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그논의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은 내가 정말로 매그논과 친분이 있다는 것을 보고는 잔뜩 굳어 있었다.
이제 막 견습으로 들어온 그들에게 있어서 적색 마탑의 부탑주인 매그논은 그야말로 하늘같은 존재였으니까.
그의 눈 밖에 나는 순간 자신들이 마탑에서 쫓겨나는 것은 거의 확정이었다.
혹여나 내가 매그논에게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을까 싶은 두 사람은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마탑주님도 뵙고, 부탁드릴 일도 있어서 왔죠. 마탑주님은 안에 계세요?"
"그래. 마침 청색 마탑의 마탑주님도 와 계신다."
그러고보니 두 할아범 사이가 꽤나 좋았다.
불과 얼음,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섞일 수 없는 속성들이었지만 의외로 두 영감은 죽이 잘 맞았다.
제국에 단 세 명 밖에 없는 8서클 마스터를 달성한 마탑주들이라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참고로 저 세 명 중 나머지 한 명은 내 스승이었다.
적색, 청색, 흑색.
이렇게 세 개의 마탑주만이 8서클의 경지를 완벽히 마스터할 수 있었고, 나머지 마탑의 마탑주들은 간신히 7서클에 턱걸이를 하거나 심하면 6서클 익스퍼트 수준이기도 했다.
물론 서클이 마법사로서의 역량을 무조건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보다 높은 서클에 이를수록 마법에 대한 이해도와 응용력이 높아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당장 이 마탑도 마탑주들의 연구의 정수와도 같은 곳이었다.
마탑 안으로 들어오자 온 몸을 휘감는 정순한 마나의 기류가 느껴졌다. 체내의 마나가 그에 반응하며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마족인 아이린 역시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며 이 감각을 되새기고 있었다.
혹시 주변 다른 마법사들이 아이린의 정체를 눈치채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아직 다들 견습이나 중견 수준인지 감지해내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매그논은 얼핏 눈치를 챈 것 같지만 일부러 말하지는 않고 있었다.아마 마탑주에게 찾아갔을 때 함께 이야기할 생각인 것 같다.
"아, 그러고보니 우리 애들이 너한테 결례를 범하진 않았니? 요즘 애들은 마법사라는게 무슨 벼슬인지 쓸데없이 콧대만 높아져서는..."
바로 뒤에 두 사람이 있는데도 푸념하듯이 털어놓는 매그논의 행동에 지금 그에게 아까 있었던 일을 그대로 털어놓으면 어떻게될지 궁금했지만 참기로 했다.
"별 일 없었어요. 오히려 친절하게 대해주셨는걸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너희 둘은 다시 마탑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거라."
내가 적당히 거짓말을 지어내자 그들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리고 매그논의 축객령에 그들은 후다닥 마탑 밖으로 달려나갔다.
"...쯧쯧. 저래서야 언제쯤 철이 날려는지."
매그논이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그리고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저 녀석들 너 처음보고 깔봤지? 겉으로 보이는게 전부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뭘요. 옛날 생각나고 좋구만. 형도 처음 마탑에 들어왔을때 저런 선배들 많았잖습니까."
내가 마법을 배운 흑색 마탑이야 마탑주인 스승에게 나 홀로 마법을 전수받는 방식이라 선후배가 없었지만 다른 마탑에서는 이런 상하관계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었다.
이제 막 들어온 견습 마법사일 때만 부마탑주나 마탑주가 잠시 봐주고, 그 후로는 대부분 직속 선배 마법사들에게 하나씩 배워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매그논은 마법사 권위주의에 빠져있는 선배들을 실력으로 누르고 올라갔고, 순식간에 마탑주의 인정을 받아 직속 제자가 되었다.
노력하는 천재. 매그논은 그 단어에 가장 어울리는 남자였다.
실제로 그는 주변의 그 누구보다도 많은 양의 마나를 체내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것도 불순물이 거의 뒤섞이지 않은 순수한 마나로만 말이다.
마탑주가 얼마나 애지중지 매그논을 키워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났던게 대략 십오년 전이니 꽤나 긴 인연이었다.
다른 마탑들이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릴 때도 오직 적색과 청색 마탑만큼은 무사히 여파를 비껴갔다.
"그러고보니 언제 부마탑주 자리까지 오른겁니까?"
"이 년쯤 전에 됐지. 어차피 장로들은 마법에 정진도 없고, 내가 마탑주님의 직속 제자라는 건 마탑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고작해야 마흔 살에 부마탑주라니. 형도 엄청나게 출세했네요."
그는 내 말이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주먹으로 내 가슴팍을 툭 쳤다.
물론 장난으로 한 것이었기에 주먹에는 힘이 하나도 실려있지 않았다.
"내가 오 년 넘게 배웠던 걸 일 년도 안 되서 배운 놈이 할 소리냐? 나 참. 너네 스승님이 우리 마탑에 찾아와서 네 자랑을 할 때마다 내가 마탑주님께 얼마나 까였는지도 모르는 놈이."
"정작 제 스승님은 저한테 칭찬 한 마디 한 적도 없는데 말이죠."
하여간 능구렁이같은 할망구였다.
얌전히 자연의 섭리나 받아들이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노화를 늦추고 있는건지.
스승의 나이는 아마 80살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미용 마법과 시간 계열 마법을 사용해 강제적으로 몸의 노화를 늦추고 있었기 때문에 20대 중후반의 미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노화를 늦출 뿐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아니었기에 타고난 외모가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나보다 나이도 많은 양반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으면 조금 질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적당히 매그논과 잡담을 나누다보니 어느새 탑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올라오는 길에 다른 마법사들은 처음 보는 나와 아이린에게 몇 번인가 눈길을 주었지만 매그논이 신경 끄고 자기 일에 집중하라고 일갈하자 다들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가 마탑 내에 어느 정도의 입지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설령 당장 마탑주가 돌아가신다 하더라도 매그논이라면 충분히 적색 마탑을 물려받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오직 하나의 방 밖에 없었다. 나도 몇 번인가 ?故?적이 있는 방이었다.
매그논이 주먹을 쥐고 가볍게 방문을 두들겼다.
"스승님. 루디가 찾아왔습니다."
똑똑. 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열린 문 안의 방에는 콧수염이 인상적인 영감과 수염을 길다랗게 기른 영감이 자리에 앉아서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다만 그들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심상치 않았다.
두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막대한 마나 오러는 아이린이 견디기에 힘들었는지 몸을 움츠렸다.
조금이지만 다리도 떨리는 것을 보고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영감님들은 최대한 위엄있는 분위기를 풍기려 했지만 그들의 시선이 내 쪽에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마나를 갈무리 할 수 있을텐데도 이러는 것은 일종의 시위였다.
"오랜만입니다. 영감님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에잉... 쯧. 몇 년 동안 연락도 없던 놈이 여긴 무슨일로 온게냐?"
삐죽삐죽 튀어나온 콧수염이 인상적인 '적색 마탑주'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면박을 주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영감님의 눈길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내가 스승님의 제자로 처음 들어왔을 때도 친자식처럼 대해주셨던 두 영감님들이었다.
스승님의 지옥 훈련을 따라갈 수 있도록 몰래 마나 영약도 여러 번 받았고 자신들의 비전이나 다름 없는 기술들도 몇 가지 배웠다.
그때 배운 기술이 아니었다면 모험을 하며 겪은 위기에서 몇 번이나 목숨을 잃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단지 최근 몇 년 동안 찾아온 적이 없어서 삐지신 것들이겠지.
"하하. 한동안 바쁘게 다닌다고 찾아뵐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꾸준히 찾아올테니 화를 푸십시오."
결국 내 사과에 영감님들은 기분을 풀었다. 이때까지 가만히 있던 청색 마탑주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그동안은 뭘 하고 돌아다닌게냐? 새로운 제자라도 들인게야?"
그렇게 말하는 영감님은 내 옆에 서 있던 아이린에게 눈길을 주었다.
두 영감님들이 마나를 갈무리해서 집어넣자 아이린은 그제서야 어깨를 짓누르던 중압감이 사라지고 숨통이 트인 것 같았다.
어차피 두 사람에게는 숨길 생각도 없었기에 나는 아이린에 대해 아는 것들을 사실대로 말했다.
그녀를 노예로 사게 된 일부터 마법을 가르치고, 그 성취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설명했다.
아이린이 서큐버스라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아이린의 정체를 꿰뚫어 봤는데, 굳이 서큐버스라는 사실을 말해서 아이린을 긴장시킬 필요는 없으니까.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영감님들과 매그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모험가나 사람들이었다면 마족이라는 종족에 강한 적의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지만 우리 같은 마법사들에게 마족은 그저 신기한 실험체, 혹은 보기 드문 종족 중 하나일 뿐이었다.
때문에 영감님들도 내가 서큐버스인 아이린에게 마법을 가르친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래. 우리가 네 스승도 아니고 네가 가르치고 싶다면 뭐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보다 이번에 왜 찾아왔는지나 말해 보거라."
내가 이유 없이 찾아올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영감님의 직설에 나는 올 것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결과에 대해 별 기대를 하지도 않았지만 이런 부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이라 떨렸다.
혹시 이번 부탁을 거절당하면 영감님들과의 관계가 일그러질까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까지와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우리 영지에 찾아온 4황녀 에디스와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하고, 그녀가 다른 황족들에게 핍박받지 않을 수준의 파벌을 만들어 줄 것이라는 생각을 전했다.
만약 영감님들이 내 부탁을 수락한다면 에디스의 일은 이미 해결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마탑이라는 존재는 에디스에게 너무 과분한 지원군일지도 모른다.
에디스를 핍박하던 황족들은 어째서 마탑이 갑자기 에디스를 지지하기 시작했는지 의심할 터였고, 황위 계승권을 두고 싸움을 벌이던 황자들마저 에디스를 경계하기 시작할 것이다.
황위 계승권은 관심도 없었던 에디스에게 그것은 오히려 안 좋은 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때문에 만약 다른 용병단이나 길드를 일정 이상 포섭에 성공하면 마탑의 지지는 없는 일로 되돌릴 생각이었다. 다른 길드들에 거절당했을 때를 대비한 최후의 보루라고나 할까.
에디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이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뿐이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구나."
이때까지 가만히 앉아 아무 말도 않고 생각에 잠겨있던 '청색 마탑주'가 입을 열었다. 영감님은 침통한 표정으로 길게 자란 수염을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이미 청색 마탑은 장로 여섯 명들이 의견을 조율해서 결정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단다. 비록 내가 마탑주라고는 하더라도, 그 정도의 사안을 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힘은 이제 없어.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구나."
아무래도 청색 마탑의 영감님은 직접적인 마탑 운영을 그만둔 것 같았다. 적색 마탑과 달리 청색 마탑에는 직속 제자가 없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청색 마탑주는 늘 나와 매그논을 보고 왜 자신에게는 제자복이 없는 것이냐고 한탄을 하고는 했으니까.
그래도 만약 자신이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면 나를 반드시 도와줄 것이라는 영감님의 마음씨가 고마웠다.
"아뇨. 신경쓰실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염치 없는 부탁을 드린 제가 더 죄송하죠."
오히려 미안해 해야하는 것은 내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