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41/260)

나는 딱히 고정된 취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린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버리는 것은 조금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내 취향을 아이린에게 강요하는 것은 싫었기에 물었던 것이다.

내가 고개를 젓자 아이린은 고사리같은 양 손으로 내 투박한 손을 맞잡았다.

"주인님 생각이 그러시면 안 자를래요. 헤헷. 혹시 주인님이 원하시는 머리가 있다면 얼마든지 할테니까 말씀해주세요."

그렇게 사랑스러운 소리를 하며 그녀는 내 품에 안겼다.

처음 내가 아이린을 노예상인에게 샀을때는 나를 무서워해서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오들오들 떨곤 했는데, 이제는 완전히 나를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지 스킨쉽을 무척 좋아했다. 끌어안거나,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하면 무척 행복해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아이린도 조금만 더 커서 성숙해지면 나한테서 홀아비 냄새난다고 가까이 오지도 않겠지. 어쩌면 멋진 남자친구를 만들어올지도 모른다.

슬픈 미래가 떠올라 착잡한 기분이 되려는 순간 코를 찌르는 탄내에 정신을 차렸다.

기름에 끓던 커틀릿이 완전히 타버리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꺼낼 수 있었다. 그래도 끝부분이 조금씩 그슬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기에 칼로 탄 부분을 잘라내야 했다.

커틀릿 여섯개를 모두 접시에 담고, 냄비에 담긴 기름을 따로 봉투에 옮겨담았다. 저걸 그대로 버렸다간 대참사가 일어날테니 나중에 따로 처분해야했다.

그렇게 정리를 얼추 끝내자 이미 탁자 위에 수저를 차려놓은 아이린이 얌전히 앉아있었다.

나는 그녀의 반대편에 앉고는 내 접시와 아이린의 접시에 커틀릿을 각각 세개씩 옮겨담았다.

기름에 노릇노릇하게 잘 튀겨진 커틀릿은 가게 안을 고소한 향으로 가득 채웠다.

아이린은 이미 커틀릿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다만 내가 먼저 수저를 들지 않아 꾹 참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착실하기 짝이 없는 아이린의 행동에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커틀릿을 작게 썰어 포크로 찍고, 입 안에 집어넣자 그제서야 내가 먹기를 기다리던 아이린도 수저를 들었다.

다만 꽤나 두꺼운 커틀릿을 그녀의 힘으로 자르기는 버거웠는지 나이프를 들고 고군분투하고 있길래 내가 그녀의 것도 썰어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커틀릿은 내 생각대로 잘 만들어졌다.

바삭바삭한 튀김옷과 고기의 육즙이 그대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속살의 맛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이린 역시 입을 오물거리며 커틀릿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방금 전에 커틀릿을 조금 태웠을때만 해도 속까지 탄 것은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아무래도 기우였던 모양이다.

다만 두 개 정도 먹고나니 다른 기름진 음식을 먹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 물리기 시작했고, 그건 아이린도 마찬가지인지 포크를 놀리는 속도가 느려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에 들어가서 유리병에 담긴 오렌지 주스를 꺼내왔다.

주스가 담긴 병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부엌에 놓인 컵을 두 개 들고 돌아왔다.

그러고보니 아이린과 함께 지내고 나서부터 나는 그녀에게 개인 컵을 만들어주겠다고 했지만 그럴 필요 없다며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결국 그만뒀다.

잔 두개에 오렌지 주스를 가득 담아 한 개를 아이린에게 주었다.

"고맙습니다! 주인님!"

고작해야 이 정도로도 꼬박꼬박 감사 인사를 하는 아이린을 보면 절로 흐뭇해졌다. 세상 어린애들이 모두 아이린같으면 좋을텐데.

아이린은 잔에 조심스레 입을 갖다대고는 꼴깍거리며 주스를 마셨다. 시장의 노점에서 파는 오렌지 주스처럼 설탕을 듬뿍 넣은 것은 아니지만 오렌지의 신맛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는 맞춰놨으니 마시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아이린은 잔을 절반 정도 비운 다음 다시 기세좋게 커틀릿을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아이린이 설거지는 자신이 하겠다고 단호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그녀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밀렸던 장부 정리를 하기로 했다.

최근 포션 판매로 거둔 수익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딱히 내가 포션값을 비싸게 측정해서 폭리를 취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본래부터 나는 다른 영지에 비해서도 훨씬 저렴한 가격에 포션을 공급하고 있었다.

그저 품질도, 가격도 내 가게를 따라오지 못한 다른 포션 가게들이 모두 망해버리는 바람에 내 가게로 모험가들이 몰려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봤자 나한테는 푼돈이지만.'

내가 한 달에 벌어들이는 돈은 대략 20골드 정도.

원래 포션같은 물건들이 대부분 인건비 때문에 비싸기 때문에 마진이 많이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나 같은 경우에는 오크의 피도 직접 공수해오곤 했으니까 재료값은 한없이 0에 가까웠다.

나는 가죽 주머니에 담긴 동전들을 금화와 은화로 분류해서 담았다. 가죽 주머니 안에서 동전들이 잘그락거리며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분류한 가죽 주머니들을 서랍 안에 넣어놓은 다음에는 진열장의 빈 자리들을 확인하고는 창고에서 꺼내온 포션들로 그 자리를 채웠다.

대부분이 하급 포션이었고, 드물게 해독제와 마나 포션이 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그걸 아직 안꺼냈었네.'

지난번에 저기서 아이린과 놀고 있는 워드 녀석을 데려온 날, 우연히 숲에서 희귀한 약초를 채집한 덕분에 마나를 응축한 영약을 하나 만들 수 있었다.

당장 내가 팔고있는 마나 포션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다.

복용자의 체내에 마나의 순환을 원활하게 도와주고, '마나의 그릇'을 확장시켜주는 영약으로 어지간한 마법사라면 눈이 돌아갈 것이다.

문제는 이 영지에서 이런 물건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잘 나가는 마법사가 없다는 점이었다.

마법사 자체가 워낙 드문 인재였을 뿐더러 이 영지에서 활동하는 모험가들 중에서 재능있는 이들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나마 떠올려본다면...

머릿속으로 한 사람을 떠올리는 순간 가게 문을 열고 손님이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을 보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지금 찾아온 손님은 다름아닌 제시카, 안젤리카 자매였다.

그녀의 몸 안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불순물 없이 정순하게 가다듬어져 있었다.

성급하게 마나의 그릇을 키우는 것보다는 명상과 마법을 반복 숙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풋내기 마법사였다면 자신의 마나 그릇을 키우려고 별 짓을 다 했을텐데, 안젤리카는 오히려 자신이 가진 마나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익혔다.

물론 지금 당장은 마나 그릇을 키우는 방법이 더 좋은 효율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수준에 맞지 않는 마나는 독이 된다.

스스로도 제대로 다룰 수 없는 마나를 품고 있다보면 마법을 사용할 때도 불순물이 섞인 마나를 낭비하게 되고, 결국에는 안젤리카처럼 차근차근 마나 그릇을 키운 이들에게 역전 당하는 것이다.

"루디 씨! 저희 왔어요!"

"......."

"오랜만에 뵙는군요."

제시카와는 지난번에 아르웬의 집에 찾아가서 술을 마셨던 날 마주친 이후로 며칠 동안은 어색했지만 그날 이후로 내가 아르웬을 찾아가지 않자 정말로 술김에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는지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했다.

안젤리카는... 지난번에 플로라랑 섹스하는 모습을 들켰을 때 이후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가끔씩 시선이 마주쳐도 슥 피하기만 할 뿐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제시카와 고개를 작게 숙이는 안젤리카의 인사를 받은 나는 두 사람을 탁자로 안내했다.

두 사람 다 오늘 나를 찾아온 옷차림이 평소에 입고 다니는 갑옷과 로브가 아닌 평상복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대낮인 지금 몬스터를 잡으러 갈 리도 없고, 평상복인 옷차림인걸 보니 차라도 대접하면서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눠도 될 것 같다.

부엌 찬장에 넣어둔 찻잎을 꺼내 차를 끓이는 동안, 아이린에게 바로 옆의 거리에 있는 과자 가게에서 쿠키와 마카롱을 몇 개 사오라고 심부름을 보냈다.

물론 심부름 값으로 먹고 싶은 간식도 몇 개 사오라고 돈도 넉넉하게 쥐어주었다.

은은한 박하향과 함께 달여진 차를 잔에 따랐다.

찻잔 세 개를 접시에 담아 탁자로 돌아가서 그녀들의 앞에 각각 한 잔씩 놓아두자 감사 인사를 해왔다.

"고마워요. 역시 루디 씨가 끓여주는 차가 제일 맛있다니까."

"...감사합니다."

차를 무슨 음료수마냥 꼴깍거리며 마시는 제시카와 그에 대비되게 창백한 입술로 찻잔을 호호 불어서 차를 홀짝이는 안젤리카의 모습은 정말 두 사람이 자매가 맞는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나도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말을 걸었다.

"오늘은 모험을 안 가신 모양이시군요."

"어제 숲에 들어갔다가 발견한 고블린 부락을 완전히 괴멸시키느라 새벽에 간신히 돌아왔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휴식이에요."

그러고보니 오늘 아침에 찾아온 남자도 고블린 부락들이 많이 발견됐다고 했었지.

고블린들이야 워낙에 번식 능력이 좋은 놈들이니 숫자가 늘었다고 해도 부락 여러개가 한꺼번에 발견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어제 수확은 좀 있으셨습니까?"

"네. 고블린 샤먼이 쓰던 마법 지팡이랑, 놈들이 모아놨던 보석과 철제 장비들까지 모두 회수해서 한 달은 놀아도 될 정도에요."

아무래도 꽤나 크게 한 탕 벌어들인 모양이었다.

원래 모험가들에게 몬스터 부락의 발견은 대박과 직결됐다. 아무래도 그냥 숲 속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보다는 놈들의 집을 털어먹는 것이 훨씬 얻을게 많으니까.

특히 고블린 놈들은 은이나 금처럼 반짝이는 광물이나 보석들을 부락에 모아놓는 습성이 있었기에 그것만 챙겨도 중박 이상이었다.

고블린들은 꽤나 큰 규모로 무리 지어 살기 때문에 두 명이서는 놈들을 일망타진하기 힘들었을텐데, 아마 새벽에 늦게 돌아온 것 역시 그 때문이리라.

"새벽까지 고생이셨겠군요. 모험가 랭크는 올리셨습니까?"

"저는 지난주에 C랭크로 승급했고, 언니는 아직이에요."

확실히 제시카는 전에 봤을 때보다 몸에 잔근육이 잘 잡혀 있었고, 몸놀림도 잽쌌다. 지난번 던전 브레이크 때 겪었던 일들이 그녀들을 한 단계 더 성장시킨 것이겠지.

다만 안젤리카가 아직 승급하지 못한 것은 조금 의외였다.

물론 다른 B랭크 모험가들에 비하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이렇게 인재가 부족한 영지에서라면 B랭크 모험가들을 한 명이라도 더 늘리고 싶어하기 마련이었다.

왜 안젤리카가 아직도 승급되지 않을까 생각하던 나는 모험가 길드에서 랭크를 측정하는 방법을 떠올렸다.

'아이고...'

모험가 길드에서는 보통 모험가들의 랭크를 평가할 때 세 가지를 고려한다.

첫 번째는 실적. 얼마나 많은 의뢰를 완수했는지. 의뢰의 성공률은 어느 정도 되는지. 이런 것들이 모두 기록되어 그 모험가에 대한 스펙이 되기 마련이다.

두 번째는 신용. 그 모험가에 대한 평판은 어떤지, 사고를 치거나 그와 관련있는 인물들이 누가 있는지 조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가 실력. 당연한 말이지만 실력이 없는 이를 높은 랭크에 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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