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문에 인간들의 정세에 어둡고, 자신이 포섭할 수 있는 최선의 카드인 나이트 울프를 자신의 파벌에 포함시키려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제 파벌에 들어오면 이런 것들을 보장해줄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이야기해 주세요."
그렇게 후일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면 수인족에 대한 인권 상향과 나이트 울프를 황실 전담 길드로 지정하겠다는 파격적이고도 전례없는 조건을 내밀었다.
사실 이 정도로 A랭크 길드를 먹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날로 먹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수인족이라는 강대한 전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공수표는 얼마든지 던질 수 있었다.
지크의 맞은편에 앉은 채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묵묵히 썰고 있던 수인족 남자가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거구의 남자가 달그락거리던 나이프를 내려놓자 황자는 침을 삼켰다.
나이트 울프를 이끄는 길드 마스터에 대한 소문은 여러가지가 있었다.
오우거와 맨손으로 싸움을 벌여서 이겼다는 말도 있고, 바질리스크를 단신으로 토벌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있었다.
수하를 시켜 정보를 입수한 황자는 이런 자료들을 읽고는 코웃음을 쳤지만 어쩌면 그 정보들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야수를 연상시키는 모습에 숨이 막혔다. 완전히 압도된 분위기에서 남자는 꾹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우리 길드는 인간들의 정치에 관여할 생각이 없다. 다른 곳을 알아보도록."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치 거대한 호랑이 앞에 놓인 기분이 든 황자는 눈 앞의 남자가 황족인 자신에게 반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 혼이 나간것처럼 자리에 다시 털썩 주저 앉은 황자의 모습에 에디스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그와 눈까지 마주친 지크는 대체 어떤 감각이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조용히 이 자리를 빠져나가기 위해 묵묵히 접시를 비우던 에디스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토끼 귀의 소녀가 그에게 타박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이지! 일단은 상대도 황족이니까 예의를 갖추라고 말했잖아요!"
"...이런 일은 확실히 거절해두는 편이 좋다. 우리 동족들을 인간들의 장기말로 만들 수는 없으니."
토끼 귀 소녀의 타박에도 남자는 덤덤히 대답했다.
"에휴. 그건 그렇지만 '언령'까지 사용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언령이라는 말을 들은 에디스는 그제서야 어릴때 황실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의 한부분이 떠올랐다.
[수인족들 중에서도 그 피를 짙게 물려받은 존재는 자신의 기운을 말에 담는 '언령'이 사용 가능하다. 종족에 따라 다르지만 이 언령은 상대에게 강한 위압을 주거나 경직시키는 효과가 있다. 비슷한 예로는 드래곤과 인간의 혼혈인 드래고니안의 언령이 있는데......]
자신이 기억하는 정보가 사실이라면 저 남자는 요즘 수인족들 중에서도 몇 없다는 '순혈'에 가장 가까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황궁에서 지내며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기사들을 여럿봤지만 저런 패도적인 기세를 겪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에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차피 저들은 자신에게는 관심도 없으니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얼굴이 퍼렇게 질려있는 지크를 데리고 자리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에디스의 상상을 산산조각내는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황녀...님에게도 물어볼게 하나 있는데."
토끼 귀 소녀의 훈계를 한 귀로 듣고 흘리고 있던 남자가 자신을 지목한 것이었다.
남자는 이번에도 반말을 하려했지만 옆에 앉은 토끼 귀 소녀가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자 그제서야 존칭을 붙였다.
분명 그의 눈에 띌만한 짓은 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자신을 지목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에디스였지만 어떻게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뭘 물어보려고요?"
"오늘 혼자서 포션 가게를 찾아갔다고 들었는데 그곳에서 별 일은 없었나?"
설마하니 루디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서 나올 줄은 몰랐다.
혹시 나이트 울프 역시 지크와 마찬가지로 루디를 영입하기 위해서 자신을 견제하는 것일까?
"왜 그런걸 물어보는 거죠?"
최대한 긴장한 티를 내지 않도록 차갑게 대꾸한 에디스는 속으로 사실 무척 초조해하고 있었다.
만약 나이트 울프에서 자신에게 루디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마저 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은 제국의 황녀니 고작해야 일개 길드 마스터가 자신의 행동을 제약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앞으로 한달 동안 머무를 영지의 전속 길드 마스터의 말을 무시하는 것 역시 꺼림찍한 일이었다. 특히 눈 앞의 남자가 풍기는 압박감이 온 몸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고민에 빠진 에디스였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얼버무리며 에디스의 호기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건 그분이랑...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괜한 이야기를 했군."
에디스는 그의 태도에서 루디를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족인 자신과 지크에게도 반말을 하는데 루디를 '그분'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봤을 때 루디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루디 씨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는데?'
당장 자신이 가게에서 오늘 저녁 만찬에 참여하기 싫다고 할 때만 해도 나이트 울프 길드가 자신에게 무시받았다고 분노할 수도 있다며 가는게 좋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만약 루디가 눈 앞의 남자와 잘 아는 사이였다면 굳이 그런말을 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루디만 모르는 일방적인 관계인지도 모른다. 나중에 다시 가게에 찾아가면 꼭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한 에디스였다.
그날 저녁 만찬은 그 자리에서 끝이났다.
여전히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비틀거리는 지크의 모습을 본 황실 기사단은 에디스에게 안에서 무슨일이 있었던 것이냐고 물었지만 에디스는 지크가 조금 피곤해서 그런 것 같다며 둘러댔다.
지크 역시도 일을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지 그런 에디스의 설명에 동조했고, 결국 황실 기사단은 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x x x
아이린과 함께 속옷 가게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불과 한 달 전에 찾아와서 속옷을 구매했었는데 더 큰 사이즈의 속옷을 사러 찾아오자 종업원은 깜짝 놀랐다.
때문에 아이린을 데려가 다시 가슴과 허리길이를 재고 새로운 속옷을 맞췄다.
아이린이 지난번처럼 내가 원하는 것으로 사겠다고 할까봐 이번에는 내가 먼저 종업원에게 괜찮은 세트로 몇 개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다행히 종업원이 추천해준 속옷은 무난한 것들이었고, 나는 망설임없이 구매했다. 기왕 외출한 김에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고 돌아 가기로 했다.
근처에 있던 음식점에 들어가 오랜만에 외식을 즐기고 돌아왔다.
집에 도착한 다음에는 아이린의 마법 훈련을 조금 도와주었다.
매일매일 한 시간씩은 마법 훈련을 하는 아이린이었기에 어느새 견습 마법사 티 정도는 벗을 수 있게 되었다.
기본적인 4대 원소 마법뿐만 아니라 가벼운 일상 생활 마법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아이린이 작게 중얼거린 영창과 함께 생겨난 날카로운 얼음 화살들이 생겼다가 내가 손을 한 번 젓자 화살들은 그대로 사라졌다.
최근에는 호신용으로도 사용하기 적합한 마법도 몇 가지 가르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종족이 서큐버스라 그런지 원소 마법보다는 정신 계열 마법의 습득이 더욱 빨랐다.
한 번 시험삼아 정신 조종 마법을 사용하도록 가르쳐봤는데 마치 자기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법을 사용했다.
물론 정신 조종을 유지하는데는 좀 더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빠르게 성장하는 아이린이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정신 계열 마법을 사용할때마다 아이린의 마나가 불규칙적으로 일렁인다는 것이었다.
원소 마법을 사용할 때는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아마 이게 아이린의 본능과 관련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매료나 세뇌와 같은 정신 오염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그녀의 본능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결국 나는 당분간 아이린에게 정신 계열 마법을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고 원소 마법을 가르치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트라다 쿠스만의 저택에는 서큐버스에 대해 연구한 서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지난번 몬스터 대백과에 서큐버스는 없었지만 다른 서적에 성인식에 대한 정보가 남아있을 수도 있다.
호문쿨루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서큐버스와 같은 인간형 몬스터에 대한 정보가 필요할 수 밖에 없으니까.
물론 그 전에는 에디스의 일부터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간동안 그녀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델론즈 녀석과 다르게 그들과는 연락할 수단이 없었기에 직접 찾아다니는 수 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수도에 찾아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몸이 뻐근했다.
내게 복수하는 것을 꿈꾸며 이를 가는 놈들도 있고, 오랜만에 보는 나를 반겨주는 이들도 있을 터였다. 어쩌면 나를 잊은 사람들도 있겠지.
이런 식으로 다시 수도에 찾아가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는데. 역시 삶이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아이린이 훈련하는 옆에 앉아 수첩을 꺼내 이번에 수도에 올라가서 만날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수첩 한 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이름들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보면 수도에서 머무를 때는 내 주변에 사람이 무척 많았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내게 다른 의도를 가지고 다가온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그들을 딱히 신경쓰지 않았었다.
결국 마지막에 내 곁에 남아있는 것은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들 뿐이었다.
말수도 적고, 재미도 없는 나같은 놈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붙어다녔던지.
그들은 내가 도망치듯이 모험가 일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도 내 선택을 존중해주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좋아했던 것이다. 그냥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기에, 마치 지금 내 곁에 있는 아이린처럼 말이다.
내 시선을 느낀 아이린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는 아무 말 없이 웃어주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린은 부끄러웠는지 홍조를 띠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얼굴에 오른 열을 식히기 위해 얼음 마법을 난사하는 아이린의 모습에 나는 동료들에게도 아이린을 소개시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녀석들은 늘 내가 홀로 지내는 것을 걱정했으니까.
함께 사는게 열세 살짜리 여자아이라는 것은 당당히 말하기엔 그랬지만 녀석들은 딱히 종족이나 나이를 따지지 않으니 괜찮을 것이다.
사람을 만나는걸 기대하는게 대체 얼마만인지.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좋은 고양감이었다.
"아이린. 조만간 수도에 갔다오게 될 수도 있단다."
"... 주인님 혼자서요?"
갑자기 우울해진 아이린의 목소리에 나는 작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