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화 (162/260)

술자리가 끝나고, 완전히 난장판이 된 식당을 보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바닥에는 술에 취해 쓰러진 놈들이 즐비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세이빌이 도발조로 말한 술내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는데.

녀석은 누가 수인족 아니랄까봐 술을 엄청나게 마셔댔다. 그에 오기가 생긴 나도 평소보다 흥분해서 술을 마셔댔고... 그 결과가 지금 이 모양이었다.

진즉에 곯아떨어진 세이빌은 탁자에 얼굴을 쳐박고는 코를 골아대고 있었다.

스텔라는 술을 못 마시는 사야를 데리고 먼저 올라갔고, 카니스는 어느 순간부터 말도 없이 사라졌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얼굴을 찌푸리자 이런 술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비록 술에 취해 시야가 흔들렸지만 이 목소리는 분명 아이린의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술내기를 하는 동안 아이린은 계속 혼자 있었겠구나.

홀로 외롭게 있었을 아이린을 상상하자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이 몰려왔다.

가뜩이나 아이린은 이곳에 친한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몇 시간 동안이나 가시방석 같은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나는 아이린을 끌어안고 되는대로 사과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술에 취했기 때문인지 평소보다도 더욱 빈곤한 어휘력의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분명 내가 아이린을 달래야 하는데 오히려 아이린이 그런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하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딸 뻘인 아이에게 술주정을 부리는 한심한 짓을 하게 될 줄이야.

당장이라도 멈춰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린의 품 안이 무척 따스해서 쉽사리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특히 아이린이 마치 우는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게 조금 더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그래도 초월적인 의지를 발휘해 간신히 아이린의 품에서 빠져나온 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의 중심을 잡았다.

술에 취해 자꾸만 시야가 흔들렸지만 아이린이 걱정스런 눈길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녀 또래의 다른 아이들이었다면 술냄새 난다며 기피하는게 정상일텐데 아이린은 끝까지 내 곁에 남아서 걱정해주는 것이다.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린의 어깨를 잡고 비틀거리며 2층의 내 방으로 향했다.

몽롱한 정신 때문에 계단을 한 걸음 올라갈 때마다 몸이 휘청거렸지만 아이린이 나를 꽉 잡아준 덕분에 어찌어찌 계단을 끝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이틀 내내 폭음이라니. 내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분이 아주 죽여주겠군.

어쩌면 숙취 때문에 침대에서 못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중간중간 몇 번이나 마나를 운용해서 술기운을 몰아냈음에도 이 정도니 내일 아침에 어떻게 될지는 이미 예상이 됐다.

"주인님..."

계속해서 휘청거리는 나를 부축한 아이린은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마셔댔으니 술냄새가 심할텐데도 아이린은 싫은 내색 하나 표하지 않고 내게 착 달라붙어 부축해주었다. 얼마나 착한 아이인지.

그렇게 비틀대며 방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쓰러지듯이 침대에 몸을 던졌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반면 술 한 모금 안마신 아이린은 내 뒤편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사락, 스륵. 아이린이 옷을 갈아입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렸다. 쓸데없이 귀가 밝아서는 이런 소리까지도 잘 들렸다.

곧이어 침대가 들썩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이린이 내 곁에 누웠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은빛 자줏빛 원피스로 갈아입은 아이린이 있었다.

아이린 역시 나를 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쳤는데, 혹여 입에서 술냄새가 날까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사실 아이린의 눈을 그대로 마주하고 있으면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할 것 같았다.

분명 아이린은 원래부터 예쁘고 사랑스러웠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그야말로 절세미녀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어 보였다.

유리 공예처럼 섬세하게 다뤄야만 할 것 같은 가냘픈 몸, 자줏빛 원피스에 무척 잘 어울리는 윤기흐르는 머리카락, 나를 빨아들이는 것만 같은 마성의 눈빛까지.

오늘 새벽에 루니아를 비롯한 그녀들과 섹스를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이며 체력을 소모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이성을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

아이린은 이제 막 열세 살이 된 소녀일 뿐이었다. 어린애를 상대로 한순간이나마 그런 생각을 품다니.

분명 릴리스를 상대로도 먼저 음심을 품지 않은 나였는데, 아이린은 릴리스와는 다르게 마치 유혹하는 듯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후우."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하는순간 아이린의 미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혹시 주무세요?"

혹시나 내가 술에 취해 환청을 들은것인가 싶었지만 고개를 돌려보니 아이린은 불빛 하나 없는 방에서도 흑요석같은 눈을 반짝이며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니? 아이린."

내 대답에 아이린은 입술을 짓씹더니 조금 시간이 지나고 어딘가 간절하기까지 한 말투로 속삭였다.

"주인님은...몬스터를 싫어하시나요?"

상식적으로 몬스터를 좋아하는 인간이 어디있겠냐 싶지만 아이린의 그 말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아이린이 나를 부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늘 여관에서 대부분의 녀석들이 나를 불렀던 칭호중 하나가 '몬스터 학살자'였다.

그 뿐만 아니라 내가 한창 미친놈마냥 몬스터들을 썰어댈 때의 이야기도 간간히 나왔다.

비록 몬스터는 아니지만 마족인 아이린의 입장에서는 두려움을 넘어서 공포를 느껴도 이상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에 빠졌던 나는 술에 취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원망하며 최대한 머릿속의 말을 정리했다.

"글쎄. 예전에는 그랬을 때도 있었지. 내가 어릴 때 부모처럼 따랐던 사람들을 앗아간 것도 몬스터들 때문이었거든."

아직도 그 지옥도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늘 친절하던 이웃들의 살려달라는 처절한 비명, 그리고 내가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여겼던 누나의 '도망쳐!'라는 말까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때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결국 그 날 나는 우리 마을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힘이 없는 꼬맹이였기에 누구 하나 구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도망쳤다.

나약한 자신이 미워서 독기를 품었다. 누구보다 강해지기 위해서 마법을 배웠고, 검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악몽과도 같은 그 기억을 잊기 위해서 미친듯이 몬스터들을 죽였다.

온 몸이 피범벅이 되서 더 이상 몬스터들이 시야에 남아있을 때까지 소탕했다. 내 몸에 남아있는 상처들은 대부분 그 때 남겨진 것이었다.

모험가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의뢰를 맡았다면, 나는 몬스터를 죽일 수 있는 의뢰라면 닥치는대로 받아서 해치웠다.

의뢰가 없는 날에도 몬스터를 잡으러 가서는 그들의 사체에서 나온 부산물을 팔아치우는 것으로 질긴 목숨을 연명했다.

이제와서 되돌아보면 광기에 미쳐 있던 시절이었다. 그야말로 살의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갔었으니까. 지금까지 살아있는게 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별로 신경 안 써."

어느 순간부터 몬스터를 죽이는 것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이런 것을 복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나 자신의 자기만족을 위해서 속죄라는 변명을 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런 감정이 날이 갈수록 더욱 커졌기에 결국 모험가를 그만뒀다.

몬스터에 대한 맹목적인 적의도 점차 사그라들었고, 내게 적의를 품고 덤벼오는 놈이 아닌 이상은 굳이 죽이지 않았다.

과거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과거에 사로잡힐 필요 또한 없었다.

"...그러니까, 설령 네가 마족이라도 내게 미움받을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아이린 너는 이미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니까."

어차피 술에 취한 김에 아이린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아이린이 마족. 그것도 서큐버스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고 말이다.

눈을 떠서 마주본 아이린은 어느새 눈물까지 머금고 울먹거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며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주인님...저는... 주인님이 절 싫어하시게 될까봐... 흑..."

부디 이걸로 아이린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부담을 조금 더 덜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가 마족이라고 해도 그녀의 알맹이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하며 귀여움받고, 내가 쉬라고 해도 스스로 내 일을 돕는 착한 아이.

그리고 이제는 내게 있어서 모든 것인 소녀.

애타게 나를 부르는 아이린의 머리를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달래니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하긴, 그렇게 술을 마셔놓고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고 있었던 것이 신기한걸지도.

나는 점점 희미해져 가는 의식과 함께 눈을 감았다. 아마 내일 낮이 되서나 일어날 수 있겠지.

그렇게 깊은 잠에 빠지는 순간, 꿈결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아름다운 꿈의 지배자라 불리우는 '몽마(夢魔)'의 것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성이었다.

"사랑해요. 주인님."

이윽고 내 입술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던 것 같지만,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기에 그것이 꿈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다음날 눈을 뜬 나는 홀가분한 몸과 두통 하나 없는 맑은 정신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지?"

분명 어젯밤에 죽어라 술을 마시고, 아이린에게 부축을 받아 방에 돌아온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의 기억이 없었다.

이렇게 아이린과 함께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는걸보면 별다른 일은 없었을 것 같기는한데...

그런데 어떻게 내 정신이 이렇게 멀쩡한지는 스스로도 해결 할 수 없는 의문이었다.

이틀 내내 그렇게 폭음을 해댔으면 지금 일어났을 때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 컨디션은 숙취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좋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다른 곳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려 했지만 내 방에 있는 것이라고는 내가 챙겨온 옷들과 포션 몇 병, 그리고 아직도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 아이린 뿐이었다.

"...응?"

어쩐지 아이린의 키가 조금 더 커진 것 같았다.

아니, 커진 것은 키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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