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니아를 만나기 전. 그 때의 나는 음침하게 하루 종일 몬스터를 썰고다니는 바람에 '켈디락의 미친개'라고 불렸었으니까.
새벽 일찍 여관을 나서서 하루 종일 몬스터들을 사냥하다가 밤에 돌아오는게 나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루니아는 그런 나와 다르게 무척 밝은 아이였고, 아무도 내게 다가오지 않으려 할 때 나를 선배라 부르며 졸졸 따라다녔다.
딸 같은 사야와 다르게 루니아는 나와 이야기가 통했고, 취미도 겹쳤기에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고 소위 말하는 연인 직전의 관계까지 갔었다.
물론 루니아가 월야의 무희에 들어가면서 모두 없는 일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그 때의 파티원들과 루니아 덕분에 내가 몬스터에 대한 증오를 줄이고 평범한 사람처럼 지내게 됐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순수하게 동료로 여기는 스텔라나 사야와는 다르게 루니아는 내가 이성으로 생각하는 몇 안되는 여자였다.
지금의 루니아는 내 뒤를 따라다니며 '선배'라고 불러대던 그 때의 모습과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성숙해진 미모를 뽐내며 매력적으로 변한 루니아는 내가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 없게 만들었다.
"아. 슬슬 준비가 끝난 것 같네요."
루니아의 말대로 테라스 아래의 무대에서는 슬슬 준비를 마치고 조명을 조절하고 있었다.
값비싼 마석을 고작해야 조명 색을 조절하는데 쓴다는 것에서 월야의 무희 길드의 재력을 알 수 있었다.
곧이어 한 사람이 무대 위로 올라왔는데 그녀는 다름 아닌 나를 이곳까지 안내했던 여자였다.
"오늘도 저희 월야의 무희를 찾아와주신 관객분들께 감사드리며 곧 무대가 시작되니 자리에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녀의 말과 함께 아랫쪽에서 무대 주변을 서성이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았다. 나는 무대가 좀 더 잘 보이도록 테라스에 걸려있던 커튼을 끝으로 밀었다.
"선배도 모험가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시골은 아니야. 일단은 백작령이라고."
앨리스가 들으면 슬퍼할 이야기였다.
"그냥 포션 가게 하나 차려서 그럭저럭 지내는중이지. 내가 할 줄 아는건 그 정도 밖에 없으니까."
"여자친구는 있어요?"
짓궂게 웃으며 그런 질문을 던지는 루니아의 말투에는 장난기가 다분했다. 여기서 괜히 망설였다간 더욱 놀림받겠지.
"유감스럽게도 닿는 인연이 없더라고."
"흐응... 그래요? 이상하네. 선배처럼 괜찮은 남자도 별로 없는데."
그렇게 말하는 루니아의 눈빛이 잠깐이지만 반짝였다. 루니아가 이어서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조명이 모두 꺼졌다.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에 나는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루니아는 '하여간 타이밍 안 좋기는...'이라고 투덜거렸지만 나는 못 들은 척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다시 조명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을 때, 텅 비어있던 무대에 어느새 스무 명 가량의 무희들이 서 있었다.
다만 그들은 평범한 무희와는 달리 양 손에 검을 들고 있었다. 그 크기는 모두 제각각이었다. 한 뼘 길이의 단도부터 롱소드까지 그 종류는 무척이나 다양했다.
이게 월야의 무희가 다른 무희들의 공연과 다른 점이었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일반적인 공연과 달리 이곳에서는 검을 든 무희들이 서로의 검을 맞부딪치며 겨루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순한 대련이 아닌 음악의 선율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무식하게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 잘 절제된 그녀들의 검술은 마치 하나의 춤처럼 보이게 했다.
유연하게 몸을 움직이며 쉬지 않고 칼을 휘두르는 그녀들의 모습은 실로 아름다웠다.
특히 그녀들은 노출도가 높은 의상을 입고 있었기에 움직일 때마다 희미하게 속살이 비쳤다. 그걸 본 일부 남성들은 시선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공연을 감상하고 있었다.
나 역시 예전과는 달라진 무희들의 공연에 반쯤 넋을 놓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예전에 비해 무희들의 검로는 훨씬 잘 정돈되어 있었고, 움직임에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월야의 무희들이 익힌 검술은 아름다운 것 뿐만 아니라 당장 실전에 써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공연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공연이 끝날 때 즈음에는 완전히 분위기가 압도되어 있었다.
그나마 이곳을 몇 번이나 찾아온 이들은 덜했지만 처음 오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은 여전히 아름다운 검무(劍舞)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 역시 마치 신화속의 여신들이 전쟁을 하면 저럴까 싶었다.
무희들이 보여준 공연은 내게 그 정도로 충격이었다.
"어땠어요. 선배?"
"...대단하네. 솔직히 상상 이상이다. 예전과 비교하는게 미안할 정도야."
"후후. 선배라면 그렇게 말해주실 줄 알았어요."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자 루니아는 그런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방 구석의 상자에 들어있던 와인을 꺼내왔다.
"선배랑 술 마시는게 얼마만인지도 모르겠네요. 와인으로 괜찮죠?"
술을 가리지 않는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루니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와인병과 함께 잔 두개를 들고 자리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와인 오프너로 코르크 마개를 땄다.
'뽕' 하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코르크 마개가 하늘에 떠올랐다가 빠르게 다시 떨어지는 것을 루니아는 재주 좋게 잡아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요부였지만 그녀의 운동신경이나 감각은 여전했다.
몬스터를 잡아본 적만 없다 뿐이지 어릴 때부터 사냥꾼으로 활동한 그녀였다.
"특별히 첫 잔은 선배한테 양보할게요."
나는 루니아의 호의를 흔쾌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잔을 살짝 기울여 그녀에게 내밀었고 루니아는 내 잔에 와인을 채워주었다. 진한 포도향이 코를 간질였다.
싸구려 와인에서는 절대 날 수 없는 깊은 향에 나는 아직 잔에 입도 대지 않았는데 벌써 취한 기분이 들었다.
루니아는 자신의 잔에도 와인을 채우고는 내게 윙크를 하며 잔을 내밀었다.
이런 점에서는 변하지 않은 루니아의 귀여운 행동에 나는 그녀의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월야의 무희의 번영을 위하여."
"선배의 평온한 여생을 위하여."
가볍게 서로의 잔을 맞부딪치며 건배를 한 다음 와인을 홀짝였다. 그윽한 향과 마찬가지로 맛 역시 일품이었다.
입 안을 맴도는 짙은 포도향과 함께 달콤한 맛이 혀에 스며들었다. 아무리 잘 숙성된 와인이라고 해도 끝에는 쓴맛이 나기 마련인데 신기하게도 그런게 전혀 없었다.
단순히 설탕이나 다른 첨가물을 넣는다고 낼 수 있는 맛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명품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술이었다.
"나같은 놈한테 주기에는 너무 비싼 술 아니야?"
"선배 말고는 저랑 술 마실 사람도 없다구요. 후후. 남아있는 술병들을 모두 비우기 전까지는 못 돌아갈 줄 알아요."
은근하게 유혹을 해대는 루니아의 말에 나는 그녀가 진심인지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술기운이 돌았는지 불그스름해진 그녀의 얼굴은 더욱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 뿐이었다.
게다가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가슴이 V자로 파인 노출도가 높은 드레스라 자꾸만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전에는 몰랐는데 의외로 볼륨감이 있는 가슴이었다.
"...선배. 그렇게 뚫어져라 보면 아무리 저도 조금 부끄러운데요."
나도 모르게 너무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저런 야한 옷을 입고 나를 맞이한 것 자체가 유혹하는 것 아니었냐고 받아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만약 내가 조금만 더 술에 취했었으면 정말로 입 밖으로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뭐. 그래도 선배니까 특별히 봐드릴게요. 그래서 감상은 어때요?"
"감상?"
갑자기 이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되물었다.
"당연히 제 가슴 얘기죠. 솔직히 말해봐요. 꼴렸어요?"
그렇게 말하는 루니아는 아래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물론 테이블 때문에 저 쪽에서는 내 아랫도리가 보일 턱이 없었지만 나는 괜스레 허벅지를 움츠렸다.
나는 루니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잔에 가득 차 있던 와인을 단숨에 비웠다.
그녀는 그런 내 행동이 재미없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투덜댔다.
그런 루니아의 모습마저도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당장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몸을 탐하고 싶었다.
...취해도 단단히 취한 모양이었다.
자꾸만 예전의 내 곁에 딱 달라붙어 다니던 루니아와 지금의 그녀가 겹쳐 보였다. 그런 환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리 마셔도 갈증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목이 타는 것만 같은 끝없는 갈증에 나는 얼음물이라도 마실 생각에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필이면 낮에 스승님들과 독주를 그렇게 마셔대고, 여관에서도 맥주를 몇 병이나 비웠던 여파가 지금 몰려왔다.
머리가 띵하고 울리며 다리가 풀렸다. 몸의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해 바닥에 엎어지려는 나를 받아낸 것은 당황한 루니아였다.
"선배!"
다행히 내가 바닥에 코를 박기 전에 루니아는 아슬아슬하게 내 어깨를 잡았다.
나를 부축하며 일으킨 루니아 덕분에 간신히 똑바로 설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예상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면 나를 부축하기 위해 다가온 루니아의 몸이 상당히 밀착되었다는 것이었다.
루비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는 방금 전까지 우리가 마셔댔던 와인 향기가 났다. 반쯤 사고를 멈췄던 머리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래. 와인. 술을 완전히 비우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기로 했지. 그러니까 와인을...
내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나는 본능이 이끄는대로 와인 향기가 풍기는 루니아의 입술에 내 입을 맞췄다.
루니아는 갑작스런 키스에도 나를 밀어내지 않고 오히려 나를 양 팔로 끌어안았다.
술에 취해 사고가 불가능했던 나는 본능이 이끄는대로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드레스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는 방금 전 내가 보고 있었던 가슴을 마구 주무르며 그녀의 입 안까지 혀를 밀어넣었다.
달콤한 포도향과 함께 끈적이는 타액의 맛이 내 혀를 휘감아왔다.
루니아의 몸에서 풍겨오는 농익은 여인의 향기에 나는 반쯤 이성을 잃고 그녀의 입 안을 마구 휘저었다.
끈적이는 혀가 서로의 것을 탐했고, 그러는 한편 나는 손으로 루니아의 젖가슴을 주물러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