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부터 영감님들에게는 도움만 받았었는데, 아직도 그들에게는 은혜를 갚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청색 마탑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도중 생각에 골똘히 잠겨있던 적색 마탑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매그논은 스승의 자꾸만 눈치를 보며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그리고 매그논이 적색 마탑주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루디. 우리 적색 마탑은 이때까지 그 어떤 정치적인 일들에도 중립을 지켜왔다. 우리는 제국에 충성하지만, 그것은 황실을 향한 것이 아니야. 제국 전체를 위한 충성일 뿐이다."
그의 선을 긋는 말투에 매그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중하고 안정적인 성격인 매그논에게 있어서 내 제안은 꼭 거절하고 싶었겠지.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허나, 루디 네가 내 부탁을 하나만 들어준다면 도와줄 수도 있지. 나는 저 영감이랑 다르게 여전히 권력을 꽉 쥐어잡고 있거든. 듣자하니 어차피 이름뿐인 지지선언이라며? 그렇다면 더욱 그렇지."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청천벽력같은 이야기에 매그논이 등 뒤에서 '스승님!'이라고 소리쳤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물론 그의 말대로 에디스의 파벌에 동참하는 것은 사실 이름뿐이었다.
에디스가 황위 계승을 위해 다른 파벌과의 전쟁을 일으킬 일은 없을테니까.
"어때. 해볼테냐?"
"제가 지금 그런거 가릴 처지는 아니죠. 부탁이 뭡니까?"
"그 점은 걱정 말거라.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그냥 내 제자중에 조금 곤란한 처지에 있는 애가 하나 있는데, 나중에 그 애가 널 찾아가게 되면 좀 보살펴 달라는거다. 녀석은 어릴때부터 마탑에서 지내서 사회 생활에 익숙하지 않거든."
뭔가 대단한 부탁을 예상하고 있던 나는 별 것 아닌 조건에 흔쾌히 수락했다.
매그논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이미 마탑주가 내린 결정을 자신이 뒤집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형.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만약 다른 용병단이나 길드들을 포섭하게 되면 마탑의 지지까지는 필요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의 짐을 덜어주기 위한 내 말에 그나마 표정이 조금 밝아진 매그논이었다.
나는 분위기를 환기시킬겸 아공간 주머니에 담아왔던 술병을 꺼냈다. 두 영감님들이 고급 술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술꾼이란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꺼낸 술병을 본 영감님들은 반색했다. 그런 반응을 본 매그논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은 먼저 내려가보겠다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매그논과도 술잔을 맞대고 싶었지만 마탑주와 부탑주가 동시에 자리를 비울 수는 없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그에게 아이린을 부탁했다.
그러자 매그논은 알았다면서 자신이 직접 아이린에게 마탑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아이린은 바에서 나갈 때도 자꾸만 내 쪽을 돌아보며 나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티를 냈지만 내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괜찮다고 해주자 그제서야 매그논을 따라나갔다.
참고로 이 술은 바스티안 영지에서 머무르며 내가 직접 빚은 술이었다. 이래봬도 나 역시 상당한 주당이었다.
체내의 마나가 자연스럽게 술의 독소를 해주했기 때문에 어지간한 술로는 취할 수 없었기에 내가 직접 만들어낸 독주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 모금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눈이 풀리는 수준이었다.
당장 술의 재료로 들어간 것들 중에는 마비 효과가 있는 식물의 수액도 있었지만 영감님들도 나도 그런 것에 대한 면역력은 오래전에 갖추고 있었다.
영감님들은 이런 독한 술에도 익숙한지 술병의 마개를 따고는 병 안에서 흘러나오는 그윽한 향기를 맡았다.
"...크으. 그래. 이게 진짜 술이지. 요즘 술들은 마셔도 마신 것 같지가 않다니까."
"역시 루디가 뭘 아는구만. 매그논 그 녀석은 우리가 술 마실 때마다 잔소리를 하잖아. 고지식한 녀석 같으니."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은 내 술에 꽤나 만족한 모양이었다. 방에 놓여있던 술잔 세 개를 들고 영감님들 사이에 앉은 나는 그들의 잔을 공손하게 채웠다.
"이게 얼마만에 받아보는 술이냐. 자, 너도 잔 줘봐."
적색 마탑주는 꽤나 신이 났는지 어깨를 흔들며 내게서 술병을 낚아채고는 내 잔을 가득 채웠다.
넘치지 않는게 신기할 정도로 차오른 잔을 보니 영감님들이 아직도 삐져 있다는게 실감이 났다.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잔을 들이미는 영감님들과 잔을 부딪쳤다.
결국 그 뒤로도 스승님들이 챙겨놨던 술병을 열 병이 넘도록 비우고 나서야 나는 마탑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렇게 술을 마셔댄 것이 얼마만인지 얼굴이 다 후끈거렸다. 이미 인사불성이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영감님들을 뒤로 한 채 비틀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그 다음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나를 운용해 몸 안의 술기운을 몰아냈다. 당장 저녁에 녀석들과 또 술잔을 기울이게 될텐데, 벌써부터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양 손으로 뺨을 두어 번 쳐서 정신을 차린 나는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마침 저편에 마법사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는 아이린과 매그논이 있었다.
내 존재를 먼저 알아차린 것은 아이린이었다.
딱히 기척을 내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아이린은 내쪽으로 휙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보고 미소를 짓고 달려왔다.
보아하니 매그논이 후배 마법사들의 훈련을 도와주고 있는 것 같았다.
예상대로 그들의 수준은 다들 고만고만했다.
얼핏 봐도 아직 자신의 마나의 한계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는 초짜들이었다.
조금 생겼던 호기심이 빠르게 사그라들며 흥미를 잃을 때쯤 훈련장에서 벗어나 구석 한 켠에 앉아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호오.'
아직 스물도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외모와는 달리 체내의 마나량도 상당했고, 불순물도 거의 없었다.
아무리 많은 영약을 복용한다고 하더라도 체내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은 피나는 훈련과 함께 몇 번이나 자신의 한계까지 마나를 소모해야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저 정도의 마법사가 왜 훈련에 빠져 있는지 생각하던 나는 방금 전 영감님의 말을 기억해냈다.
영감님이 말했던 곤란한 처지에 놓인 아이가 저 애인가.
적어도 마법 실력 하나는 꽤나 출중해보였다.
몇 년이나 마법을 배웠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 매그논에게 훈련을 받고있는 이들보다는 훨씬 수준이 높았다.
실전은 안 되겠지만 마법에 대한 기량만으로는 안젤리카보다도 나을 것 같았다.
당장 모험가로 활동해도 B랭크 정도는 쉽게 달성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조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귀족의 자제가 아니면 정식 기사가 될 수 없는 것과 달리 마법사는 평민과 귀족을 가리지 않았다. 오직 순수한 재능과 실력만을 평가할 뿐.
그런데 저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소녀가 훈련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은 특이한 경우였다.
영감님도 지금 당장 저 애를 마탑에서 내보낼 생각은 없다고 했으니 크게 신경쓸 필요는 없겠지만 머릿속 한 켠에 기억해두기로 했다.
후배들의 훈련을 관리하고 있는 매그논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매그논도 가볍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배웅을 대신했다.
마탑에서 나오는 길에 여전히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두 사람은 나와 아이린을 보고는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아, 안녕히 가십시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처음 찾아왔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그들의 태도에 아이린과 나는 소리 없이 키득거리며 그들을 지나쳤다.
영감님들과 술잔을 부딪친 시간이 꽤나 길었는지 어느새 밖에는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어차피 방도 잡아야하고, 익숙한 얼굴들도 볼 겸 나는 오랫동안 신세를 졌었던 여관. '요정들의 쉼터'로 향했다.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이름과 달리 온갖 사람들이 다 몰려오는 여관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모험가였고, 수도에 있는 여관들 중에서는 가격도 시설도 괜찮았다.
특히 여관 주인이 A랭크 모험가 출신이라 그런지 여관에서 흔히 일어나는 싸움도 이곳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았다.
마침 모험을 끝내고 돌아온 모험가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중 드물게는 내가 아는 얼굴도 있었다. 하지만 나와 썩 좋은 관계는 아닌 녀석이었기에 못 본 척 지나갔다.
녀석도 나를 보지 못했는지 자신의 패거리와 함께 이야기를 하며 걸어갔다.
수도의 북동쪽에 위치한 요정의 쉼터가 있는 거리는 모험가들을 위한 무구점이나 방어구점들이 즐비했다.
이 자리에서 오래전부터 장사를 하고 있던 그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최근에는 방어구에다 미스릴을 섞어서 만드는게 대세인가. 내가 수도를 벗어날 때만 해도 아다만티움이 유행이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가게를 둘러보다 어느새 여관에 도착했다. 아직 모험가들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여관 안은 꽤나 조용했다.
조심스레 여관 안으로 발을 내딛고 들어가자 카운터를 보고 있던 점원이 나를 맞이했다.
"어서오...루디?!"
정정하겠다. 점원인줄 알았는데 하필이면 여관의 여관의 안주인인 메이린을 만나버렸다.
그녀는 오랜만에 보는 내가 반가운지 내 손을 덥썩 잡더니 곧바로 자신의 남편을 불렀다.
"여보! 빨리 와 봐! 루디가 돌아왔어!"
메이린의 목소리에 부엌 안 쪽에서 요리를 하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요정들의 쉼터'의 주인이자 전(前) A랭크 모험가. 카바인이 걸어나왔다.
내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육중한 덩치에 얼굴에 나 있는 상처들은 가뜩이나 더러운 그의 인상을 더욱 험상궂게 보이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봐도 저 엄청난 덩치는 적응이 되질 않았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다른 모험가가 카바인에게 농담삼아 혹시 조상 중에 오우거가 있는게 아니냐고 했다가 그의 주먹을 얻어 맞고 일주일 동안 꼼짝없이 방에 틀어박혀서 요양을 해야했다.
카바인의 눈이 나와 마주치더니 눈썹이 꿈틀거렸다. 혹시 내가 그의 심기를 거스른 것인가 싶어 생각해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는게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 예상과 달리 카바인은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게 얼마만이야! 다시 길드의 에이스 차리를 꿰차려고 돌아온건가?"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몇 번이나 두드렸다. 그의 육중한 체중에 힘까지 실리자 어깨가 부서지는 줄 알았다.
그래도 변치않은 그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리가. 모험가 일은 접은지 오래야. 내 꿈은 무병장수하는 거라고."
카바인은 험상궂은 외모와 달리 친절한 녀석이었다.
모험가가 되면 돈을 잘 번다는 소문 하나로 시골에서 올라왔다가 현실에 직면한 촌뜨기 놈들이 뒷골목을 방황하다 얼어죽지 않도록 빈 방을 내주기도 했다.
자신이 모험가로 활동했을 때의 기억 때문인지 아직 풋내기인 모험가들에게 간단한 조언을 하거나,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다만 그를 화나게 한 녀석들은 한 놈도 빠짐없이 어디 한 군데 부러지거나 박살이 나서 돌아왔다.
그의 덩치와 타고난 근력 때문에 장난삼아 툭 치는 것만으로도 다친 경우도 드물게 있었지만 모험가라는 놈들은 바퀴벌레같은 생존력과 불가사리같은 회복력을 가졌기에 큰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카바인은 식당에 놓여있던 의자 하나를 끌고와서 내 앞에 걸터앉았다.
"그래. 모험가로 복귀할 것도 아닌데 수도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
"오랜만에 애들 얼굴도 좀 보고, 만날 사람도 있어서."
"그런거라면 때마침 잘 왔구만. 저기 오네."
카바인이 손으로 입구 쪽을 가리키자 이제 막 모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한 모험가 무리가 있었다. 일 년 전에 헤어질 때와 별반 달라진 것도 없는 모습이었다.
"정말이지. 내가 했었으면...어?"
"뭐야. 왜 그래?"
가장 앞에서 말하고 있던 수인족 소녀가 나를 알아보고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