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8화 (158/260)

분명 내가 변하게 된 때가...

문득 아이린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분명 아이린을 만난 순간을 기점으로 아르웬부터 시작해서 영지의 여자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분명 석연치 않은 부분도 꽤나 있었다. 서큐버스인 그녀에게 영향을 받아 내가 변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의 현실에 꽤나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과거에 내가 섹스를 기피했던 것은 단순한 육체의 접촉을 짐승처럼 해대는 족속들을 보면 한심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반면 지금은 그때와는 조금 달랐다. 몸을 섞는 상대에게 사랑 비스무리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기에 결코 돈으로 쾌락을 구매하는 그 때의 섹스와 같지는 않았다.

어느세 얼굴을 가까이 갖다댄 니아가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갖다댔고, 나는 그런 그녀의 입맞춤을 거부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키스와 함께 내 다리를 씻고 있던 노라의 손길 역시 어느새 멈춰 있었다.

그렇게 열기로 후끈거리는 욕탕 안에서 나는 꽤나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2차전이 끝나고, 다시 몸을 씻고 나서야 나올 수 있었다. 내 뒤를 따라 나오는 니아와 노라의 얼굴은 윤기가 흘렀다.

그에 반해 나는 완전히 지쳐서 욕탕에서 몸을 담그며 풀렸던 피로가 다시 쌓인 기분이었다. 뭐, 그 이상으로 기분이 좋았으니 굳이 반발하지는 않겠지만.

오랜만에 하는 3P는 상상 이상으로 괜찮았다. 특히 전혀 다른 성향의 두 사람이었기에 골라 먹는 재미도 나름대로 쏠쏠했다.

욕탕에서 나오자 아까 루니아의 방에 찾아왔던 그녀가 양 손에 옷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니아는 가볍게 내 뺨에 입을 맞추고는 수건을 감싼 채로 돌아갔고, 노라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도망치듯이 사라졌다.

"마스터와 그렇게 하시고도 더 하셨을 줄이야. 상상 이상으로 절륜하시네요."

나를 놀리는 그녀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얌전히 옷을 갈아입었다. 분명 정액과 애액 냄새가 베었을 옷에서는 향긋한 향만이 맴돌았다.

다림질까지 완벽하게 했는지 구김 하나 없었다.

"마스터도 정신을 차리셨으니 간단하게 이야기라도 나누시지요."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다시 루니아가 있던 방으로 돌아갔고, 아까 입고있던 이브닝 드레스가 아닌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루니아가 있었다.

가벼운 원피스 차림이었는데, 그녀는 아직도 아랫도리가 시큰거리는지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몸은 괜찮아? 힘들면 무리 안 해도 되는데."

내가 걱정하자 루니아는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쏘아붙혔다.

"아까 그렇게 해놓고는 이제와서 그런 소릴 하는거에요? 그냥 살짝 저릿거리는 정도니까 신경 안 써도 되요."

이러니 저러니해도 나를 걱정시키지 않고 싶어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한 녀석이었다. 쓸데없는 부분에서 경쟁심을 가지기도 하고.

선배로서 그 정도는 너끈히 받아줄 수 있는 어리광이었다.

"...흠흠.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선배는 제4황녀를 지지해줄 세력을 모으고 있는거 맞죠?"

"그래. 어디서 들었는지는 몰라도 사실상 이름뿐인 세력이니까 신경쓸 필요 없어."

이미 마탑이라는 보험을 들어둔 이상 적당한 길드나 내가 알고 있는 용병단을 포섭하면 쉽게 마무리 될 일이었다.

"저희 길드도 합류할게요."

"...진심이냐?"

월야의 무희는 길드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A랭크 길드였다. 특히나 이때까지 정치적으로 그 누구와도 관련이 없었기에 더욱 그 여파가 클 것이었다.

혹시나 루니아가 충동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었지만 루니아는 자신의 생각을 바꿀 의사가 없어 보였다.

"어차피 스승님도 이제 저한테 모든 권한을 넘겼는걸요. 게다가 선배한테는 빚진 것도 있고. 왜요? 제가 도와주는게 싫어요?"

"그럴리가. 그래도 너희 길드원들의 생각도 들어봐야..."

루니아가 아무리 길드마스터라고는 해도 길드원들과의 상의 하나 없이 이렇게 결정해도 되나 싶었지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희는 괜찮아요. 마스터가 점찍은 남자라면 분명 보는 눈도 있으실테고."

"...괜찮을거라고 생각해요."

아까 나와 함께 욕탕을 나섰던 니아와 노라가 어느새 그곳에 서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곁에는 나를 이곳까지 데려왔던 베일을 쓴 그녀도 함께 있었다.

"루디 씨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저희 길드의 인맥과 바탕은 탄탄하답니다. 저희를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하긴. 수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A랭크 길드의 자리를 지켜온 곳이었다. 고작해야 이런 파벌 싸움 한두 번에 무너질 곳이 아니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건지.

"그래. 도움은 감사히 받으마. 정말 고맙다."

"흥. 고마우면 좀 자주 찾아오기라도 하세요. 이때까지처럼 까먹으면 지지 선언같은건 바로 철회해버릴테니까."

자주 만나고 싶다는 걸 저렇게 틱틱대는 루니아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루니아 역시 싫지 않았는지 눈을 감고 입술의 감촉을 즐겼다.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대답으로는 충분했다.

배웅은 필요없다고 했지만 네 사람은 결국 가게 바로 앞까지 나를 따라나왔고, 그녀들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조만간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이미 깊은 밤이 지나가고 있었기에 거리에는 술에 취해 나자빠진 이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좀 있으면 해가 떠오를 시간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부터 잔다고 하더라도 서너 시간을 넘기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기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당장 내일 만날 사람만해도 몇 명인데 이래서야 제 시간 안에 돌아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수면을 취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해 요정들의 쉼터로 돌아왔다. 뒷정리를 끝낸 카바인은 이미 가게 문을 닫아놓고 있었고,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마 다들 잠들어있을테니 괜히 시끄럽게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다.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가 내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이미 잠들어있던 아이린이 내가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살짝 꿈틀거렸다.

혹여나 깬 건 아닐까 싶었지만 다행히도 아이린은 평소처럼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입고있던 조끼와 겉옷을 적당히 옷걸이에 걸어놓고는 나도 침대에 누웠다.

고개를 돌려 아이린을 쳐다보니 천사같은 얼굴로 잠에 빠져 있는 아이린이 보였다.

내가 아닌 그 누구더라도 지금의 아이린의 모습을 보면 천사같다고 느낄 것이 분명했다.

이제 만난지 반 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녀의 변화는 상상 이상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가지고 있던 탁한 눈동자는 또렷하고 반짝이게 되었고,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져 있던 팔도 살이 붙어서 딱 보기 좋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여자로서의 성장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처음에는 앞과 뒤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평평했던 가슴도 지금은 조금이지만 봉긋하게 솟아올랐고, 전체적인 몸의 선 역시 성숙한 여인의 티가 났다.

이대로 이삼년만 더 지나면 완전히 성숙한 어른의 몸이 되겠지. 내 가슴팍까지 키가 큰 아이린의 모습을 상상하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단순히 딸같이 생각했던 아이가 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물론 아직은 한참 남은 이야기였다. 막상 그 때가 됐을 때 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고 말이다.

그렇게 아이린의 얼굴을 쳐다보며 나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는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루디! 아직 안 일어났어? 아침 식사 시간이야!"

곧이어 들려오는 사야의 부름에 완전히 닫혀있던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렸다.

반쯤 뜬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하며 잠에서 깨어나려는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복숭아빛 입술이었다.

...뭐지. 내가 아직 잠이 덜 깼나 싶어 눈을 뜨고 가만히 있자 그제서야 내 코앞에 아이린의 얼굴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버릇에 내가 다가간 것인지, 그녀가 다가온 것인지는 몰라도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것 같은 밀착상태였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던 나는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려 조심스레 몸을 뒤로 뺐다.

일어나서 보니 원래 내가 누워있던 자리에 아이린이 잠결에 굴러온 모양이었다.

게다가 꿈이라도 꾸는지 입가에는 옅게 침자국마저 남아있었다.

좀 더 재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당장 오늘도 돌아다녀야 할 곳이 꽤나 많았기에 어쩔 수 없이 아이린을 살살 흔들어 깨웠다.

"으응...흡."

잠에서 깨어난 아이린은 자신의 입가를 타고 흐르는 침을 느끼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사내 녀석이 저랬다면 더러웠겠지만 귀여운 아이린이 저러는 것을 보니 부끄러움과 어떻게든 감추려는 초조함이 느껴져서 더욱 귀여웠다.

"...주인님. 보셨어요?"

그런걸 물어보는 시점에서 이미 자신의 실수를 시인하는 것이라는 걸 왜 모를까.

그래도 나는 아이린을 배려해주기 위해 일부러 모르는 척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슨 일 있니?"

내 반응에 아이린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소녀였다.

평소 같았으면 아침에 뻑뻑해서 손가락도 들어가지 않았을 머리칼도 새벽에 욕탕에서 씻은 덕분인지 적당히 옆으로 빗어넘겨졌다.

적당히 겉옷을 거친 다음 문을 열자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사야가 그곳에 있었다.

어젯밤에 죽어라 마셔댔던 여파인지 온 몸이 뻐근했다.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은 숙취 역시 내 정신력을 좀먹고 있었다.

"루디. 괜찮아? 다 죽어가는 사람같아."

사야의 숨김없는 솔직한 감상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제 술을 너무 마셨나봐. 먼저 내려가서 카바인한테 숙취에 좋은 음식으로 준비해달라고 해줘. 금방 내려갈게."

"응. 빨리 와야해?"

"알았어."

사야를 먼저 내려보낸 다음 나는 방에 딸려있는 간이 화장실에서 적당히 물을 받아 머리를 빗고 얼굴을 씻었다. 그제서야 조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그런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아이린이 조심스레 묻자 나는 투박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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