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화 (161/260)

지난번에 듣기로는 가장 유력한 황제 후보인 1황자가 A랭크 길드 세 개에 용병단 몇 개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했으니.

물론 그 하위조직까지 합치면 규모는 더 커지겠지만 마탑과 월야의 무희가 가지는 이름값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특히 이때까지 중립만을 고집했던 두 집단이 지지를 보낸다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법도 하나 생각중이었다.

물론 에디스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녀의 문제를 뿌리 뽑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결국 그 방법을 사용하려면 더 많은 파벌을 긁어모아야했다.

다른 황자와 황녀들이 결코 에디스를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의 파벌을 만들어내는 것이 내 계획의 조건 중 하나였다.

그래도 보탄의 마지막 말 덕분에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나 뿐만 아니라 널 기다렸던 녀석들도 잔뜩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거다. 모험가는 결코 은원을 잊지 않으니까.'

은혜와 원한은 모두 두 배로 갚는다. 보탄이 했던 그 말은 모험가들 사이에 격언처럼 내려오는 말이었다. 모험가는 다른 직업보다 많은 의심을 가져야 하는 직업이었다.

던전 안에서도 서로의 재물을 노리는 살인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아예 신입 모험가들의 주머니를 전문적으로 털고 다니는 악질적인 놈들도 있었다.

그런 놈들은 많은 모험가들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얼마 가지 못해 뒷골목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곤 했다.

모험가들은 일반인들보다 강하고 독기를 품은 놈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원한을 가진 자는 철저하게 복수하고,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은혜를 갚았다. 그런 모험가들의 성격 덕분에 생겨난 격언이었다.

그리고 보탄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길드들을 찾아갔을 때도 그들은 나를 무척 반기며 내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들 대부분이 B랭크 이상 길드의 수장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놀랍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루디. 당신은 모르겠지만 수도의 모험가들의 대부분은 그대에게 목숨을 한 번씩 빚졌을거요. 바실리스크, 오우거 로드, 레비아탄까지.

쟁쟁한 몬스터들을 해치우며 우리들을 살려내준 당신이라면 이런 부탁따위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지."

언제부터 우리 모험가들이 정치에 신경을 썼다고 그러고 있소? 우리에게는 저 멀리 있는 왕보다도 가까이 있는 모험가들의 전설인 당신이 더 위대한 것을.

단순명료한 그의 말에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나 같은 놈한테 '위대하다' 같은 거창한 표현을 쓰는 그의 재치가 재밌었기도 하고, 설마하니 이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 때의 내가 했던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몬스터들을 죽이고, 또 죽였던 것 뿐이다.

어릴 때 겪었던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증오를 해소하기 위해 행했던 일들이 그들에게는 용맹한 전사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몬스터들의 대규모 토벌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나는 그들을 구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사야와 스텔라를 비롯한 다른 파티원들이 먼저 부상자들을 구해내고 전투를 이어가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고 했기에 그 말대로 했을 뿐이다.

몬스터들에 의해 다치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할 때 나는 살가운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나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했다.

'만약 그 때 내가 이들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부탁을 쉽게 들어주진 않았겠지.'

결국은 다른 파티원들이 나를 바꿔놓은 것이었다.

사야는 내게 동정을 가르쳐주었고, 스텔라는 자비를, 카니스는 여유를 가르쳤다. 세이빌은... 그 놈은 남한테 뭘 가르칠 놈이 아니니 넘어가도록하자.

지나가며 마주치는 빈민이나 거지들을 보면 늘 불쌍해하는 사야는 그들을 보며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 나를 꾸짖었다.

쉬는 날마다 교회를 찾아 기도를 드리는 스텔라는 자신의 축복이나 가호를 거리낌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며 내게도 베푸는 삶을 살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언제나 여유롭게 웃고있던 카니스는 내게 세상을 사는 요령이 필요하다면서 조금 더 여유를 갖추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신기하게도 오늘 만났던 사람들은 다들 똑같은 소리를 했다. 당장 지금 내 앞에서 말하는 남자처럼.

"그건 그렇고 예전에 비해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 같소. 아, 물론 좋은 쪽으로 말이오."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비록 말주변 좋게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할 수 없었지만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외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찾아오시오."

이 길드가 수첩에 적어놨던 마지막 길드였다. 내가 수첩에 메모해뒀던 15개의 길드들 중 13개의 길드가 내 부탁을 받아들였다. 나머지 두 곳은 길드원들과의 상의 후에 연락을 준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 내가 찾아갔을 때 반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조차 못하는데 내게 달려와서는 몇 년 전에 던전에서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기도 하고, 우리 파티인 스텔라의 회복 주문 덕분에 간신히 살았다며 감사인사를 전해달라고 하기도 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수첩을 가볍게 두드렸다.

포섭에 성공한 길드 13개는 A랭크 길드 세 곳에 B랭크 길드 일곱 곳, 나머지는 C랭크 길드들이었다.

이 정도면 수도에 위치한 길드들 삼 분의 일 가까이가 포섭된 셈이었다.

전례 없는 대규모 파벌의 결성은 이 계획을 세운 나조차도 놀랄 정도였다. 돈을 주면 얼마든지 목숨을 받치는 용병단과 다르게 모험가들의 길드는 그 성질이 무척 달랐다.

자유분방한 성격을 띠고 있는 모험가 길드들이 이렇게 한 사람의 아래에 들어가는 일은 역사를 통틀어도 몇 번 없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다 마탑과 월야의 무희 길드를 더하는 순간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하게 된다.

설마하니 이렇게 일이 잘 풀릴줄은 몰랐기에 나는 세워뒀던 계획을 대폭 수정해야했다. 마지막 길드와의 만남이 끝나고 요정들의 쉼터로 돌아올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요정들의 쉼터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모험가들로 바글바글 거렸다. 그들은 아이린과 함께 돌아온 나를 보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루디가 돌아왔다!"

"켈디락의 미친개!"

"모험가들의 영웅!"

녀석들은 각기 다른 이름으로 나를 불렀다. 어느 쪽도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 같은 놈한테 영웅이라는 이름이 붙는게 조금 낯간지럽기는 했다.

영웅이라는 칭호는는 나보다도 뛰어나고 대단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가?

이미 술에 취한 녀석들은 계속해서 내 이름을 외쳐댔고, 나는 그런 녀석들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왔다.

시간이 늦은만큼 사야를 비롯한 파티원들은 이미 식사를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들의 식탁에는 아직 아무런 음식도 없었다.

"먼저 뭐라도 먹지 그랬어. 배고플텐데."

"리더가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맞아! 루디가 없으면 안 되는걸!"

스텔라와 사야의 말에 가슴 한 켠이 뭉클해졌다. 그런 따스한 분위기를 박살낸 것은 세이빌의 배에서 울려퍼지는 꾸르륵거리는 배꼽시계였다.

그는 멋쩍은 듯이 검지로 뺨을 긁적였지만 이미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워져 있었다.

"...그래. 어서 주문하자. 오늘 하루는 먹고 싶은거 전부 다 시켜도 되니까 걱정 말고 얼마든지 시켜."

파티원들에게 입은 은혜를 오늘 새삼 다시 자각할 수 있었다. 이 중에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는 없었겠지.

"정말?! 그럼 일단 블랙 오크 고기부터..."

내가 쏜다는 말에 잔뜩 신이 난 사야는 카바인을 불러 온갖 메뉴들을 주문하기 시작했고, 세이빌 녀석 역시 사야와 함께 먹고 싶은 음식들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반면 스텔라와 카니스는 별로 저녁 생각이 없는지 평소에 먹던대로 정식을 하나씩 주문했다.

신이나서 주문을 하고 있는 세이빌과 사야를 보고 있던 내 옆으로 의자를 끌어온 카니스는 평소처럼 느긋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그의 외모는 서른 전후지만, 사실 그의 나이는 쉰이 다 되어갔다.

그렇게 쌓인 연륜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나라고해도 쉽사리 적응하기 힘들었다.

"보아하니 오늘 있었던 일들은 잘 된 모양이네."

"제가 생각하는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와는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더군요."

"너는 스스로를 너무 폄하하는 경향이 있어. 그 녀석들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네 부탁을 들어준 것 같나?"

카니스의 질문에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나도 쉽게 수락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하지 않냐고 할 정도였으니까.

"글쎄. 모험가들은 무엇보다도 자유와 안전을 끔찍하게 사랑하지. 그런데 황족의 파벌에 소속되는 그런 중대사를 아무런 생각도 없이 결정을 내렸을리가 없지 않나. 그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자유와 안전보다도 네 부탁이 더 중요했다는 걸 잘 생각해봐."

"......"

카니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것처럼 평소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와 카니스의 이야기를 들은 스텔라 역시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카니스의 의견에 수긍했다.

아무래도 나 말고는 다들 아는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저기 있는 바보같은 수인족 두 명은 빼고 말이다.

나는 그들이 별다른 고민 없이 수락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자유와 안전보다도 내게 입었던 은혜를 갚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역시 카니스는 평소에는 과묵하면서도, 이렇게 중요한 순간마다 내게 가르침을 주곤했다. 이것이 연륜이라는 것일까.

나는 남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카니스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나 역시 이번 일을 잊지 않기로 했다. 내 부탁을 들어준 이들을 한 명도 까먹지 않고 모두 기억할 것이다.

그래. 분명히.

'은혜와 원한은 모두 두 배로 갚는다.'

이번에 입은 은혜를 다음에 어떤식으로든 그들에게 갚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그런 다짐을 하는 와중에도 주변의 다른 녀석들은 눈치없게 술을 마셔대며 떠들었다. 결국 나도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미 수도에서 해야할 일은 모두 마무리 됐으니 아무런 걱정없이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그런 내게 세이빌이 술내기를 신청하고, 여관에 남아있는 술이 바닥날때까지 번갈아가며 술잔을 비워댄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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