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4/260)

"...뭐든...지요?"

아이린이 내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그렇게 되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아이린은 내게 뭔가를 갖고 싶다거나 하고 싶다는 것을 표현한 적이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다행히도 소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마."

"그럼...저기..."

말하기 부끄러운 소원인지 아이린은 우물쭈물거리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대체 어떤 부탁이길래 저러는 것일까.

게다가 방금 전에 울고 있어서 창백하게 비치던 뺨이 홍조를 띠는걸 보니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아이린은 고민고민하다가 결국 자신의 솔직한 소원을 고백했다.

"주인님이랑 떨어질 때마다... 뽀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

잠깐만. 내 귀가 이상한게 아니라면 방금 아이린이 분명 '뽀뽀'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이린의 잔뜩 붉어진 표정과 '정말로 말해버렸어!' 같은 소리를하며 부끄러워하는 태도를 보니 내가 잘못들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뽀뽀. 다른 말로는 입맞춤이라고도 한다.

보통 어린아이한테 하는 것으로 이마나 볼에 입을 가볍게 맞춰주는 행위를 말한다.

뽀뽀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떠올리던 나는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서큐버스인 아이린이 '이런 종류'의 부탁을 한다는 것은 의미가 달랐기 때문이다.

"주인님이 외출하실 때나, 제가 심부름 갔다올때 잘갔다 오라고 뽀뽀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헤헤..."

배시시 웃는 아이린은 평소와 다름없는 순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집에서는 흔하게 하는 행위기는 하다.

애들이 놀러갈 때 어머니들이 아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는 것은 보기 드물지 않았으니까.

다만 문제가 있다면 아이린은 또래 애들보다도 조숙한 몸과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때까지 나는 아이린을 지켜야할 아이로밖에 보지 않았다. 아이린의 나이는 이제 막 열세 살이었다.

그에 반하면 내 나이는 서른 하나.

내 인생의 절반도 채 살지 않은 아이린을 상대로 욕정을 품을 정도로 굶주리지는 않았고, 당연히 아이린도 나같은 아저씨를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이제 막 열세 살이 된 여자애가 서른 넘은 아저씨를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은 수도에 돌아다니는 삼류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였다.

아마 그조차도 법에 저촉되는 유해매체로 지정되겠지.

"...역시, 안 되나요...?"

내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아이린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울상을 짓고 있었고,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야 물론 상관없지. 그런데 아이린 너는 고작 이런걸로 충분하니?"

차라리 엘릭서를 한 병 달라고 하거나, 금화를 잔뜩 달라고 했다면 얼마든지 들어줬을텐데 고작해야 뽀뽀라니. 소박하면서도 독특한 소원이었다.

나는 혹시나 아이린이 말을 바꾸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이린은 전에 본 적 없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해요. 주인님. 사실 다른 애들이랑 놀러 갈 때마다 걔네 부모님이 해주시는걸 보고 부럽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뽀뽀를 해달라고 한거엿나.

키스도 아니고 뽀뽀 정도야 별 문제는 아니었다.

실제로 아이린이 자고 있을 때 몇 번인가 이마에 가볍게 뽀뽀를 해준적도 있었으니까.

문제는 막상 그녀의 이마나 볼에 입을 맞춘다고 생각하니 입이 쉽사리 움직이질 않았다.

의식하기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것들이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되게 부끄러운 행위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반면 아이린은 내가 뽀뽀를 해주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고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서보니 아이린의 눈부신 외모가 더욱 돋보였다. 방금 전까지 울어서 촉촉하게 젖은 속눈썹과 눈물 자국이 남아있는 뺨은 보호 욕구를 자극 시키기에 충분했다.

어째서 입술을 오므린 채 내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이린의 목덜미를 팔로 감으며 그녀의 이마에 내 입술을 가져다댔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자 '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를 끌어안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아이린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순간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에 나도 모르게 흥분할 뻔 했다는 사실이 자괴감 들었다.

다행히 아이린은 아무것도 모르는지 내가 입을 맞춘 이마를 연신 매만지며 웃고 있었다. 그래도 저렇게 좋아해주니 다행이었다.

마냥 어린 딸처럼 생각해왔던 아이린에 대한 이미지도 조금은 바뀌긴 했지만, 적어도 아직까진 괜찮은 것 같았다.

'키스나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은게 어디냐.'

아직 순진한 어린아이답게 뽀뽀같은걸 요구하는걸 보면 아이린은 여전히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되게 좋아하는 아이린의 모습을보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아이린이 붉어진 얼굴로 막 떠올랐다는듯이 덧붙였다.

"아...주인님. 사실 저... 속옷이 이제 좀 작아져서... 같이 새로운걸 사러 가주실 수...있을까요?"

자연스레 내 시선은 아이린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불과 몇 달 전에만 해도 평평하기 그지 없던 그곳에 야트막한 봉우리가 솟아올라 있었다.

전에 살 때는 분명 또래 애들이 착용하는 어린아이용 속옷을 샀던 것 같은데 저 정도면 성인용 속옷을 사는게 맞아 보였다.

문득 지난번에 꿈에 나왔던 아이린의 '본능'이라는 녀석의 육덕진 몸매와 야시시한 옷차림이 떠올랐다.

지난번에 아이린의 속옷을 함께 사러갔을때는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었는데, 어쩌면 이번에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x x x

에디스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 앞에 놓여있는 스테이크를 썰었다.

수인족이라는 종족은 바스티안 영지에 내려와서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지만 방을 가득 채우는 각양각색의 수인족을 보고는 솔직히 조금 질릴 수 밖에 없었다.

고양이, 개, 여우, 사슴 등 온갖 짐승의 것으로 보이는 귀와 꼬리를 달고있는 이들까지. 그런 이들이 방 안을 넓게 둘러싸며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은 한 쌍의 남녀였다. 조금은 작은 체구의 수인족 여자애와 온 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잔뜩 나 있는 남자.

아마 저 남자가 나이트 울프의 길드 마스터겠지.

수많은 수인족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쳐다보고 있는 상황에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황녀였지만 오늘 낮에 루디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꾹 참았다.

그래도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마음이 진정됐다.

살면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수다를 떨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황녀라서 불편했을 법도 한데 그 모험가 자매들은 얼마든지 자신을 불러도 된다며 이야기까지 해줬다.

'친구...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황궁에 있을 때는 그 흔한 친구 한 명 없던 에디스였기에 더욱 각별한 단어였다.

그렇게 모험가 자매에 대해 생각하던 에디스는 또 다른 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루디. 처음 자신의 방에 쳐들어왔을 때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그의 가게에 직접 찾아갔던 에디스는 그를 조금 더 믿어보기로 결론을 내렸다.

황가에서 취급하는 차보다도 고급품의 차를 아무렇지 않게 내놓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자신을 위한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제시카와 안젤리카라는 친구를 사귈 수 있었던 것도 그 남자의 덕이었으니까.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찌됐든 자신은 제국의 황녀이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황녀와 황자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꽤나 실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일개 연금술사에 불과한 그가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대를 할수록 배신감만 커진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익힌 그녀였다.

'그래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해.'

이전에는 삶의 하루하루가 지옥같았다. 어디에든 편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가 없었고, 그 어떤 산해진미를 맛봐도 즐겁기는 커녕 입맛만 떨어졌다.

하지만 오늘 루디의 가게에서 가졌던 티 타임은 정말로 편안하고 즐겁게 즐길 수 있었다.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살아갈 의미로는 충분했다.

평범한 소녀처럼 또래 아이들과 수다를 떨고, 차를 마시며, 다과를 먹는 순간을 꿈꿔왔던 그녀였기에 특히나 그랬다.

황궁의 티타임은 훨씬 성대하게 열렸지만 그야말로 정치의 연장선상에 불과했기에 그녀의 취향은 결단코 아니었다.

또 다시 그들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수인족들의 시선 때문에 덜덜 떨리던 손이 오히려 경쾌한 손놀림으로 스테이크를 썰었다.

에디스가 그런 상념에 빠져 있는 와중에도 옆에서는 정치적인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없는 에디스와 달리 황자인 지크는 이번 일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바스티안 가주의 협력은 사실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황실기사단의 출신이었던만큼 어느 상황이든 황실에 대한 충성만을 바칠 뿐, 파벌 싸움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미 수도에서도 조사가 끝난 상황이었다.

나이트 울프(Night Wolf). 어느 순간 나타나 수인족들을 규합해 만들어진 용병 길드로 길드원의 절반 이상이 수인족이라는 보기 드문 비율을 가지고 있는 길드였다.

수인족들은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신체능력이 우수한만큼 B랭크 이상의 모험가도 다수 있으며 단장과 부단장은 A랭크 모험가라고 했다.

B랭크와 달리 A랭크부터는 일개 기사단급 전력이라 봐도 무방했다. 난전이나 기습에서는 오히려 기사들보다도 훨씬 강한 위력을 드러내기도 했으니까.

수도에 위치해 있는 다른 길드나 용병단들은 자신이 아무리 많은 이권을 준다 하더라도 자신의 파벌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수도는 다른 황자들의 텃밭과 다름없는 곳이었으니까.

오히려 다른 길드들과 접촉하려 했다는 사실을 입수한 그들에게 집중적으로 견제를 받게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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