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차까지 더해지니 이야기꽃은 더욱 활발하게 피었다.
어느새 창 밖의 사람들을 의식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우리 네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하던 도중 에디스가 갑자기 허탈한 표정을 짓고 한숨을 내쉬자 제시카가 그런 에디스에게 한숨을 쉬는 이유를 물었다.
"왜 그러세요. 황녀님? 혹시 속이 안 좋으세요?"
"...아니에요. 그냥 제가 이십년동안 살아온 황궁에서는 한 번도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한 적이 없는데, 오늘 처음보는 여러분들한테 이렇게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다는게 슬퍼서요."
황궁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파벌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친구 한 명 없었던 에디스였기에 자기 또래의 여자들과 수다를 떠는 것이 처음이었다.
에디스는 스스로를 소심하고 사교성이 부족하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녀가 타고난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 그저 그녀를 둘러싼 환경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 뿐이지.
제시카와 안젤리카와의 대화는 에디스에게 내 상상보다 큰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주민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 뿐만 아니라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는 법까지 터득할 수 있었다.
멀리서 본다면 이 세 사람이 친구 같이 보일 정도로 위화감이 없었으니 말 다 했다.
꺄르륵거리며 웃어대는 세 사람을 흐뭇하게 쳐다보던 나는 슬슬 날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손뼉을 쳐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어차피 아직 시간은 한 달 가까이 남아있으니 또 얼굴을 볼 일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자자, 슬슬 저녁 시간이니 다들 돌아가셔야죠. 특히 황녀님은 오늘 나이트 울프 길드와의 선약이 있으시다면서요?"
"...저 하나 빠진다고 딱히 별 문제는..."
에디스는 가고 싶지 않은지 그렇게 싫은 소리를 해댔지만 그건 곤란했다.
대부분이 수인족들로 이루어진 나이트 울프 길드와의 약속을 잡고, 빠진다?
어쩌면 인간이 수인족을 깔본다고 여겨질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황자가 있긴 하지만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를 혼자 내보냈다고 더 화를 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듣자하니 나이트 울프 길드와의 만찬 역시 6황자가 바스티안 가주에게 부탁해서 잡은 것이라고 했으니 그런 자리에 빠지는 것은 상대에 대한 큰 결례였다.
"안 됩니다. 가서 아무 말도 안하셔도 되니 자리라도 지키십시오. 이런 티 타임은 언제든지 즐길 수 있으니까요."
제시카가 그런 내 옆에 붙어서 맞장구쳤다.
"맞아요! 저희는 모험가라서 딱히 정해진 업무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언제든지 연락 주셔도 되요!"
"...황녀님을 뵐 수 있다면 오히려 저희가 영광이죠."
말수가 적은 안젤리카마저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에디스는 그제서야 경직되어 있던 표정을 풀고는 미소지었다.
"...다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는 황녀의 눈가에는 옅은 물기가 남아있었다. 서랍에 넣어뒀던 손수건을 한장 꺼내 슬쩍 내밀자 그녀는 내게 감사를 표하며 눈가를 닦았다.
다행스럽게도 창 밖에 서 있던 사람들은 몇 시간 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모두 사라져 있었기에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는 사람은 없었다.
가게 앞에는 여전히 묵묵히 가게 앞을 지키는 기사들과 울상을 짓고있는 아이린 뿐이었다.
'...응?'
그제서야 나는 방금 전 아이린에게 심부름을 시켰던 것을 떠올렸다.
아이린을 보낸 직후, 황녀가 찾아오는 바람에 잊어먹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가게 앞의 기사들 때문에 한참동안이나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린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머뭇거리며 이쪽으로 간절한 시선을 보내는게 꼭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았다.
"...손수건 고마워요. 나중에 깨끗하게 씻어서 돌려드릴게요."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리 값어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천으로 만든 평범한 손수건일 뿐이었다. 내 말에도 황녀는 손수건을 곱게 접어서 챙겼다.
간략한 인사가 끝나고 에디스가 먼저 자리를 뜨자 가게 앞을 지키고 있던 황실 기사들 역시 그녀를 따라갔다. 동시에 가게 밖을 서성거리며 기사들이 비키기만을 기다리던 아이린이 뛰어들어왔다.
그제서야 제시카와 안젤리카도 아이린의 존재를 떠올렸다.
아이린은 몇 시간이 넘게 가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소외된 것이 서러웠는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울먹거렸고, 나는 그런 아이린을 꼬옥 끌어안고 작게 등을 토닥여주었다.
미리 신경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아이린은 연신 울음기 어린 목소리로도 괜찮다고 대답했다. 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지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으려고 하다보니 목이 메이기도 했다.
이렇게 착한 아이를 까먹고 그렇게 방치하다니. 나란 놈은 정말...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헐떡거리던 숨을 고르는 아이린은 조금 진정됐는지 훌쩍이는 소리만을 냈다.
나는 우선 아이린에게 방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아이린을 더 달래주고 싶지만, 제시카와 안젤리카가 여전히 남아있었으니까.
"...죄송합니다. 못 볼 꼴을 보였군요."
"아, 아니에요. 저희도 솔직히 아이린을 까먹고 있었고... 그렇게 따지면 저희도 할 말이 없는걸요."
제시카의 대답에 안젤리카도 고개를 숙였다. 가라앉은 공기가 방을 채우려는 순간, 나는 품에 넣어뒀던 마나 영약을 안젤리카에게 주었다.
은은한 푸른빛을 띄고 있는 영약은 보는 것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두 분을 믿고 있지만, 기왕이면 여기서 복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겠습니까?"
혹시나 저런 물건이 내 가게에서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퍼지면 곤란하니 이 자리에서 복용하는 모습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영약을 몸으로 흡수하는 과정에서 안젤리카가 위험에 처한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었고.
안젤리카는 내게 받은 마나 영약을 양 손에 모아서 빤히 쳐다보다가 단숨에 입 안에 털어넣었다. 그녀의 목울대가 살짝 움직이며 '꿀꺽'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영약을 복용하고도 아무런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뭔가 대단한 것을 상상했는지 제시카가 김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이게 다에요?"
마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제시카의 투덜거림에 나는 피식 웃으며 설명해주었다.
"이게 무슨 마법도 아니고, 마나 그릇의 크기를 넓히고 몸 속의 노폐물을 걸러주는 용도니까 당연하죠. 당분간 마법을 꾸준히 반복해서 연습하시고 목욕도 자주 하세요.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확실히 체감이 되실겁니다."
"...지금도 마나 그릇이 성장한게 느껴져요. 마치 막혀있던 벽을 하나 깬 것 같은 기분이에요."
안젤리카는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방금 전 막 절정에 이른 여자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얼굴을 붉혔다. 그 표정이 상당히 요염해서 나도 모르게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을 정도였다.
마치 절정에 이른 색녀가 더 큰 쾌락을 쫓는 것처럼 유혹하는 시선에 나는 눈길을 돌렸다.
다행스럽게도 안젤리카는 조금 후에 평정을 되찾았고, 몇 번이나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돌아갔다. 이걸로 그녀 역시 B랭크로 당당하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들을 보면 내가 모험가로 활동할 때의 모습이 떠올라 어쩐지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녀들을 보낸 뒤에는 착잡한 마음으로 방으로 돌아갔다. 아이린은 붉어진 눈시울을 닦고 침대에 걸터 앉아 있었다.
"...아. 주인님."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나를 부르며 달려오는 아이린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다시 사과하기도 전에 아이린은 고개를 저으며 나를 열심히 옹호했다.
"주인님 잘못이 아니에요! 기사님들이 입구를 막고 있었고... 제가 별 것도 아닌일로...울어버려서..."
오히려 별 것도 아닌 일로 울었던 자신의 잘못이라며 내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는 아이린의 말에 나는 더욱 가슴이 아파왔다.
평범한 아이들이었다면 몇 시간 동안이나 밖에서 서서 기다렸던 것을 솔직하게 투정부리며 화를 냈을텐데 아이린은 오히려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관계 없이 아이린이 울었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게 했다.
늘 어른스러운 모습만을 보이던 아이린이 서럽게 울어대는 모습은 보는 내 가슴을 찢어놓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살짝 풀린 아이린의 머리를 정돈해주었다. 가까이서보니 아이린의 눈가는 살짝 부어있었고, 눈 역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 내 입장을 이해해줄 필요는 없단다. 너는 아직 어린아이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보다는 이해받아야 하니까. 솔직하게 네가 느꼈던 것을 솔직하게 말해주렴."
아이린을 꼬옥 끌어안으며 그렇게 속삭이자 그제서야 아이린은 진심을 털어놓았다.
아니, 진심이라고 하기보단 숨기려 했던 감정을 털어놓았다고 해야할까.
"...사실은, 조금 무서웠어요. 무서운 기사 아저씨들이 가게 입구를 막고 있어서 들어가지 못하니까..."
아이린은 아직 감정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는지 훌쩍거렸다. 나는 그런 아이린이 진정할 수 있도록 가볍게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렇게 창문 너머로 주인님이랑 다른 '여자'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니까 너무 자연스러워서... 왠지 저만 소외된 기분이 드는 바람에..."
내가 다른'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본 아이린은 자신이 정말로 이 곳에 있어도 되는지 고민했다고한다.
몇 시간동안 창 밖에서 서 있다보니 마치 나에게 버림받은 것만 같아서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고.
아무래도 '노예' 취급을 받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린이라 그런지 내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게 오늘 터진 것 같았다.
내게 의존하는 것이 마냥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의존한다는 것은 적어도 나를 그만큼 믿고있다는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오직 나만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특히 아이린은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다른 여자들과 이야기 할때는 눈을 날카롭게 뜨고는 상대방을 노려보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들킨적은 없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이린의 그런 행동들은 뒤늦게 받은 사랑에 대한 비틀린 독점욕이라고 생각됐다.
내게 이성적인 감정을 품을리는 없으니 아마 부성애가 그런 방향으로 표출된 것이리라.
보통 자식은 자신의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테니까.
내가 밖에 나갔다 올때마다 방에서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내게 하루종일 붙어 있으려 하는 것은 이미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쓰레기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부분을 속으로는 은근히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없이는 그녀가 살아갈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저열한 만족감을 나는 분명히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린의 지독한 집착과 의존 성향에 대해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반쯤 방치하고 있었다. 아이린이 내게 집착하면, 나중에 커서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걸까.
'한심한 놈.'
그렇게까지 저 애를 잡아두고 싶은 거냐고 속으로 자조하며 조금 가라앉은 아이린의 뺨을 어루만졌다.
손등으로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을 닦아주자 아이린은 젖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미안하다. 대신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라면 뭐든지 하나 들어주마. 갖고 싶은거나 먹고 싶은건 없니?"
아이린의 상처를 고작해야 이런걸로 덮으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물질적으로라도 사과를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