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9/260)

"조금 피곤한것 뿐이란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도 어서 씻고 나오렴."

조금 후 아이린이 씻고 나오자 나는 그녀와 나란히 1층으로 내려갔다. 식당에는 이미 아이린과 나를 제외한 모두가 자리에 착석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로 상태가 안 좋아보이네."

세수를 했지만 여전히 안색이 좋지 않은 나를 본 스텔라가 축복을 걸어주었다. 덕분에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도 줄어들었고 말이다.

"고마워."

"별 말씀을."

자리에 털썩 앉아서 적당히 오늘은 어떤 의뢰를 맡을건지, 요즘 수도에 특별한 일은 없는지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카바인이 음식을 내어왔다.

"오호. 생각보다 빨리 내려왔구만. 자, 숙취 해소에 제격인 훈제 양고기다. 아마 한 입 먹으면 정신이 번쩍 들거야."

카바인의 말대로 내 접시에 담긴 양고기에서는 죽여주게 매운 냄새가 풍겼다. 정신이 번쩍 드는 정도가 아니라 그대로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엄청난 냄새였다.

차마 손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어느새 내 주변의 녀석들은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일종의 압박과도 같은 시선들에 결국 나는 포크와 나이프로 질긴 양고기를 썰었다.

그렇게 썰어낸 양고기를 포크로 찍어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는 순간, 나는 혀가 불타는 것만 같은 감각에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대로 뿜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있는 식당에서 차마 그런 추태를 보일 수는 없었기에 필사적으로 삼키려 했지만 그럴수록 혀를 불사르는 것만 같은 매운맛을 실감할 뿐이었다.

그런 내 반응이 웃긴지 다른 사람들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고, 오직 아이린만이 이런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특히 세이빌은 가게가 떠나가라 크게 웃어댔다.

이 빌어먹을 새끼. 나중에 두고보자.

지옥불로 양고기를 구우면 이런 맛일까. 양고기를 우물거리며 삼킨 나는 황급히 앞에 놓여있던 물잔에 담긴 물을 마셨다.

그제서야 불타는 것 같던 혀의 감각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후우."

"그렇게 매워?"

극적인 내 반응을 본 사야는 호기심이 동했는지 내가 먹었던 양고기를 한 조각 집어 먹었고, 잠시 후 그녀는 얼굴까지 새빨갛게 되서는 소리를 질렀다.

"매워어어어어!!"

꺅꺅대며 허겁지겁 물을 찾는 사야에게 보다못한 스텔라가 자신의 컵을 건네주었다. 벌컥벌컥 물을 마셔댄 사야는 새빨갛게 부어오른 혀를 내밀어 헥헥댔다.

"카...카바이인!!"

그리고는 이 음식을 내온 카바인을 원망스럽게 노려봤지만 그는 껄껄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길 뿐이었다.

그렇게 아침부터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서야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나는 바게트 빵과 샐러드로, 아이린은 콘스프와 샌드위치로 아침을 때웠다.

아침을 먹고나자 다른 녀석들은 슬슬 오늘의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가게를 나섰고, 저녁때 가게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물론 나도 점찍어둔 용병단과 길드들을 순서대로 찾아가야 했다.

다만 아이린을 데려가는 것에 대해서는 꽤나 고민이 필요했다.

사실 지금부터 찾아갈 곳들이 안전과는 꽤나 거리가 있는 곳들이었기에 아이린을 카바인에게 맡기고 다녀오고 싶었지만, 자꾸만 내 바짓자락을 잡고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린을 보면 차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결국 아이린에게 직접 의사를 물어보는 수 밖에 없었다.

"아이린. 오늘 돌아다닐 곳은 조금 위험할 수도 있단다. 괜찮겠니?"

"...주인님과 함께라면. 어디든 괜찮아요."

만약 가게에 남고 싶다고 한다면 두고 갈 생각이었던 나는 아이린의 사랑스러운 대답에 감격하고는 반드시 영지에 내려가기 전에 아이린이 좋아할만한 것을 잔뜩 사주겠다고 결심했다.

아침식사가 끝나고 잠시 헤어진 파티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는 아이린과 함께 먼저 수도의 상점가로 향했다.

입고 있는 옷도 갈아입고, 아이린이 앞으로 입을 옷도 몇 벌 맞추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바스티안 백작가의 고급 의류점이 좋다고 해도 수도에 비빌 수는 없었다.

수도에 있는 고급 의류점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마법으로 가공한 원단을 사용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원단보다도 질기고, 조금 더 비싼 것들 중에는 착용자의 몸에 맞춰 늘어나는 제품들도 꽤나 있었다.

한창 성장때인 아이들에게 맞추기에 좋은 옷이었다. 설령 아이가 성장한다 하더라도 그에 맞춰 옷이 늘어나니 해마다 다른 옷을 맞출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덕분에 대로를 여유롭게 둘러보며 상점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이린은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과 먹음직스러운 간식에 잠시 시선을 빼앗기기도 했지만 금세 나를 따라왔다. 예전에 내가 몇 번인가 찾아온 적 있었던 의류점이었다.

수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실력이 좋은 곳이었는데, 그에 비례하듯이 비싼 가격 때문에 귀족이나 어지간한 갑부가 아닌 이상은 잘 찾아오지 않았다.

"어서오십시...루디?"

다행히 카운터를 보고 있던 여자는 곧바로 나를 알아봤다.

비록 그때의 나는 평상복보다 전투복을 입고있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도시에서 손꼽히는 파티의 리더쯤되면 자신이 싫어도 비즈니스를 해야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럴 때마다 이곳에 찾아와 옷을 맞추는데, 대충 상황을 설명해주면 이런 사교계나 비즈니스에 빠삭한 그녀가 상황에 걸맞는 옷을 추천해주곤 했다.

가끔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된 사실로는 그녀 역시 귀족이지만 방계에 하급 귀족이었기에 이렇게 고급 의류점을 차려서 자신이 잘 아는 귀족을 메인 타겟으로 팔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귀족들은 솜씨 좋은 이 가게에 자신들의 파티나 사교회의 복장들을 맡겼고, 그녀는 솜씨 좋게 그들의 의뢰를 해치웠다.

늘 귀족 손님만을 상대하던 그녀에게 있어서 나는 신기한 존재였고, 덕분에 자주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게 얼마만이니. 한동안 안 찾아오길래 죽은 줄 알았잖아."

"그럴리가 있나요. 누나도 잘 지내셨어요?"

"말도 마렴. 요즘 수도에 의류점이 얼마나 많이 생겼는데. 단골들 덕분에 간신히 유지만 하는거지."

죽는 소리를 하는 그녀였지만 가게는 내가 마지막으로 찾아왔을 때보다도 훨씬 커져있었다.

안쪽에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직원들의 숫자도 늘어났고 말이다.

"그리고 저 애는... 어머. 너무 예쁘다."

내 뒤에 서 있던 아이린을 발견한 그녀는 눈을 반짝였다.

"설마 네 딸이니?"

"그럴리가 있겠어요? 조카에요."

어떻게하면 이 년 사이에 이런 딸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도 농담으로 한 소리였는지 내 대답에 납득하고는 아이린의 미모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찬란한 윤기가 흐르는 보랏빛 머리카락과 또래 소녀들에 비해 훨씬 성숙한 외모.

루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는 아이린이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미소녀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오늘 찾아온 것도 이 아이 때문이겠구나."

"어울리는 옷으로 몇 벌 맞춰줘요. 오랫동안 입을 수 있는 것들로."

내 요구사항을 들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린을 조금 더 관찰하다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이린과 함께 옆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의류점 안에는 우리보다 먼저 찾아온 귀족 영애나 부인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

그들은 화사한 드레스를 갈아입고, 품평하며 고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초라한 자신의 외모를 화사한 옷으로 가리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양 손에 옷을 가득 들고 돌아온 그녀가 말했다.

"자. 너무 튀지 않을 정도의 옷들로 추려봤어. 평소에 입기에도 무리는 없을거야."

그녀가 들고온 옷들은 저쪽에서 계속 갈아입기를 반복하는 귀족들이 입고있는 화려한 드레스가 아니었다.

아이린은 그녀가 권하는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에 탈의실에서 나온 아이린을 보고 나는 숨을 삼켰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기품을 잃지 않는 원피스였다.

은빛 자수가 놓인 검은색 드레스는 마치 밤의 여왕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아이린을 아름답게 꾸며주었다.

가련하고도 기품이 흘러넘치는 아이린의 모습에 나는 넋을 잃고 쳐다보고 말았다. 그런 내 반응을 본 아이린이 부끄러워하면서 원피스의 끝자락을 잡았다.

"...어떤가요?"

마치 찬란한 달빛을 받은 요정같았다.

이 순간만큼은 릴리스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아이린의 모습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아이린을 보고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영애와 부인들 역시 조신하지 못하게도 입을 쩍 벌린채 아이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게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향하자 부끄러워하는 아이린은 종종걸음으로 내 곁에 붙었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린은 그대로 꼬옥 안아주고 싶을 정도였다.

이 아이는 신이 내게 보내준 천사인가?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린은 아름다웠다. 이제막 열두 살인 소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미모였다.

이 자리에 다른 남자들이 없어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다른 남자들이 여기있었다간 아이린의 나이와 관계없이 온갖 날파리들이 꼬였을테니까.

그 뒤로도 여러 옷을 입어봤지만 처음 입었던 원피스의 인상이 너무 강렬했기에 더 놀라지는 않았다.

점주 누님의 말대로 아이린은 탁하고 어두운 색의 의상과 잘 어울렸기에 그런 옷들 위주로 구매했다.

아마 나는 오늘 아이린의 달의 요정같은 그 모습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다만 아이린이 가게를 나올 때 입고있는 옷은 그 아름다운 원피스가 아닌 비교적 꾸밈 없는 서머 드레스였다.

물론 이 옷을 입었다고 해서 아이린의 미모가 감춰지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달의 요정같은 그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을 뿐 의류점에서 팔고 있는 의상들은 모두 아이린의 매력을 한껏 올려주었다.

그 증거로 방금 전에 거리를 걸을 때와는 완전히 딴판으로 우리 곁을 지나가는 남자들마다 한 번씩 고개를 돌려 아이린을 쳐다봤다.

물론 아이린은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내 손을 꼭 잡을 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슬슬 점심을 먹을 때였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미리 잡아놓은 약속 때문이었는데, 그 약속을 한 상대는 B랭크 길드를 이끌고 있는 '보탄'이었다.

그와는 예전에도 몇 번인가 안면이 있는 상대였다. 우연히 던전에서 몬스터들에게 쫓기고 있는 그의 파티를 도와준 것을 계기로 조금씩 친분을 쌓게 됐다.

물론 늘 먼저 다가오는 것은 보탄이었다. 애초에 나는 남들과 친분을 쌓을 정도로 사교성이 좋은 놈도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