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0화 (150/260)

앞장서서 걷고있던 그녀가 멈춰서자 뒤에서 따라오던 이들이 볼멘소리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것도 신경쓰지 않고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루....루..."

"루?"

소녀는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지 말을 더듬었다.

"루디이이이이!!"

고막이 터져나갈 정도로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소녀는 달려왔다.

수인족답게 그 속도는 평범한 인간의 눈으로는 제대로 쫓기 힘들 정도였다.

내 옆에 있던 아이린이 다치지 않도록 살짝 밀어내고, 내게 달려드는 소녀. '사야'를 침착하게 받아냈다.

그녀의 머리에 달려있는 강아지 귀가 쉬지 않고 접혔다 펴졌고, 엉덩이에 달려있는 꼬리가 위아래로 파닥거렸다.

"루디! 루디 맞지! 가짜 아니지!"

방방 뛰며 내 얼굴을 양 손으로 어루만지는 사야에게 나는 포옹을 해주었다.

사야의 뒤에 있던 다른 녀석들도 나를 보고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는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짜 루디네."

"이게 얼마만에 보는거지?"

"일 년 조금 넘었을거에요. 그런데 사야는 루디를 정말 좋아하네요."

우리 파티는 원래 다섯 명으로 이뤄져 있었다.

전방에서 방패를 들고 든든하게 탱커 역할을 수행하는 '세이빌'.

거대한 대검을 들고 몬스터들을 일검에 베어버리는 '카니스'.

수인족 특유의 가벼운 몸놀림을 장점으로 단검을 사용하는 '사야'.

본래 신전 소속의 견습 사제였지만 모험가로 전향한 '스텔라'.

마지막으로 평소에는 마법을 사용하지만 위급 상황에는 검도 쓸 수 있는 나까지.

우리 파티는 수도에서도 소문이 퍼질 정도로 꽤나 유명했었다.

어지간한 S랭크 길드나 할 수 있는 외뢰도 성공시켰고, 바질리스크와 레비아탄마저도 사냥한 전적이 있다.

때문에 모험가 길드에게 받는 대우 역시도 일반 모험가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일반 모험가들은 할 수 없는 '국가' 레벨의 대규모 토벌 의뢰나 평범한 모험가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의뢰들 역시 높은 보수로 책정되어 우리의 주머니를 불려주었다.

그 밖에도 몬스터 부산물을 처리할 때 세금을 거의 떼지 않는다거나, 길드의 행사에 얼굴을 비추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보수를 받을 수 있었다.

세이빌과 사야는 둘 다 수인족이었는데 사야는 개, 세이빌은 코뿔소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세이빌의 장점 중 하나인 엄청난 회복력과 어설픈 칼은 흉터조차 낼 수 없는 단단한 몸은 그 덕분이었다.

카니스는 모험가 길드 한구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내가 포섭해서 데려왔고, 스텔라는 우리가 언데드 퇴치 임무를 맡았을 때 신전에 가서 협력을 요청했을 때 만나게 되었다.

그 임무를 함께하는 동안 스텔라는 사제로서의 사명보다는 좀 더 모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우리 파티에 들어오게 되었다.

비록 정식 사제는 아니었지만 신성 주문이나 치유 주문은 사용할 줄 알았기에 우리는 당연히 그녀를 환영했다.

모험가들 중에서 치유 주문을 사용할 줄 아는 사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많은 모험가들이 매일같이 포션을 구입하러 오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내가 파티를 탈퇴하고 난 이후로도 다른 사람을 넣은 것 같지는 않았다. 네 명이서 파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루디이!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떠난 뒤에는 연락 한 번 없고 말이야!"

내 품에 안겨서는 내 가슴팍을 마구 두드리는 사야의 모습은 영락없이 어린아이의 그것이었다.

물론 실제 그녀의 나이는 스물여섯이었다. 수인족들은 인간과 달리 열다섯쯤에 완전히 성인의 육체를 가지게 되지만 쉽게 늙지 않기에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참고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세이빌의 나이는 마흔 다섯살이었다. 물론 수인족들은 나이나 예의를 거의 따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분쟁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수인족에게 중요한 것이라고는 오직 힘 밖에 없었으니까.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는 것만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명예이자 더 없는 존경이었다.

나는 투닥거리는 사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녀를 달랬다. 예전에 파티에 있을 때도 사야는 늘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다. 물론 이성으로서의 관심은 아니었다.

그저 사야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 내가 가장 강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수인족들은 본능적으로 가장 강한 자에게 이끌리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발생하는 페로몬과 같았다.

때문에 한창 심할 때는 내가 밤에 몰래 창관에 갈 때도 쫓아온 적도 있었다.

순진무구한 얼굴로 이 밤에 어디 가는거냐고, 자기도 같이 가도 되냐고 물어볼 때는 어이가 없었다.

"미안해. 새로 내려간 영지에서 정착하느라고 찾아올 기회가 없었다."

"흥. 거짓말인거 다 알아. 세이빌이 루디는 분명 이때까지 벌어둔 돈으로 으리으리한 저택을 짓고 거기서 예쁜 노예들과 실컷 해대고 있을거라고 했는걸."

세이빌 이 자식은 애한테 대체 무슨 소리를 한거야.

예쁜 노예를 샀다는 것은 사실이라 조금 찔렸지만 적어도 세이빌이 생각하는 그런 의도로 산 것은 아니었으니 괜찮다.

세이빌을 노려보자 녀석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카니스는 이 상황이 재밌는지 작게 미소짓고 있었고, 스텔라는 내 품에 안겨서 어리광부리는 사야를 보고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종결지은 것은 카바인이었다.

"자자. 남의 가게 입구를 그렇게 막고 있지 말고, 오랜만에 만났으니 술 마실거지? 식당으로 들어가. 루디가 돌아온 걸 기념에서 푸짐하게 차려주지."

"저도 열심히 도울게요."

카바인과 그의 아내 메이린이 먼저 앞장서서 부엌으로 들어가자 우리는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까지 소외되어 있던 아이린의 팔을 잡고 내 옆자리에 끌어앉히자 그제서야 아이린이 있었다는 것을 눈치챈 동료들의 시선이 아이린에게 고정되었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됐는지 위축된 아이린의 손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도록 잡아주자 그제서야 아이린의 손의 떨림이 멎었다.

"루디! 네 옆의 여자애는 누구야?"

역시 사야. 거리낄 것 없이 직설적으로 물어오는 질문에 나는 숨김 없이 대답했다.

"우연히 지나가다 사게 된 노예."

내 대답을 들은 네 사람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세이빌은 꽤나 부러운 듯이 나와 아이린을 번갈아 쳐다봤고, 카니스는 꽤나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스텔라는 약간의 경멸이 담긴 시선으로 나를 노려봤고, 사야는 '역시 세이빌이 해준 말이 맞았어!'라는 소리나 하고 있었다.

이걸 또 어디부터 설명해야하나. 그런 고민에 빠질 때 즈음 카니스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저 애는 왜 산 건데? 네 성격상 저 애를 탐하려고 그런건 아닐테고"

나이스 타이밍. 카니스의 센스 있는 질문 덕분에 간단하게 설명을 할 수 있었다.

"수도에서 내려가서 혼자서 지내려니 좀이 쑤시더라고. 반 년 정도는 어떻게든 버텼는데 슬슬 한계점에 도달하려던 참이었지. 그런데 그 때 마침 노예상인이 우리 영지에 와 있었고, 그 때 구매하게 됐던거야."

실제로 그때의 나는 여러모로 본능을 억제하고 있던터라 참기 힘들었다.

바스티안 영지에 내려왔을 때는 성실한 청년 연기를 하느라 창관에도 자주 들르지 못했고, 전처럼 몬스터들을 썰어대며 얻던 정복감과 희열도 느낄 수 없었다.

여러가지 욕구를 억누르며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적으로 한계에 도달했을 때 아이린이 내 눈 앞에 등장한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아이린이 아니었다면 나는 목을 매달았을테고, 아이린은 다른 성격 고약한 상인이나 귀족에게 팔려가서는 험한 꼴을 당하다 죽었겠지.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꽤나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노예와 주인의 관계를 운명적인 만남이라 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랬다.

"당연하지만 너네가 상상했던 그런 관계는 아니고. 그리고 세이빌 넌 나중에 나 좀 보자."

아무리 생각해도 세이빌 저 놈이 문제였다.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녀석의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여자 노예를 샀는데 정말로 그걸 안했다고?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놈을 보니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리고 싶어졌다.

하여간 누가 수인족 아니랄까봐 짐승처럼 싸우고 섹스하는 것 밖에 머릿속에 안 들어있었다.

세이빌은 내 부름에 안색이 안 좋아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그의 반응이 재밌는지 키득거렸다.

경멸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던 스텔라 역시 내 손을 꼭 쥐고 곁에 붙어있는 아이린의 모습을 보고 내 말이 사실인 것을 믿어준 것 같다.

반면 사야는 아이린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주인의 관심을 두고 질투하는 강아지들 같아서 두 사람을 말리지 않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그 광경을 좀 더 구경했다.

사야와 아이린이 서로를 경계하며 눈싸움을 계속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데, 코를 간질이는 고기 냄새와 함께 카바인이 탁자를 가득 채울 정도로 커다란 통구이를 들고왔다.

"자. 카바인 표 특제 돼지 통구이다. 배터지게 먹으라고."

과연 다섯명이서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

엄청난 크기에 질린 나와 스텔라는 차마 수저를 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만 세이빌과 사야는 망설임없이 '잘 먹겠습니다.'를 외치고는 전투적으로 식사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나이프로 가장 먼저 돼지의 껍질을 썰어내자 노릇노릇하게 익은 고기의 속살이 보였다.

이런 통구이를 속까지 완전히 익히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을텐데, 어떻게 한건가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돼지의 속살에 희미하게 칼집이 나 있었다.

껍질을 벗겨내지도 않고 안쪽에 칼집을 내다니. 역시 전 A랭크 모험가 답다고 생각했다.

그런 능력을 고작해야 돼지고기 익히는데 사용했다는 것을 다른 기사들이 들으면 기절초풍 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먼저 썰어낸 껍질을 입 안에 넣어보니 조금 질기면서도 잘 익은 식감이 꽤나 괜찮았다.

전에 다른 음식점에서 먹었던 돼지 껍질은 비린내와 함께 너무 질겼는데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확실히 10년 동안 여관을 하다보면 이런 요리실력을 갖추게 되는건가. 나중에 카바인에게 레시피라도 알려달라고 해볼까.

나이프와 포크를 열심히 놀리기 시작하자 그 많던 돼지고기는 어느새 절반도 채 남지 않았다. 특히 세이빌과 사야가 먹어치우는 양이 어마어마했다.

저 엄청난 식성은 여전히 변함이 없구만. 사실 내가 요리를 익히게 된 것도 저 두 사람 때문이었다.

모험을 하다보면 1박 2일, 혹은 며칠 동안 밖에서 야영을 해야할 때도 있기 마련인데, 평소에 챙겨다니는 비상식량으로는 저 두 사람의 허기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즉석에서 몬스터나 동물을 사냥해서 요리해먹은 것이다.

두 사람은 사냥과 도축까지는 능숙하게 했지만 손재주가 전혀 없어서 요리를 하면 태워먹기 일쑤였다.

카니스는 자기 입으로 요리를 못 한다고 못박았고, 스텔라의 경우에는 간을 제대로 맞추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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