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앨리스에게 협박에 가까운 혼담을 제안해왔던 그레이스 공작가와 마찬가지로 제국을 통틀어 다섯 개 있는 공작가였다.
다만 그레이스 공작가를 비롯한 다른 네 개의 공작가가 수도 주변에 분포에 있는 것에 반해 파트론 공작가는 제국의 남동쪽에 홀로 떨어져 있는 영지였다.
'덕분에 나는 편하게 갈 수 있지만.'
공작령이지만 수도와 거의 보름 동안 말을 타고 이동해야하는 거리에 위치한 파트론 영지였기에 공작가 정도의 규모가 되야만 설치할 수 있는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했다.
게이트를 유지하는데만 해도 엄청난 마나가 들어가기에 그 값 또한 무척 비쌌지만 급하게 물건을 운송해야하는 상인이나 다른 귀족들은 종종 사용하곤 했다.
물론 텔레포트 게이트는 기사들이 엄중한 감시 속에 지키고 있기에 신분 보증이 확실한 사람만 사용할 수 있었다.
때문에 성문 앞에서 신분 검사를 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할 생각이라고 하자 나무패를 하나 건네주었다.
병사들의 신분 검사를 받았다는 증거물이었다.
그들은 내가 들고온 바스티안 영지의 1급 시민증을 보고는 바스티안 가주의 인장을 확인했다.
물론 내 시민증은 위조가 아니었기에 걸릴 일은 없었고, 무사히 검사를 통과할 수 있었다.
성 안으로 들어가자 바스티안 영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붐비는 인파가 보였다.
거리에 좌판을 깔고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과 노점상들이 잔뜩 있었지만 지금 내 목표는 이쪽이 아니었기에 눈길도 주지 않고 텔레포트 게이트로 향했다.
사람이 워낙 많아 아이린과 떨어지지 않도록 손을 꽉 잡고 이동했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영지 중앙의 광장 옆에 있었다.
이미 나보다 먼저 텔레포트 게이트를 사용하기 위해 찾아온 상인이 짐마차와 함께 기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위치를 확인한 나는 말을 끌고 마구간이 있는 가까운 여관을 찾았다.
여관 주인은 말의 상태를 보더니 대체 말을 어떻게 다루면 이렇게 되냐며 내게 타박을 주었지만 내가 꺼낸 금화를 보고는 곧바로 표정을 바꿔 말은 자신이 잘 돌보고 있겠다며 바로 태도를 바꿨다.
나는 그런 여관 주인에게 금화를 던져주며 사흘 뒤에 찾으러 오겠다는 말과 함께 여관을 나왔다.
텔레포트 게이트로 돌아가자 방금 전 기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상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짐마차 역시 사라진걸보니 텔레포트 게이트를 타고 수도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텔레포트 게이트 쪽으로 다가가자 방금 전 상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기사가 걸어나왔다.
"이 곳은 수도로 가는 텔레포트 게이트입니다.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을 제출해주십시오."
일부러 옷을 고급스럽게 차려입고 온 보람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고급스러운 가죽 재킷을 입고있는 나를 본 기사 역시 내게 정중하게 대했다.
바스티안 영지의 인장이 찍혀 있는 1급 시민증과 방금 전 성문의 병사들에게 받았던 나무패를 기사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기사는 시민증과 나무패를 살펴보더니 위조품이 아니란 것을 확인하고는 허리를 숙였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짐이 없으시다면 게이트의 이용료는 인당 금화 두 닢입니다."
주머니에 넣어뒀던 금화들을 꺼내 기사의 손 위에 얹어주자 그는 텔레포트 게이트 곁에 서 있던 마법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들이 게이트에 마나를 불어넣자 불이 꺼져 있던 거대한 게이트에 푸른 빛이 들어왔다.
"눈을 감았다가 뜨시면 수도일겁니다. 그럼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기사의 말에도 아이린은 우리를 집어삼킬 것처럼 거대하게 일렁거리는 게이트의 실루엣을 보고 몸을 떨었다.
하지만 내가 아이린의 손을 꽉 잡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결심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뗐다.
아이린과 나는 게이트 안으로 걸어들어갔고, 엄청난 양의 마나가 온 몸을 휘감고 지나간 것 같은 짜릿한 기분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일 뿐, 기사의 말대로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해 있었다.
내게는 더할나위 없이 익숙한 풍경이었다.
마지막으로 수도에 왔던게 1년 조금 더 됐던가. 거의 바뀌지 않은 거리의 모습에 나는 킥킥대며 아이린을 데리고 나왔다.
질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과 각양각색의 종족들의 모습이 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아침 일찍부터 열린 장터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이 귓가를 맴돌았다.
바스티안 영지에서 머무를 때는 보기 힘들었던 고층 건물들도 여럿 보였다.
그 건물들 중에는 유명 길드의 하우스도 있었고 대형 상단의 본점도 있었다.
떠밀리듯이 텔레포트 게이트 입구에서 나온 나는 먼저 번화가에서 벗어나는 길을 따라 걸었다. 어차피 지금 여관에 찾아가봤자 옛 동료들은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녀석들이 모험을 떠난 아침이니까.
아마 저녁쯤이나 되야 슬금슬금 돌아와서는 술을 마셔대겠지. 그러니 저녁이 될 때까지는 다른 사람들을 포섭할 생각이었다.
'과연 포섭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만나러 가는 사람은 사실 포섭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희망이 없는걸 알면서도, 오랜만에 인사를 드리러 간다고 보는게 맞았다.
이미 수천번이 넘게 걸었던 거리였기에 고작 1년 정도 오지 않았다고 길을 잃지는 않았다.
조금씩 바뀐 거리의 상점들을 둘러보며 걷다보니 우뚝 서 있는 탑의 모습이 보였다.
주변에 있는 다른 건물들도 꽤나 고층 건물이 많았지만 눈 앞의 탑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것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다.
수도의 중심에 이런 탑을 세울 수 있는 것은 두 곳 뿐이었다.
'적색 마탑'과 '청색 마탑'.
각각 불과 얼음을 다루는 원소 마법에 대해 연구하는 마탑들이었다. 눈 앞에 있는 이 마탑은 '적색 마탑'이었다. 청색 마탑은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이곳에 찾아오는 것도 얼마만인지. 그 노인네들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마탑의 주변에는 다른 건물들도 거의 없었는데, 마치 홀로 동떨어진 것처럼 있었다.
그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는데, 적색 마탑이 불을 연구하는만큼 폭발이나 화재가 잦게 일어나다보니 그 주변에 건물을 짓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헐값이 되어버린 적색 마탑주 그 할아범이 마탑 주변의 땅을 모두 사들이게 된 것이고 가끔 마탑에 찾아오는 상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얼씬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아이린은 거대한 탑의 위용에 작게 입을 벌린채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할아범들한테 아이린에게 도움이 될만한 마법서라도 몇 권 달라고 해야겠다.
마탑의 입구에 도착하자 각각 손에 지팡이를 들고있는 마법사 두 명이 앞을 가로막았다.
로브를 뒤집어쓰고는 있었지만 몸의 윤곽으로 봤을때 한쪽은 남자, 한쪽은 여자인 모양이었다.
마법의 성취 수준은... 솔직히 말해서 형편 없었다. 순수한 마나량으로 따지면 아이린보다도 적었다.
하긴, 아직 들어온지 얼마 안 됐으니 이렇게 경비나 서고 있겠지.
마탑에 들어온 신입들이 번갈아가며 경비를 선다는 것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다만 내 옆에 있는 아이린을 보고 크게 경계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어떤 일로 적색 마탑을 찾아오셨습니까?"
"마탑주님을 찾아뵈러 왔습니다."
내 말에 남자의 옆에 있는 여자가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앞에 서 있던 남자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남자는 입가에 숨겨지지 않는 비웃음을 머금은채 내게 되물었다.
"...마탑주님을 찾아오셨다고요. 미리 약속은 잡으셨습니까?"
이미 눈 앞의 두 사람은 나를 사기꾼이나 정신병자, 둘 중 하나로 보는 모양이었다.
물론 나라고 해도 다짜고짜 처음 보는 사람이 마탑주를 찾아왔다고하면 미친놈 취급을 하겠지만, 그래도 막상 당하니 조금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곰곰히 기억을 더듬다가 내가 아는 또 다른 이름을 떠올려냈다.
"매그논님에게 루디가 찾아왔다고 전해주시면 바로 알아들으실 겁니다."
매그논. 그는 내가 한창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몇 번인가 만난적 있는 마탑주의 직속제자였다. 나보다 열살 정도 많았지만 그는 적색 마탑주와 함께 몇 번인가 찾아온적이 있었다.
할아범이 직접 고른 제자인만큼 마법에 대한 재능과 학구열뿐만 아니라 인성 역시 올곧았다.
내 말을 들은 것과 동시에 나를 비웃고 있던 두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
그들은 둘이 붙어서는 서로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강화마법으로 청력을 조금 강화하니 간단하게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야. 어떡해. 부탑주님이랑 아는 사이였을 줄은 몰랐는데. 부탑주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마탑 사람 뿐이잖아.'
'나라고 그걸 어떻게 알아! 일단 오빠가 올라가서 부탑주님한테 말씀드려봐. 내가 그동안 비위라도 맞춰놓고 있을테니까.'
자기들끼리 대화를 끝낸 두 사람은 어색하게 웃으며 남자가 도망치듯이 마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반면 여자 쪽은 오히려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어머. 방금 전의 무례는 죄송했어요. 평소에도 마탑주님을 뵙겠다고 찾아오는 잡상인들이 꽤 있거든요."
"괜찮습니다. 충분히 이해하니까요."
은근슬쩍 자기들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 그녀였지만 이제 막 마탑에 들어오고 어떻게든 책임을 뒤집어 쓰기 싫어하는게 귀여워서 나는 웃으며 넘겨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화색을 띠며 더욱 내게 달라붙었다.
"이해해주신다니 감사드려요. 그런데 손님...아니, 루디 씨는 마탑주님이랑 어떤 일로 만나뵈려고 하시는거에요?"
내 팔을 자신의 가슴팍 사이에 끼우며 속을 떠 보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적당한 거짓말을 지어냈다.
새로운 마나석을 발견했다는 말과 함께 그 사실을 보고하러 왔다고 하자 그녀는 살짝 김이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좀 더 써먹을 수 있을만한 정보를 기대했던 것일까.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나와 마탑주와의 관계를 물어왔고, 대답하기가 귀찮았던 나는 적당히 말을 얼버무리려 하는데 문득 내 오른쪽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아직도 내 손을 놓지 않고 꽉 잡은 아이린은 내 왼팔이 여마법사의 가슴골 사이에 묻혀 있는 것을 보고는 도끼눈으로 째려보고 있었다.
아이린의 뚫어져라 보는 눈길을 눈치채지 못한 여마법사가 계속 내게 추근덕대자 확 밀쳐버릴까 생각까지 들었지만 타이밍 좋게 안으로 뛰어갔던 남자와 오랜만에 보는 매그논이 따라나왔다.
그는 몇 년 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 비해 꽤나 늙어보였다.
마법사들은 마나를 다루는 직업 특성상 육체의 노화 또한 늦은 편이었는데, 청년의 외모를 가지고 있던 그는 이제 완전히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턱을 덮는 덥수룩한 수염과 눈 밑에는 군데군데 주름도 잡혀 있었다.
생각해보니 매그논은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으니 벌써 마흔이 넘은 셈이었다.
매그논은 나를 보고 놀란 기색이었다. 하긴 몇 년이나 소식 하나 없다가 갑자기 찾아오면 저런 반응이 당연하겠지.
"루디. 이곳은 왠일이냐?"
다행히 매그논은 나를 문전박대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놀랐지만 가볍게 포옹을 하며 반가움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