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 (160/260)

그와 그의 파티원들은 꽤나 심성이 좋은 녀석들이었다. 마초 기질이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자신이 입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짓을 하는 놈들은 절대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도 녀석들과 우리는 던전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보탄 녀석의 파티 역시 우리 파티보다 약할 뿐 수도에서는 알아주는 유명 파티였기 때문이다.

실력에 큰 차이가 없는만큼 던전에 들어가도 진입하는 층수도 비슷했고, 오우거나 바실리스크와 같은 대형 몬스터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호출받았을 때도 녀석의 파티는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런 대규모 토벌이나 던전 공략이 있을 때마다 녀석과 녀석의 동료들은 종종 내게 목숨을 빚질 때마다 언젠가 반드시 이 은혜를 갚겠다고 내게 약속했다.

물론 말뿐인 약속이었기에 나는 녀석을 놀리듯이 '그 소리도 이제 귀에 딱지가 앉겠다.'라고 맞받아쳤고, 녀석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언젠가는 반드시 나를 돕겠다고 했다.

내가 보탄에게 찾아가는 것 역시 그 때의 기억 때문이었다.

하지만 설령 보탄이 내 부탁을 거절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그가 내게 빚을 졌다고는 하나 그것이 길드원들의 동의도 없이 내게 은혜를 갚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애초에 목숨 빚은 빌려준 돈과 같아서, 상대가 갚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 내 철칙이었다.

설령 그 행동에 대해 보답받지 않더라도 상관없는 마음가짐으로 행해야 스스로에게도, 상대에게도 뒤탈이 없기 때문이었다.

보탄이 길드 마스터를 맡고 있는 길드의 이름은 '발할라의 전사'였다. 하여간 이놈의 마초 근성은 여전히 버리질 못한건가.

어제 미리 약속을 잡아뒀으니 길드에 들어가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B랭크라고는 해도 수도에서 꽤나 오랫동안 활동한 녀석답게 괜찮은 건물을 길드하우스로 두고 있었다.

비록 도시 외곽이지만 겉으로 보기엔 깔끔한 외관과 넓어보이는 건물은 훈련을 하기에도 무리가 없어보였다.

문을 두어 번 노크하자 스킨헤드 머리를 한 남자가 나왔다.

적어도 내가 아는 보탄의 동료들 중에는 이런 녀석이 없었다. 아마 길드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신참이 아닐까.

그는 나와 아이린을 번갈아보았다.

"그쪽이 단장과 약속한 사람?"

"당신의 단장이 보탄이라면 맞겠지."

내 대답에 스킨헤드는 히죽 웃더니 앞장서서 건물을 안내했다. 예상대로 건물 한 켠에는 단련실을 만들어 실전 연습과 운동을 하고 있는 녀석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근육이 울끈불끈한 마초남들 뿐이었다. 하긴, 어떤 여자가 이런 길드에 들어오고 싶어하겠어.

원래부터 보탄이 이끄는 파티에는 여성 파티원이 없었다.

늘 마초 근성으로 몬스터들과 몸으로 부대끼며 전투를 벌이는데, 처음에는 높은 길드 랭크에 혹해서 들어왔던 여자 모험가들은 이런 땀냄새나는 분위기를 견뎌내지 못하고 다들 탈퇴했다.

뇌까지 근육으로 된 놈들로 만들어진 길드. 그곳이 바로 발할라의 전사였다. 당장 내 앞에서 걷고 있는 스킨헤드만 봐도 옷 너머로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단장인 보탄의 방은 제일 꼭대기층에 위치해 있었다.

"이 안이 단장의 방이야.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들어가봐."

녀석의 말투는 경박하기 짝이 없었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보탄 녀석도 그렇고, 녀석의 파티원들도 그렇고 하나같이 자신이 직접 상대의 실력을 보기 전에는 인정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이대로 가는 것은 내가 꼬리를 마는 것처럼 보일테니, 조금만 실력행사를 하기로 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악수나 하지."

뜬금없이 악수를 하자는 내 말에 녀석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녀석도 내 의도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 악수 좋지."

그럼에도 거부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힘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스킨헤드는 근육으로 단련된 팔을 내밀어 내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내 손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악력을 발휘하는 녀석이었지만 나는 여유롭게 그의 힘을 견뎌냈다.

예전에 보탄 녀석과도 이러곤 했었는데, 그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때의 나는 아직 어렸기에 이런 시비조의 말투와 도발에 비교적 쉽게 넘어가는 편이었다.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는게 내 성격이었고, 내가 켈디락의 미친개라 불렸던 이유중 하나가 거기에 있었다.

녀석의 악력을 여유롭게 견디던 나는 손에 마나를 둘러 강화시켰고, 조금 힘을 주는 순간.

"흐억!"

우두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손이 기이한 방향으로 뒤틀렸다. 끔찍한 고통에 녀석은 인상을 찌푸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제서야 힘의 차이를 실감한 모양이었다.

원래부터 회복력이 좋은 녀석들이라 저대로 놔둬도 하루이틀이면 뼈가 붙겠지만 나는 품에서 포션을 하나 꺼내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조금만 더 힘을 줬다간 그대로 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왔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린이 옆에 있는데 그런 잔인한 모습까지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 고생하라고."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나는 거리낌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재로 보이는 방 안에서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던 보탄은 오랜만에 나를 보고는 킬킬 웃어댔다.

"보아하니 밖에서 또 한바탕했구만?"

"신참 교육 좀 대신 시켜줬을 뿐이야. 상대의 수준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죽음과 직결되잖아? 그런 점에서 오히려 저 녀석이 내게 목숨을 빚진거지."

내 능청맞은 대답에 보탄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하여간 켈디락의 미친개 아직 안 죽었구만. 네가 말도 없이 수도에서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믿기지도 않았다고."

"호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보탄이 그런 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

"왜냐하면 네놈은 우리와 동류라고 생각했거든. 언제까지고 몬스터와 싸울 줄 알았다. 몬스터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친 널 보면 영원한 투쟁을 이어나갈 줄 알았거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이제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지키고 싶은게 생겼거든."

내 옆에 앉은 아이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자 보탄은 내 말뜻을 대충 이해했는지 아이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이 네 선택이라면 존중해야겠지. 그래서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한 이유는?"

나는 잠시 고민했다.

보탄이 예전에 했던 말을 언급하며 약속을 지켜달라고 할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의 호의에 기대어 도움을 요청할 것인지.

그의 마음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단연 전자가 옳다. 지워뒀던 빚을 써먹을 절호의 기회니까. 하지만 결국 나는 그러지 못했다.

"도움이 필요하거든. 4황녀를 위한 파벌을 만드는 중이야. 그리고 그 파벌에 보탄 네가 들어와줬으면 좋겠고."

과거에 보탄이 무슨 말을 했든, 지금 내가 그에게 부탁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만약 상대가 비즈니스 상대라면, 다시는 얼굴을 볼 일이 없는 상대라면 물론 전자를 택했겠지.

하지만 나는 보탄을 내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우리 파티는 아니어도 자주 만나는 친구. 몇 번인가 등을 맞대며 몬스터들과 끝없는 사투를 벌였던 전우라고 말이다.

만약 그가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좋아."

"......응?"

뒤적거리던 서류철을 덮는 보탄은 너무나도 흔쾌히 내 부탁을 받아들였다.

"왜 그러냐? 설마 부탁을 거절할거라 생각한거야?"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다른 동료들이랑 상의는 안 해도 되냐?"

"내 동료들 모두 너한테 한 번씩은 목숨을 빚졌다. 반대가 있을리가 없지."

그럼에도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있자 보탄은 자신의 가슴팍을 가볍게 두드렸다.

"전사는 동료에게 받은 도움을 잊지 않는다. 은혜와 원한은 모두 두 배로 갚는다. 당연한 일을 행했을 뿐인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저렇게 단호하게 선언하니 오히려 내 쪽이 뻘쭘해졌다. 이래서야 내가 준비해온 다른 설득의 재료가 의미가 없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보탄은 원래 저런 녀석이었다. 불의를 참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했다.

설령 그것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더라도 녀석은 특유의 쇠고집을 발휘해서 전력으로 부딪쳤다. 그런 녀석이었다.

변함없는 그의 성격에 내가 헛웃음을 터뜨리자 보탄도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방금 전에 내가 스킨헤드에게 했던것과 마찬가지로 악수를 하자는 뜻이었다. 다만 방금 전의 악수와는 의미가 꽤나 달랐다.

굳은살이 잔뜩 박혀 있고, 흉터가 많이 남아있는 그의 손이었지만 내게 있어서는 영광스러운 전사의 훈장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최전선에서 몬스터들과 싸웠다는 증거니까.

묵직한 그의 손에서 전해져오는 위압감은 역시 장난이 아니었다.

악수를 하며 서로에 대한 우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우리는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들에 대해 나누기 시작했다.

내가 황녀를 돕기로 한 이유부터, 황자와 황녀들에 대한 정보도 보탄에게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허어, 그런 뒷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보탄도 나도 모험가로서 십 년이 넘게 굴렀던만큼 귀족과 황족들이 마냥 고귀하고 순결한 이들이 아니라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오히려 비겁하고 비열한 술수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이들이 바로 '고귀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자세한 속사정을 들은 것은 보탄도 처음인지 그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비록 어머니는 모두 다르다하나, 한 핏줄이거늘 어떻게 그런 금수만도 못한 짓을 하는지. 쯧쯧."

이 순간만큼은 나도 보탄의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보탄은 내게 자세한 속사정을 듣고는 더욱 열의를 불태우며 제4황녀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했다.

사실 이름뿐인 파벌이라 그가 협조를 할 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나는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보탄은 점심 식사라도 함께하지 않겠냐고 했지만 이 뒤로도 다른 길드들과의 약속이 있었기에 나는 그의 권유를 정중히 거절했다.

보탄은 아쉬워했지만 다음에 만날 때는 술이나 한 잔 하자는 내 말에 호탕하게 웃으며 나를 배웅해주었다.

스킨헤드 녀석한테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단련실에 틀어박혀있던 보탄의 동료들도 나와서 나를 반겨주었다.

비록 바로 헤어지긴 했지만 다음에 만났을 때는 꼭 대련을 하자고 하는 그들은 역시나 뼛속까지 마초였다.

'이걸로 벌써 세 번째인가.'

생각보다 너무나도 쉽게 파벌의 구성이 완성되는 바람에 오히려 내가 놀랄 정도였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마탑, 반쯤 잊어먹고 있었던 월야의 무희, 너무나도 흔쾌히 부탁을 들어준 발할라의 전사까지. 이렇게 손쉽게 해결되버려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당장 이 셋만 하더라도 지금 황자와 황녀를 지지하는 파벌 중에서는 최대 규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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