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146/260)

"그럴리가. 아이린 너도 함께 가는거다. 대신 수도를 구경하고 다닐 시간은 별로 없어서 재미는 없을거야. 그래도 괜찮니?"

"네! 주인님과 함께라면 어디라도 좋아요!"

하여간 사랑스러운 말만 골라서 하는 녀석이었다. 해맑게 웃으며 그런 소리를 해대는 아이린의 뺨을 살짝 꼬집으며 장난을쳤다.

아이린에게는 미리 말해두긴 했지만 사실 당장 수도에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장 내일 가게 문을 닫고 갔다간 늘 내게서 포션을 구매하던 모험가들도 곤란할테니까.

내일 찾아오는 모험가들에게 적당히 덤이라도 얹어주며 며칠간 쉴 것이라는 이야기를 다른 모험가들에게도 전해달라 해야겠다.

어차피 이런 좁은 영지 안에서는 모험가들이 한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수첩에 적었던 이름들 중 이번 황녀를 돕는 일에 꼭 필요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름을 지워나갔다.

게다가 쉽사리 만나기 힘든 사람들 역시 지웠다. 현상금 사냥꾼으로 활동할 때 만났던 '선배들'은 한 번 만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니 다음 기회에 만나기로 미뤘다.

'대충 사흘 정도면 충분하겠지.'

사흘이면 수첩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만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물론 이야기가 순조롭게 풀린다는 가정 하에 잡을 일정이었지만 적어도 이들 중 내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거절할 사람은 없었다.

적당한 대가를 제공한다면 기꺼이 내게 호의를 베풀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쌓았던 유대를 이용해먹는 것 같아서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늘 내게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해줘.'라고 했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자 조금이나마 죄책감이 덜어졌다.

다음날 나는 예정했던대로 가게 앞에 내일부터 사흘 동안 쉰다는 종이를 붙여놓았다.

아침 일찍 포션을 사러온 모험가들이 그 문구를 보고 내게 물었다.

"어쩐 일로 사흘 씩이나 가게를 쉬는거요?"

내 가게의 단골중 한 명인 중년 모험가가 묻자 나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잠시 다른 영지에 갔다와야할 일이 생겨서요. 하하. 다른 모험가분들한테도 좀 전해주십쇼."

그리고 그가 주문한 품목에 하급 포션을 두 병 정도 서비스로 넣어주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알겠다고, 자신만 믿으라고 대답했다.

조금 고민되는 점이 있다면 에디스에게 말을 하지 못하고 간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지난번에 왔었을 때 대충 설명을 해줬으니 며칠 동안은 별 문제 없겠지.

황자를 따라다니며 백성들의 인사만 받아주더라도 이전의 안 좋은 이미지는 지울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조금 손을 써야겠지만.

그렇게 아침에 찾아온 모험가 세 명 정도에게 서비스와 함께 사흘간 가게를 비울것이란 사실을 다른 모험가들에게도 전해달라고 하니 그들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날 저녁, 내 가게에는 전례 없을 정도로 많은 모험가들이 몰려들었다.

모험을 마치고 돌아온 모험가들이 사흘 동안 가게를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헐레벌떡 포션을 구매하러 온 것이었다.

물론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기에 재고로 만들어둔 포션을 꺼내 판매했다.

나중에는 가게가 꽉 찰 정도로 손님이 몰리는 바람에 아이린이 나를 도와서 거스름돈을 거슬러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폭풍같은 시간이 흐르고, 모험가들이 모두 떠난 가게에는 적막만이 맴돌았다.

모험을 갔다오자마자 달려온 이들 때문인지 가게 바닥에는 진흙이 묻은 발자국과 모래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별 수 없이 빗자루로 먼지와 모래를 쓸어담고는 클린 마법으로 바닥을 깨끗하게 닦아냈다. 더불어 가게 안에 맴도는 희미한 피냄새도 깨끗하게 지워냈다.

아이린은 내가 시킨대로 오늘 받은 동전들을 세며 장부와 일치하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꼼꼼하게 장부를 확인하던 아이린이 주머니에 담긴 은화와 동화들을 들고 내게 쪼르르 달려왔다.

"주인님. 장부랑 똑같은 금액이에요."

"그래. 수고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야하니 오늘은 일찍 자렴."

모험가들이 몰려오기 전에 이른 저녁을 먹어뒀다. 내일 새벽에 영지를 떠날 준비를 마친 나였기에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아이린이 어딘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자 나는 그녀의 얼굴을 양 뺨을 손으로 부드럽게 잡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이린은 그제서야 해맑게 웃으며 종종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낮에 아이린과 내 짐은 모두 싸놨으니 내일 새벽에 일어나면 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

몇 번 하고나니 이런 스킨쉽에도 적응이 됐다.

누군가와 이런 식으로 살을 맞대고, 스킨쉽을 하는 것은 가끔씩 있었던 원나잇이나 창관에 들렀을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기에 조금 생소한 기분이었다.

신기한 점은 나도 아이린의 이마나 뺨에 입을 맞출 때 정신적으로 치유받는 기분이 들었단 것이다.

그것이 아이린의 서큐버스라는 종족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내가 사람과의 접촉에 굶주려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단순한 육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닌 가슴이 따뜻해지는 스킨쉽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른 새벽. 평소보다 일찍 자서 그런지 저절로 눈이 떠졌다. 아직 해도 제대로 뜨지 않은 창 밖의 하늘이 보였다.

적당히 잠도 깰겸 욕실에가서 샤워를 했다. 몸을 씻고 목에 수건을 걸친채 나오자 타이밍 좋게 방에서 나오는 아이린과 마주쳤다.

어쩐지 이런 상황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서 욕실 안에서 옷을 입고 나오길 잘했다.

아이린에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라고 한 다음 나는 챙겨놨던 짐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빵과 음료를 넣어둔 아공간 주머니. 금화와 은화를 넉넉히 챙겨둔 봉투, 갈아입을 옷 몇 벌과 신분을 증명하는 1급 시민 증명서와 내가 예전 모험가로 활동할 때 썼던 모험가 카드, 거기에다 오랜만에 만나는 녀석들을 위해 챙겨둔 술 몇 병까지.

나중에 필요한게 있다면 수도에서 직접 구하면 되는 일이었기에 짐을 많이 챙기지는 않았다.

빼먹은 것이 없는지 짐을 확인하고나자 옷을 갈아입은 아이린이 방에서 나왔다.

평소에 입던 원피스나 치마가 아닌 반바지에 반팔 셔츠 차림이었다.

오히려 예전의 비쩍 마른 아이린보다도 훨씬 건강해진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수도에 가서는 다른 옷을 입어도 상관 없지만 가까운 공작령으로 이동할 때는 말을 타야하기에 바지를 입게했다.

아이린의 손을 잡고 가게를 나와 조금 걸어가니 성문 앞에 놓여있는 말 한 마리와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 두 명의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중 한 명은 경비대장이었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며 말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평소에 보던 덩치 큰 짐말이 아닌 조금 마른 체구의 날렵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저희가 관리하는 놈들 중에서도 좋은 놈으로 골라놨습니다. 아마 쉬지 않고 가신다면 반나절이면 도착하실 겁니다."

본래는 적당히 텔레포트로 이동할 생각이었지만 내가 다른 영지에 갔다온다는 말을 들은 앨리스가 말을 빌려주기로 했다.

말을 몇 번 탄적 없는 내가 보기에도 눈 앞의 녀석은 꽤나 명마(名馬)인 것 같았다.

녀석은 푸르륵거리며 숨을 거칠게 내쉬더니 뒷발로 땅을 툭툭 쳐댔다.

"하하. 감사합니다. 앨리스 님께도 신경써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물론입니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돌아오실 때는 저희 경비대 아무한테나 말을 넘겨주시면 됩니다."

경비대장에게 말고삐를 넘겨받은 나는 가볍게 녀석의 등 위로 올라타려다가 아이린이 말을 탈 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바닥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아이린. 내 등에 업히렴."

내 명령에 아이린은 옆에있는 병사들의 시선을 의식해 부끄러워하면서도 내 조심스레 내 목덜미를 팔로 휘감고, 다리를 내 허벅지 사이로 넣었다.

꽉 잡으라고 속삭인 나는 그대로 말의 등 위에 올라탔다. 다행스럽게도 녀석은 갑자기 등 뒤에 올라탄 내 행동에도 푸르릉거리며 얼굴을 흔들어댈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보는 사람이 타면 경계하듯이 몸을 흔들어 떨어뜨리려하는 다른 말과는 대조적인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병사들이 길을 잘 들여놓은 것 같다.

말 위에 올라탄 나는 아이린을 가뿐하게 내 뒤에 앉혔고, 아이린은 내 목을 감고 있던 팔을 허리에 둘렀다.

깍지를 낀 채 내 배를 꼬옥 끌어안고 있는 아이린의 손길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처음 타 보는 말에 대한 두려움인지 아이린은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조심스레 눈을 떴다가 꽤나 높은 자리에 놀란 것 같았다.

"내 허리만 꽉 잡고 있으면 떨어질 일 없으니 걱정 마렴."

내 말에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아이린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한 번 병사들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는 말의 옆구리를 발꿈치로 가볍게 걷어찼다. 그러자 녀석은 열려있는 성문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성문을 나서자 등 뒤로 성벽이 서서히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타 보는 말에 적응하기 위해 적당히 고삐를 잡아당기며 방향을 틀었다.

녀석은 그런 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푸르릉거리며 적당히 발을 몇 번 굴렀지만 예전 기억을 되살려 녀석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차자 얌전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징이 박힌 신발로 신고올걸 그랬나.'

다행히도 녀석은 몇 번 걷어차이자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속도가 붙자 아이린은 귀여운 비명을 질렀다.

"...꺄악!"

아무래도 아이린은 체구도 작고, 힘이 약해서 그런지 몸의 중심도 계속해서 흔들리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비틀거리는 아이린을 보니 심하면 멀미를 할지도 모를 것 같다.

몸에 가해지는 충격을 감소시키는 마법을 아이린에게 거는 것과 함께 우리가 타고 있는 말에게는 강력한 신체 강화 마법을 부여했다.

그러자 녀석은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경비대장은 반나절 정도 걸릴거라고 했지만 이 속도라면 한 시간도 안 걸릴 것 같았다.

물론 그만큼 체력을 급속도로 소모하겠지만 공작령에 도착하면 텔레포트 게이트를 사용할 것이기에 문제 없었다.

내가 이 녀석을 다시 타는건 이틀 후에 수도에서의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때니 그때까지 공작령에 있는 여관에 맡겨둘 예정이었다.

내 예상대로 가까운 공작령에 도착하는데는 한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물론 거기까지 달린 말은 완전히 탈진해서는 계속 푸르르 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마침 공작령의 성 옆에는 수로가 흐르고 있었기에 그곳에서 말의 목을 잠시 축이게 한 다음 이미 줄을 서 있는 성문 앞으로 향했다.

상단의 것으로 보이는 마차와 사람들이 경비병들에게 신분을 확인받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뒤로 돌아가 줄을 섰다. 말에서 내린 아이린과 함께 손을 꼭 잡은채로 말이다.

겉으로 보이는 성벽의 규모도 그렇고 여러모로 바스티안 영지와 비교되는 곳이었다.

상단이 찾아오는 일이 드문 바스티안 영지에 비해 이곳은 당장 눈 앞에만 해도 여러 대의 마차와 꽤나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이 영지를 다스리는 가문의 이름은 '파트론' 공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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