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260)

직업군마다 랭크를 측정하는 법이 다른데, 보통 B랭크 이상부터는 각 영지의 길드에 속해있는 '전속 모험가' 들과 대련을 통해 실력을 검증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는 것이 전사나 도적이라면 모를까 마법사의 경우에는 대도시가 아닌이상 담당 모험가가 존재하지 않았고다.

그래서 마법사들에게는 대련을 대신해서 새로운 랭크 측정방법이 도입되어 있다.

바로 '마나 측정기' 라는 마도 공학품인데, 구슬 형태의 물건에 손을 얹으면 그 사람의 마나량을 측정해서 수치에 등록된 양 이상이면 파란불이, 아니라면 붉은 불이 들어오게 된다.

마법사는 다른 계열과 다르게 공격, 방어, 보조 등 다채로운 분야가 있었기에 그나마 공평한 '마나량'으로 랭크를 매기기로 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 부분에서 안젤리카처럼 실력 있지만 아직 마나 그릇이 작은 이들이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었다.

제시카는 언니가 랭크 승급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별로 하고 싶지 않았는지 화제를 돌렸지만 정작 안젤리카는 아무렇지 않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렇게 제시카와 좀 더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어쩐지 밖이 소란스러웠다.

싸움이라도 일어났나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니 밖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거리에서 싸움이 났다고 하기에는 어쩐지 다들 신기해하는 반응이었다.

'무슨 일이지?'

가게 문을 열고 나가 그 원인을 확인하려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직후, 나는 사람들이 어째서 신기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어젯밤에 내가 찾아갔던 황녀가 아름다운 흑발을 빛내며 양 옆에 기사를 대동한 채 내 가게 앞에 섰다.

죽어도 문을 열기 싫었지만 이미 황녀와 마주보고 있는 이상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입꼬리가 경련하는 것을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 웃음을 지어보려했지만 어색하게 굳은 미소만이 지어질 뿐이었다.

솔직히 나는 황녀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이 그녀의 악취미라고 생각했다.

아마 어제 내가 그녀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것에 대한 복수가 아닐까. 문을 열면서 그 생각을 마흔 번 정도 했던 것 같다. 황자도 없이 홀로 황녀가 내 가게에 찾아온 것은 단연 눈에 띌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어제 아무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황녀였으니 사람들의 관심이 더욱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황녀님."

할 말은 많았지만 그녀의 옆에 있던 기사들과 내 등 뒤에서 당황하고 있는 모험가 자매 때문에라도 다짜고짜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만한 점은 에디스가 가볍게 눈짓하자 그녀의 양 옆에 서 있던 기사들은 묵묵히 내 가게 앞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황녀가 나오기 전에는 아무도 내 가게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 같았지만, 반대로 말하면 황녀가 나가기 전에는 이쪽에서도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갑작스런 황녀의 방문에 당황한 제시카와 안젤리카는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나는 가게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방음 마법을 발동시키는 것과 함께 황녀를 안쪽으로 안내하는 길에 작게 속삭였다.

"대체 왜 지금 찾아오신겁니까. 분명 제가 나중에 찾아간다고 했을텐데요."

쓸데없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탓에 예민해진 내가 이를 악물고 물었지만 에디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래, 귀한 분이시라서 서서는 이야기를 못하겠다 이거지?

"...죄송한데 제시카 씨, 안젤리카 씨. 잠깐만 다녀오겠습니다."

선객이 있는데도 나중에 온 손님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것은 실례였지만, 그 사람이 황족일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두 사람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황녀를 내 방으로 데리고갔다.

당장 가게 밖의 사람들이 무슨 근거 없는 추측들을 쏟아낼지 상상하면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내 방에 놓여있던 작은 탁자에 에디스와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울화통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한 번 이야기나 들어보자는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그래. 제 말을 무시하시면서까지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저도 원래는 당신을 기다릴 생각이었어요."

그녀의 말에 머리에 끓어올랐던 열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 말은 그녀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일이 생겼다는 뜻일테니까.

"다른 문제라도 있으셨습니까?"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찾아간지 이제 반나절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게 큰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 모르겠어요."

"예?"

"어떻게 바뀌어야할지 모르겠다고요!"

순간 내가 잘못들은건가 싶어 되묻자 황녀는 가지런히 모으고 있던 손으로 주먹을 꽉 지며 발끈했다.

"저는 지크처럼 말주변이 좋은것도, 사교적인 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사람들을 상대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잠시 발끈한 에디스였지만 금세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의기소침해졌다. 한 마디로 바뀌기로 결심은 했는데, 어떻게 바뀌어야할지 몰라서 고민이라는 소리였다.

"...일단 이해는 했습니다."

내가 우려했던 일들 중 하나기는 했다. 아무리 봐도 에디스가 황자처럼 사람들을 상대로 능숙하게 대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내가 다시 찾아가기도 전에 스스로 변하려고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칭찬을 해줘도 될 것 같다.

적어도 나한테만 기대지 않고 스스로도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였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다짜고짜 나를 찾아오면 나는 어쩌란 말인가. 물론 바뀌고자 마음먹자마자 벽에 부딪쳐서 초조한 에디스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화나는건 어쩔 수 없네.'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황녀에게 반드시 이번 일에 대가를 받아내겠다고 생각하며 우선은 지금의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굳이 무리해서 스스로를 바꾸려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황녀님에 대한 소문은 영지에 잔뜩 퍼졌으니 이제와서 황자님을 흉내내면 역효과가 날 뿐이니까요."

에디스에게는 그녀 나름의 접근 방식이 필요했다.

"우선 황자님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가게에 따라 들어가고, 음식점이라면 음식을 주문해 드시고, 도구점이라면 아무 물건이나 마음에 드시는걸로 하나씩 구매해서 나오시면 됩니다."

"...정말 그게 다에요?"

"지금은 그 정도로 충분합니다. 지금 에디스님에게 필요한 것은 주민들에게 미움받지 않는 겁니다. 과욕 부리지 마시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적응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십시오. 저야 에디스님을 한 달 정도 밖에 보지 않겠지만, 에디스님은 몇 달 동안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시며 곳곳의 백성들을 만나실게 아닙니까?"

이곳에서 떠난다고 능사가 아니다. 에디스는 앞으로도 반 년도 더 되는 시간 동안 순례를 돌게 될 것이다.

지금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생활 방식을 이해해두면 나중에도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내 설득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정말로 이상한 소문이 퍼질 것 같았기에 나는 서둘러 방을 나왔다.

여전히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고, 제시카와 안젤리카 역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던 도중 나는 괜찮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황녀에게도, 모험가 자매들에게도 윈윈인 괜찮은 거래가 말이다.

"제시카 씨, 안젤리카 씨. 시간 괜찮으시다면 황녀님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들려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예?!"

무척 당황하는 제시카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와 에디스를 곁눈질하고, 안젤리카 역시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는지 조금 굳어 있었다.

평소에 귀족이나 황족을 볼 일이 없었던 두 사람은 자신들이 혹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 부분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조금 망설였다.

물론 맨입으로 이런 일을 부탁할 생각은 없었다. 창 밖으로는 보이지 않도록 재킷 안쪽 주머니에 넣어뒀던 마나 영약을 꺼냈다.

안젤리카는 보자마자 이 영약의 가치를 깨달았는지 눈을 크게 떴다. 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만 짓고있던 안젤리카의 저런 반응은 조금 신기했다.

"답례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이걸 드리겠습니다. 안젤리카 씨에게는 꽤나 큰 도움이 될겁니다."

이걸 돈 주고 사려면 그녀들이 반 년은 꼬박 모험을 하며 착실히 돈을 모아야 할 정도의 값어치였기에 거부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시카는 언니에게 큰 도움이 될거라는 말에 망설임 없이 수락했고, 안젤리카는 영약을 본 마법사들이 으레 그렇듯이 홀린 것처럼 고개를 반복해서 끄덕거렸다.

황녀에게는 따로 설명을 해주었다.

지금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곳에서 그녀가 평범한 모험가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경청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첫 날의 그런 행동을 단순히 낯가림이 심하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덮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다른 남자 모험가들처럼 지나치게 들이대는 것도 아니었고, 같은 여성이라는 동질감 덕분인지 에디스는 큰 거부감없이 제시카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제시카는 황녀와 대화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는지 처음에는 몇 번이나 말을 더듬고, 횡설수설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평소 내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적당히 자신의 모험담을 부풀려서 자랑했다.

"처음 고블린 부락을 발견했을 때, 저희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어요. 철제 장비로 무장한 고블린들이 수백마리나 뭉쳐 있었거든요!"

나중에는 꽤나 신이 났는지 손짓으로 검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며 고블린 부락에서 있었던 일을 재현해서 보여주기도 했다.

"그때 제가 검을 이렇게! 휘두르면서 고블린 샤먼을 두동강 내버린거죠!"

안젤리카는 중간중간 간단한 마법들을 보여주며 상황을 설명하는 것을 도왔다.

황녀 역시 모험가들에게 이런 현실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인지 중간중간 입을 작게 벌려 감탄하며 제시카의 모험담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세 사람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나는 이미 식어버린 차를 대신해서 새로운 차를 끓여왔다.

손님이 황녀인만큼 평소에 쓰는 찻잎이 아닌 지난번에 마리안에게 선물받았던 교회의 찻잎을 썼다. 깊이 우러난 차에서 풍겨오는 그윽한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온 몸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우와...이건 향이 진짜..."

차를 잘 마시지 않는 제시카조차도 단숨에 눈치를 챌 정도로 향기로운 차였다.

나름 황궁 안에서 고급 차들을 여러번 마셔본 적이 있는 에디스도 꽤나 놀란 기색이었다.

"향이... 대단하네요."

"차라도 한 잔 하시면서 마저 이야기 하시지요."

본래 차에는 다과가 빠질 수 없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가게에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딱히 신경쓰지 않는지 차의 풍미를 즐기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제시카와 안젤리카는 에디스가 먼저 차를 마시기를 기다렸고, 에디스는 황궁의 예절방식으로 우아하게 찻잔을 들고 차를 마셨다.

그녀가 찻잔을 입가에서 뗄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우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이런 찻잎은 대체 어디서 구해온거죠?"

에디스의 살짝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 입맛에 안 맞으십니까?"

내 걱정스런 질문에 에디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황가에서 취급하는 찻잎보다도 훨씬 향기로워서 놀란 것 뿐이에요."

자그마치 황녀가 보증한 차인만큼 안젤리카와 제시카의 시선도 바뀌었다. 황족도 쉽사리 마시기 힘든 고급품을 그녀들이 살면서 언제 또 마셔보겠는가.

제시카는 다시 한 번 차의 향기를 맡더니 호호 불어 마시기 시작했고, 안젤리카 역시 내쪽을 곁눈질하면서 차를 홀짝거렸다.

실제로도 몸에 좋은 효과가 있으니 내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몸이 개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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