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화 (152/260)

"저희 마스터의 명으로 루디 씨를 데려오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마스터.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눈 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됐다.

하녀나 단순한 심부름꾼이라면 마스터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아마 주인님이라고 부르겠지.

마스터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대부분이 '길드'에서였다. 그리고 눈 앞의 여자가 소속되어 있는 길드의 이름 역시 기억해낼 수 있었다.

"월야(月夜)의 무희..."

귀족들의 가문과 다르게 길드는 보통 길어도 20년을 가지 못했다.

전쟁에 용병으로 참여하거나, 지난번 바스티안 영지에서처럼 '예상 외의'일이 발생해서 길드원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전투 불능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길드들과 다르게 몇십 년 전부터 존재해온 길드가 바로 월야의 무희였다.

이 길드는 특수하게도 오직 여성만을 길드원으로 받았는데, 그 이유는 실로 단순했다.

말 그대로 '무희'를 만들어내는 길드였으니까.

외모가 아름답고, 전투에 재능이 있는 여성만을 길드원으로 받아 무희로서의 교육을 한다. 전대 월야의 무희의 길드마스터와는 나도 인연이 조금 있었다.

"마스터께서는 루디 씨를 꼭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녀가 작게 덧붙이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튀김가루가 묻은 손을 털었다.

"별 수 없군. 그럼 갔다올게. 카바인."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요즘 수도의 밤길은 위험하니까 말이야."

내 걱정을 한다는게 자기가 말하고도 웃겼는지 카바인은 킬킬거렸다. 그래. 오히려 나와 마주친 놈을 걱정해야할텐데 말이다.

예전에야 수도에서 계속 모험가로 활동해야하니 선을 넘지 못했지만 그만둔 지금은 거리낌없이 날뛸 수 있었다.

나와 악연을 맺고있는 다른 녀석들이 덤벼온다면 철저하게 분쇄시켜 줄 생각이었다.

수도의 밤거리는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거리의 불을 밝히는 마력등은 수도의 명물 중 하나였다. 덕분에 사람들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떠들어댈 수 있었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그녀의 뒤를 따르던 나는 중간에 모험가 길드 건물을 발견했다. 밤이 깊었는데도 길드 앞에는 꽤나 많은 모험가들이 있었다.

길드 앞에 설치되어 있는 게시판에서 그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걸 우리가 어떻게 하냐. 빨랑 다른거 찾아봐."

"이게 보수가 괜찮긴한데... 의뢰주가 좀 걸리네."

"오우거 사냥? 이딴걸 왜 여기다 붙여놓은거야?"

수도에는 많은 모험가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의뢰들이 존재했고 그 중에는 밤에만 처리가 가능한 야간 의뢰도 꽤나 있었다.

하지만 대개 그런 일들은 뒤가 구리거나 범죄에 관련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만큼 보수도 좋았기에 이런 일들을 전문적으로 맡아서 하는 모험가들도 있었다.

그러고 있다가 어느새 앞장서서 걷고 있던 그녀와의 거리가 꽤나 멀어졌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가니 으슥한 골목길이 나왔다. 물론 나도 익숙한 골목이었다. 그야 이곳은 홍등가로 통하는 길목이었으니 말이다.

다른 골목과 다르게 꽤나 넓은 골목길 사이에는 오랜만에 여자를 품에 안을 생각에 들떠 있는 남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내 앞에서 걷고 있는 미녀를 보고는 침을 꿀꺽 삼켰지만 쉽사리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에 그저 눈치만 보고 있었다.

골목을 지나오자 신세계가 펼쳐졌다.

각기 다른 색을 내뿜는 화려한 마석이 건물 벽에 꽂혀서 거리를 밝히고 있었고 하룻밤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헐벗은 옷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여자들과 여러 창관을 둘러보며 가게를 고르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이 있었다.

바스티안 영지의 홍등가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엄청난 규모였다.

나란히 늘어서 있는 수많은 창관들과 도박장들이 이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내기 위해 요란스럽게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일부 가게는 대놓고 봉투에 담긴 미약과 마약을 판에 깔아놓고 판매하고 있었다.

윤리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모험가들에게 있어서 그런 것이 중요할 리가 없었다.

창관 앞에 서서 헐벗은 몸으로 남자들을 유혹하는 창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창부의 몸을 눈으로 훑어보며 즐기는 다른 남자들은 창부의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듣고는 창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야말로 본능에 그 어때보다도 충실해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나 역시 이곳에 있는 창관들 중 절반 이상을 들러본 전적이 있었기에 그저 작게 웃을 뿐이었다.

내 앞에서 걸어가던 그녀는 중간중간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고개를 돌려서 확인했다.

물론 이 거리를 몇 년 동안이나 제 집처럼 들락거린 나였기에 길을 잃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여느 창관과는 다른 우아한 기품마저 느껴지는 건물이었다. 전에도 몇 번인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헐벗은 옷으로 남자들을 유혹하는 창관과는 달리 이곳만큼은 내 앞의 그녀와 마찬가지로 면사포로 얼굴을 절반 정도로 가린 미녀들이 우아한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미인들이었지만 나는 그녀들의 몸 안에서 느껴지는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드레스 안쪽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단도들도 말이다.

"이쪽은 마스터의 손님인 루디님 이십니다."

그녀의 말에 입구 앞에 서 있던 두 사람이 내게 시선을 주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들의 피부나 목소리로 봤을때 이제 막 스물을 간신히 넘긴 아이들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머. 마스터의 손님이셨군요. 잘 부탁드려요."

"마스터는 안쪽 방에 계시답니다. 부디 좋은 시간 되시길."

두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막고 있던 입구를 비켰고,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 나를 데려온 여자는 가장 안쪽에 있는방까지 안내해주고는 사라졌다.

이 방 안에 그녀가 있다는 소리지. 그러고보니 마지막으로 본게 언제더라? 적어도 이 년은 넘었던 것 같은데.

가물가물한 기억의 가닥을 잡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천천히 문을 열자 고급스럽게 치장되어 있는 테라스가 드러났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이 곳은 무희들의 공연을 관람하기 위한 장소였다.

그것도 돈 많은 상인이나 귀족들 정도는 되야 들어올 수 있는 Vip 룸이었다.

테라스에는 먼저 자리에 앉아 와인을 홀짝이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어머. 벌써 오셨어요? 생각보다 이른데. 아직 공연 준비도 다 안 끝났거든요."

"그때까지 그동안의 이야기나 나누면 되겠네."

나는 태연스럽게 그녀의 말에 대꾸하며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 순간 아래에 있는 무대에 불이 들어오며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오랫동안 관리를 받았는지 찰랑거리며 윤기를 뽐내는 자줏빛 머리카락과 잡티 하나 없는 피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앳된 모습으로 보이는 귀여운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어느새 농익은 여인의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게다가 전에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가 그녀를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했다.

보는 남자의 애간장을 녹일 것만 같은 요염한 손짓과 고혹적인 표정이 인상에 남았다.

하루 이틀 연습한 것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두근거렸지만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척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몇 년 만에 보는 것인데도 변한게 없네. 루니아."

"후후. 그건 선배도 마찬가지잖아요. 전보다는 조금 멋있어진 것 같기도 한데."

그렇게 말하며 루니아는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고보니 선배라고 불리는게 얼마만이지.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선배라고 부르는 것은 그녀뿐이었다.

갑자기 얼굴을 들이민 루니아의 몸에서는 진한 향수 냄새가 났다.

코를 자극하는 장미 향기에 나는 이대로 더 있었다간 어쩐지 이상하게 분위기가 흘러갈 것을 직감하고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루니아는 조금 아쉬워하듯이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대체 2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순진했던 애를 저렇게 만들어놓다니.

어쩌면 '그녀'의 눈이 옳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희미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을 더듬었다.

전대 '월야의 무희' 길드 마스터는 내 스승과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춤과 검술 어느것 하나 빼놓을 것 없이 완벽한 무희였지만 그녀는 내 스승과 비슷한 연배의 할망구였고, 때문에 자신의 뒤를 이어 월야의 무희를 관리할 제자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문제는 몇 달 뒤에 터졌다.

기본적인 실력은 어느 정도 있었지만 모험가가 된지 얼마 안 된 루니아는 나를 선배라 부르며 따라다녔고, 나는 그녀와 가끔 술을 마시거나 연극의 공연장에 데려가곤 했다.

그 날은 오랜만에 월야의 무희에서 공연을 보기로 했었는데, 하필이면 돌아가는 길에 우리와 마주친 전대 마스터는 루니아에게 재능이 있다며 자신의 제자로 키우겠다고 했던 것이다.

차라리 루니아가 그 자리에서 거절햇으면 됐을 것을.

그날 본 무희들의 공연에 매료된 루니아는 망설임 없이 제자가 되는 것을 수락했고, 나는 후배를 한 명 잃고 말았다.

그날부터 루니아는 모험가를 그만두고 월야의 무희에서 머무르며 무희로서의 교육과 함께 길드 마스터로서의 교육을 병행했다.

물론 나는 그날 이후로도 몇 달 정도는 꾸준히 이곳을 찾아와서 그녀를 만나곤 했지만 그것도 달을 거듭할수록 점점 드물어졌다.

루니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사실 월야의 무희의 존재도, 그녀에 대해서도 거의 까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진무구한 소녀를 이렇게 요염한 분위기로 바꿔버린걸보면 전대 마스터의 안목이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무하신거 아니에요. 선배? 2년이 넘게 찾아오지도 않으시고, 오늘도 제가 불러서 오신거잖아요."

루니아는 그런 내 행동이 섭섭했는지 내 가슴팍을 자신의 검지로 쿡쿡 찔렀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없었기에 얌전히 사과했다.

"미안."

"흥. 됐어요. 어차피 선배 성격상 나 같은 애는 잊어버리고 하루종일 몬스터 사냥이나 하고 다녔겠죠."

정곡을 찔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루니아와 함께 놀러다녔던 것이 내게 있어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실 루니아에게는 나도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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