은 밤도 깊었으니 어서 자자."

혹시라도 내가 거절하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있던 아이린에게 흔쾌히 허락해주자 아이린은 눈에 띄게 기뻐했다.

아이린은 악몽이라도 꿨는지 잠옷은 살짝 풀어헤쳐져 있고 등이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나는 아이린에게 잠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하고는 내 방에 먼저가서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아이린이 춥지 않도록 보온 마법까지 이불에 걸어놓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아이린은 지난번 릴리스와 함께 갔던 옷가게에서 샀던 실크 잠옷으로 갈아입고 왔다. 하필이면 저 옷이라니.

움직일때마다 가슴팍이 보이고, 옆으로 누운 경우에는 완전히 몸의 라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잠옷이었다.

다시 한 번 갈아입고 오라고 할까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내가 아이린을 의식하는 것 같아서 그만뒀다.

나는 아이린이 무서워하지 않도록 머저 창가쪽에 누웠고, 아이린은 그런 내 옆에 딱 붙어 누웠다. 아이린의 몸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왔다.

사실 나도 아이린과 함께 자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는 함께 자는 행위를 무척 좋아했다.

지난번에 말했듯이 창관을 가더라도 섹스를 하지 않고 잠만 자고 올 정도로 나는 사람의 온기에 굶주려 있었다.

하지만 아이린은 서큐버스고, 지난번에 나왔던 아이린의 서큐버스의 본능 같은 것이 또 튀어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을 뿐이다.

슬쩍 이쪽을보니 내쪽으로 고개를 돌린채 미소를 지은채 누워있는 아이린이 있었다.

고작해야 이런걸로 저렇게 좋아하다니. 오히려 내 쪽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아이린처럼 착하고 속을 썩이지 않는 아이도 드물었으니까.

천천히 아이린을 살펴보던 나는 아이린이 꽤나 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왔을 때는 비쩍 말라서 완전히 앙상하게 말라 보기도 안 좋았는데, 지금은 조금 살집이 붙어서 한창 때의 어린애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창백했던 피부에는 생기가 돌았고, 조금 꾸몄을 뿐인데도 아이린의 미모는 어디가서 빠지질 않았다. 릴리스와 더불어 영지의 남자애들을 완전히 휘어잡고 있었다.

게다가 완전히 평평했던 가슴도 조금이지만 봉긋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더 이상 성장의 여지가 없는 릴리스와 다르게 아이린은 계속해서 성장을 하는중이었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과 매끈한 허벅지, 게다가 남자의 보효욕구를 자극하는 청순한 외모까지.

게다가 워낙에 착한 성격이다보니 영지의 다른 사람들은 아이린을 천사같은 아이라고 극찬하곤 했다.

어른들에게 예의를 지켜 인사도 빼먹지 않고, 늘 미소를 짓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대했기에 아이린은 이 거리의 마스코트나 다름 없는 아이가 되었다.

그녀와 함께 거리를 걷다보면 맛이나 한 번 보고 가라며 음식들을 나눠주는 점주들도 꽤나 많았다. 덕분에 거리를 돌아다닐 때는 심심할 일이 없었다.

아이린은 특이하게도 곧게 누워서 자는게 아닌 내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옆으로 누워서 잠들었다.

보랏빛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그녀의 눈을 덮자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런 내 손길에 잠에서 깼는지 아이린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희미하게 눈이 뜨였다.

아이린은 두어 번 눈을 깜박이더니 어린아이처럼 배시시 웃었다.

그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미소가 내 심장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기에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속으로 마나 술식을 중얼거려야만 했다.

아이린은 내 손길이 기분 좋은지 작게 콧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좀 더 붙어왔다. 어쩐지 지난번에 함께 잤을 때보다도 침대가 훨씬 좁아진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그런 아이린을 품에 끌어안았다.

아이린은 살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지만 금세 미소를 지으며 내 가슴팍에 얼굴을 비벼댔다.

"헤헤...주인님 냄새..."

맡아봤자 퀴퀴한 홀아비 냄새 뿐일텐데, 아이린은 왜 내 냄새가 좋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남자의 마음을 살살 녹이는 말들을 자각도 없이 하는 것을 보니 서큐버스가 확실하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여전히 밖에서는 쉬지 않고 쏟아지는 빗줄기가 창가를 두들겼다.

나는 아이린을 품에 끌어안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눈가를 비추는 희미한 빛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이미 아침이 밝았는지 창 밖으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

반쯤 놓고 있었던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오고 나서야 아이린을 꼬옥 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팔을 빼냈다. 이 자세로 밤새도록 잤던건가.

나야 그렇다쳐도 아이린은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린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다음 몸을 일으켰다.

익숙치 않은 자세로 자서 그런지 헝클어진 머리를 적당히 빗으로 정돈했다.

마침 머리를 정리하고 세수를 하고 나오니 첫 손님이 찾아왔다. 내 가게의 단골중 하나인 베테랑 모험가였다.

지금 이 영지에 남아있는 모험가들 중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실력이 좋은 남자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다짜고짜 본론을 이야기하는 것 대신 늘 그렇듯이 적당한 잡담을 꺼냈다.

평소 같았으면 자신이 어제 잡은 몬스터나 얻은 수확에 대해 말할텐데, 오늘은 황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자네는 황자 전하를 뵌적이 있나?"

"어제 저희 거리를 지나가는길에 잠깐 뵙긴 했습니다."

그가 나를 영입하고 싶어서 안달을 냈다는 것을 일부러 생략했다.

딱히 자랑할만한 일도 아니고, 오히려 내게는 귀찮은 일일 뿐이었으니까.

내 연금술사로서의 실력이 이런 변방 영지에 있을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하지만 눈 앞의 남자는 여러 영지를 돌아다닌 베테랑 모험가답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중 하나였다.

"하긴. 자네 정도의 실력이라면 황자 전하의 눈에 띄었겠구만. 솔직히 이런 시골에 자네 가게가 있는게 나도 이해가 안 될 정도니."

"제가 사람 많은 곳은 별로 안 좋아해서요. 그래서 어제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특별한 일이라면 특별한 일이지. 일개 모험가인 내가 무려 황자 전하와 악수를 했으니 말이야. 하핫."

남자는 그렇게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살면서 언제 또 황자님과 악수를 해보겠는가. 덕분에 어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손을 씻지 않았다네. 자네도 한 번 잡아보겠나?"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솔직히 더럽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고작 그런게 무슨 영광이라고 저렇게까지 반응하는 것인지.

"일일이 마을 거리를 찾아다니시는 것도 그렇고, 우리같은 무지렁이들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으시더군. 저런 분이 황제가 되셔야 하는데 말이야."

방금같은 말은 반역의 소지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모험가라는 종자들은 원래 저런식으로 말하기 때문에 나는 적당히 웃어넘겼다.

"황녀님은 어떻습니까?"

황자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그에게 슬쩍 황녀에 대해 물어보자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글쎄. 솔직히 말해서 황자님에 비하면 조금 대하기 껄끄러운 분이시지. 아직 황녀님과 말을 섞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호언장담 하듯이 말하는 그에게 바로 눈 앞에 있다고 말해주고 싶은 것은 참으며 나는 '그렇습니까'라고 아무렇지 않은척 대답했다.

아무래도 황녀의 차갑고 무관심한 이미지는 영지에 널리 퍼진 모양이었다. 물론 영지에 온지 아직 사흘도 되지 않았으니 지금부터라도 변한 모습을 보인다면 되겠지만...

'사람이라는게 한 순간에 변할 수 있는게 아니니까.'

당장 에디스에게 황자처럼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주민들과 살갑게 대화를 나누라고 해도 그건 거의 불가능했다.

오히려 갑자기 달라진 황녀의 태도에 당황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차근차근, 하나씩 바꿔나가는게 좋겠지. 게다가 나는 황녀의 본질적인 문제 역시 해결해주기로 했었다.

다른 황녀와 황자들의 핍박과 괴롭힘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옛날의 인맥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오랜만에 수도에 찾아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게 황자에 대한 칭찬을 잔뜩 늘어놓던 남자는 하급 포션과 해독제를 몇 병 사서 돌아갔다. 최근 숲에서 고블린 부락이 몇 개 발견됐다는 모양이었다.

나는 조심하라는 말을 건넸고, 그는 평소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걱정 말라고 대답했다.

그의 뒤를 이어 찾아온 모험가들도 대부분 하급 포션을 몇 병씩 사갔고, 대충 일단락 되자 아침을 차릴 준비를 했다.

가게 문을 열어 갑갑한 공기를 환기시켰다. 어젯밤에 내린 폭우 덕분인지 시원한 공기가 바람을 타고 가득 들어왔다.

베이컨을 얇게 썰어넣은 스프와 함께 커틀릿을 준비했다.

어제 저녁에 미리 재워뒀던 돼지고기를 꺼냈다. 가지런히 놓인 돼지고기를 적당히 덩어리 지게 손으로 뭉쳐주었다. 그렇게 대략 여섯 개 정도를 만들어냈다.

그 다음에는 찬장에 들어있던 빵가루가 담긴 봉투를 접시에 털었다. 접시를 가득 채운 빵가루에 우유를 조금씩 뿌려 촉촉하게 만든 다음에는 돼지고기를 빵가루에 올렸다.

새하얀 빵가루를 돼지고기에 빠짐없이 묻혀주고는 냄비에 기름을 담아 끓이기 시작했다. 슬슬 아이린을 깨워야겠다고 생각하는 참에 아이린이 눈가를 비비며 내 방에서 걸어나왔다.

"...으응...주인님..."

아직 잠이 덜깼는지 비틀거리며 걷는 아이린의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딸을 키우는 아버지의 심정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이래서 아버지들이 딸바보가 되는거구나.

"곧 아침 식사 시간이니 어서 씻고오렴."

아이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아이린이 씻는 사이 나는 완전히 끓기 시작한 기름에 빵가루를 입힌 돼지고기를 넣었다.

지글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튀겨지기 시작한 커틀릿을 지켜보니 어느새 샤워를 마치고 나온 아이린이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었다.

물기가 남아있는 보랏빛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머리카락이 길어서 그런지 혼자서 닦기 힘들어하는 모습에 결국 내가 그녀의 뒤에서 머리를 닦아주었다.

하루라도 머리를 감지 않으면 다음날 손가락이 안 들어갈 정도로 거칠어지는 내 머리카락과 달리 아이린은 손에 걸리는게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머릿결을 가지고 있었다.

릴리스가 있을 때는 자매처럼 서로의 머리카락을 닦아주곤 했는데 지금 릴리스는 숲 속의 저택에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머리카락을 조금 자르라고 해야하나?'

개인적으로는 머리카락을 기른편이 보기 예뻤지만 아이린이 거추장스러워한다면 적당히 잘라줄 생각이었다.

아이린 또래의 여자애들 중 몇명은 아직 꾸미는 것을 귀찮아해서 남자애처럼 완전히 단발을 하고 돌아다니기도 했으니까.

"아이린. 혹시 긴 머리가 불편하다면 조금 잘라줄 생각이다만 네 생각은 어떻니?"

수건으로 모두 물기를 닦아내고, 빗으로 그녀의 머리를 빗어주며 넌지시 묻자 아이린은 잠시 고민하더니 내게 질문했다.

"주인님은... 짧은 머리가 좋으신가요?"

아이린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꼬며 나를 곁눈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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