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화 (151/260)

소거법으로 요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요리를 익히게 됐고, 그 덕에 지금은 혼자서도 꽤나 괜찮은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돼지 통구이를 거의 다 먹어갈 때 즈음 다른 모험가 무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여어! 루디가 돌아왔다면서!"

"저기있네. 어이! 몇 년만에 돌아왔으면서 말도 안 한거냐!"

"그럼 오늘은 루디가 한 턱 쏘는건가?"

이렇게 다섯명이서 파티로 활동할 때 친분이 있던 파티의 모험가들이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입고 있던 장비가 좀 더 좋아져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가벼운 녀석들이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모험가로 활동하고 있는 녀석들이었다.

꾸준히 장비의 수준을 올리고, 차곡차곡 돈을 모으고 있는 몇 안되는 성실한 놈들이었다.

어차피 돈은 충분히 챙겨왔고, 내일 모레 내려가면 또 다시 몇 달은 못 볼텐데 한 턱 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봐 카바인! 오늘은 내가 한턱 쏠 테니까 이 놈들이 더 이상 못 먹는다고 할 때까지 차려줘."

"오냐. 오늘 우리 가게는 루디가 전세를 내겠구만 킬킬."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밖을 보니 방금 전의 녀석들 말고도 내가 알고 있는 놈들이 잔뜩 몰려와있었다.

그들은 한꺼번에 몰려와서는 내 주변에 자리를 잡더니 온갖 술과 음식들을 시키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짐승같은 놈들이었는데 내가 쏜다는 말에 눈이 완전히 돌아가서는 각기 다른 메뉴들을 주문했다.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꽉 찬 여관을 보고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금수같은 놈들이 기어이 내 돈을 털어먹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심지어 평소에는 마시지도 않는 값비싼 술과 음식들을 시켜대는 꼴을 보니 당장이라도 상을 엎어버리고 싶어졌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녀석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그냥 참기로 했다.

나도 예전에 빈민가를 전전하며 돌아다닐 때 이렇게 한 턱 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굶주린 배를 달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실컷 먹고 마셔라 새끼들아. 마시다가 다 뒤져버리라지."

그렇게 독설을 내뱉으며 어느새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올리자 다른 놈들도 자신의 잔을 들어올렸다.

"영원한 방황자들을 위하여!"

"위하여!"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잔을 들었던 놈들은 그대로 맥주를 꿀꺽꿀꺽 마셔댔다. 보아하니 오늘 완전히 술에 꼴아서 쓰러지기 전까지는 계속 마셔댈 기세였다.

물론 나도 오랜만에 마시는 맥주의 목넘김을 즐기고 있었다. 스승님과 마셨던 독주들이 취하기 위해서 마시는 것이라면 지금은 이 상황을 즐기기 위해 마시는 술이었다.

우리 테이블도 어느새 돼지 통구이를 다 먹어치웠기에 새로운 메뉴를 주문해야 했다.

어떤걸로 주문을 해야하나 싶어 고민하고 있는데 카바인의 오늘 들어온 블랙 베히모스의 고기가 들어왔다는 말에 주저없이 그걸 선택했다.

일반 베히모스의 고기도 먹을만은 하지만, 역시 블랙 베히모스의 고기가 더욱 쫄깃하고 육즙이 많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도 한창 모험가로 활동할 때 몇 번 먹은적이 있다.

그런 별미 때문에 블랙 베히모스 고기는 귀족들의 만찬장에 올라올 정도로 유명했다.

물론 A랭크 이상의 모험가 열 명은 있어야 간신히 잡을 수 있는 놈이기에 녀석의 고기 값은 상당히 비쌌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과 다르게 주머니가 두둑했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시킬 수 있다.

블랙 베히모스 고기라는 말에 환호하는 세이빌과 사야였다.

수인족은 원래 육즙이 살아있는 고기를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최소한의 조리만이 된 고기를 가장 선호했다.

그렇게 뒤이어 나온 블랙 베히모스 고기를 시작으로 온갖 음식들을 먹었다. 모험가로 여관에 묵을 때는 질리도록 먹었던 음식들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먹어보는 음식들은 마치 고향에 돌아온 향수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렇게 식사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주변의 다른 놈들은 계속해서 술을 마셔댔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다들 탁자에 머리를 쳐박고 쓰러졌다.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는 놈들이 쓸데없이 술만 좋아해서는.

물론 맥주 수십병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내가 이상한 편이었지만 술냄새를 잔뜩 풍기며 쓰러져 있는 남정네 놈들의 뒷정리를 하는 것은 썩 즐겁지 않은 일이었다.

스텔라와 카니스는 각각 먼저 방에 올라가보겠다는 말과 함께 올라갔다.

어차피 이틀 정도는 이곳에서 더 묵을 생각이라는 내 대답을 듣고는 내일 아침에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사야는 평소에는 입에도 안 대던 술을 마시고는 자꾸만 내게 달라붙어서 내 냄새를 맡아댔다.

집요하게 내 품에 안겨서는 이상한 소리르 해댔다.

"헤헤...루디 냄새... 너무 좋아... 흐으응..."

취해서 그런 것인지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이 꼭 성적으로 흥분한 여성의 그것과 닮아 보였다.

게다가 자꾸만 다리를 자신의 양 허벅지 사이에 끼우고는 고간에 슬쩍슬쩍 비벼대는게 아무래도 스위치가 들어간 모양이었다.

"...얌전히 자라."

가볍게 그녀의 목덜미를 수도로 내리쳐서 기절시켰다.

물론 그녀가 내게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알고있지만 사야의 성격상 여기서 더 응석을 받아줬다간 내가 없을 때의 허탈감이 더욱 클 것이었다.

처음 내가 파티를 탈퇴할 때도 절대 안 된다면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던 애니까.

며칠 후에 돌아갈 내가 이 이상 관계를 가졌다가는 그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할 뿐이었다.

희망고문이라는 건 이런 상황에서나 쓰는 단어겠지.

기절한 사야의 축 늘어진 몸을 여관 입구 옆에 놓여있는 소파에 눕혔다.

세이빌은 그런 나를 보며 '고자새끼'라고 작게 중얼거렸고, 나는 벼르고 있던 놈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끄아악!"

쓸데없이 튼튼한 몸뚱이 때문에 오히려 주먹을 휘두른 내 손이 더 아팠다. 별로 아프지도 않을건데 새끼가 엄살은.

"닥치고, 여기 남은 애들이나 정리해."

"뭐? 내가 왜...... 젠장. 알았어. 하면 되잖아."

내가 다시 주먹을 쥐자 세이빌을 투덜거리면서도 기절한 모험가들을 양 어깨에 들쳐매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이제야 한 숨 돌리겠군.

아이린은 새벽부터 돌아다녀서 피곤했는지 어느새 의자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가볍게 품에 안아들었다. 탁자 위에 놓인 접시들을 정리하던 카바인은 내가 묻기도 전에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2층 제일 왼쪽방이 비어있으니 거길 써. 두 명이서 쓰기에는 충분할거다."

카바인이 말한대로 2층 가장 왼쪽 방이 비어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아이린을 침대 위에 눕히자 아이린이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잠꼬대를 했다.

"으응...안 돼...주인님..."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것이길래 나를 부르는걸까. 조금 궁금했지만 괜스레 너무 빤히 쳐다봤다간 깰지도 모르니 조용히 방을 나왔다.

그리고 다시 식당으로 내려오자 내가 앉아있던 자리에 걸터앉아 연초를 태우고 있는 카바인이 있었다.

"식당 안은 금연이라고 하지 않았나?"

옆에 놓인 다른 의자를 끌어와서 그의 옆에 앉자 그는 킬킬대며 내게 연초를 내밀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는 연초를 태울 때도 있었지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기에 끊었다. 특히 냄새에 민감한 사야는 내가 연초를 태우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어차피 그 때는 담배보다도 몬스터를 썰어대는 일이 더욱 큰 스트레스 해소제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별 상관은 없었다.

바스티안 영지에 내려온 뒤에는 비가 오는 날에 가끔씩 연초를 태우곤 했지만 그마저도 아이린과 함께 지낸 뒤로는 완전히 끊었다.

연초 냄새는 꽤나 독해서 어린애들의 몸을 상하게 만들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고보니 여기 계산..."

품에 있던 금화 주머니를 꺼내려하자 카바인이 그런 내 팔을 잡았다.

"됐어. 은퇴하고 나서는 수입도 없는 놈이 쏘기는 무슨."

아무래도 처음부터 돈을 받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봐. 이래봬도 영지 유일의 포션 가게 주인이라고. 내가 버는 돈이 네가 여관해서 버는 돈보다 많을걸?"

"뭐야. 그 정도냐? 젠장. 나도 이럴 줄 알았으면 용병 사무소나 차리는건데."

카바인의 요리 솜씨가 꽤나 좋고, 수도에서도 꽤나 유명한 여관인만큼 찾는 사람은 많았지만 실제로 남는 수익은 얼마 되지 않았다.

반면에 나는 매출의 절반이 넘는 순수익을 올리는 가성비 끝판왕의 포션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적당히 여운에 잠겨있을 때 한 여자가 여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만 그녀의 복장은 꽤나 독특했다.

얼굴을 절반 정도 가까이 가리고 있는 면사포와 속이 반쯤 비치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저런 복장을 다른 곳에서 본 것도 같았는데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내가 기억 속을 헤집어 저 옷을 봤던 곳을 떠올리려는 순간에도 그녀는 나와 카바인을 향해 또각또각 걸어오고 있었다.

이쪽으로 다가온 그녀는 나와 카바인을 번갈아보더니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면사포로 가리지 못한 얼굴만으로도 그녀가 상당한 미인이라는 것 정도는 이미 눈치챌 수 있었다.

다만 그녀가 입고 있는 저 옷차림은 분명 예전에 본 기억이 있는데도 어디서 봤는지가 떠오르질 않았다.

옅은 회색빛의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등이 깊숙히 파여있는 이브닝 드레스 차림.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는 단어를 떠올려내기 위해 기억을 곱씹는 나를 대신해서 카바인이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그래. 우리 여관에는 무슨 일로 찾아왔소?"

카바인은 옆에 반쯤 차 있던 맥주를 입가에 가져다대고는 꿀꺽꿀꺽 마셔댔다. 품위있는 행동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카바인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다행히도 눈 앞의 여자는 그런 카바인의 행동을 신경쓰지 않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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