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4화 (164/260)

결국 몇 번이나 악몽에서 허우적되던 저는 아침이 되고 나서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애타게 주인님을 부르던 저는 눈을 번쩍 뜨자마자 주인님을 찾았습니다.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오한마저 들었지만 그런 것보다도 주인님이 제 곁에 있다는 것을 먼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다행히도 주인님은 먼저 일어나 계셨습니다.

악몽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던 저는 주인님의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잠이 깨며 제 입가에 묻어있는 침자국을 알아차리고는 황급히 팔을 올려 닦았습니다.

"...주인님. 보셨어요?"

"아니. 무슨 일 있니?"

다행히도 주인님은 보지 못하셨는지 아무렇지 않으셨습니다.

자면서 침이나 흘리는 여자애라니. 만약 주인님께 들켰다면 부끄러워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때마침 밖에 찾아온 사야라는 소녀 덕분에 저는 몸상태를 점검할 수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이어진 악몽 때문에 정신은 피폐했지만 몸은 등에 식은땀이 나서 옷이 젖은 것을 제외하고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제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주인님께 들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분명 주인님이시라면 그런 저를 걱정하실테니까요.

중요한 일을 하시는 중인 주인님을 돕지는 못할망정 민폐를 끼치는 짓은 절대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에도 악몽에서 나왔던 그가 제게 속삭이는 것 같았습니다.

'네가 아프고 쓸모없어지는 순간 네 주인은 널 가차없이 버릴 것이다.'

저는 고개를 도리질하며 악마같은 목소리를 떨쳐냈습니다. 주인님이 그러실리가 없으니까요. 분명 지난번에도 주인님은 저를 아낀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마법까지 가르쳐 주시며 제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분명 그럴 일은 없습니다.

...비록 주인님의 정을 받지는 못했지만요. 주인님과 누구보다도 가까운 곳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지만 정작 저는 아직까지 주인님과 한 번도 이어진 적이 없습니다.

저는 상관없는데, 오히려 주인님이 제 몸으로 스스로의 욕구를 해소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주인님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린아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외출하셨던 주인님에게서 다른 여자 냄새가 나는 것에 제가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것도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분명 제가 주인님과 가장 가까울텐데, 정작 저만 주인님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분명 노예 경매장에서 주인님에게 팔렸을때는 지금과 정반대였을텐데, 이제는 주인님이 저를 안아 주지 않으시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물론 주인님이 저를 소중하게 여기시기에 그러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제가 주인님의 것이라는 증거물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제가 지금 목에 차고 있는 목걸이를 늘 관리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였습니다. 주인님과 저를 이어주는 증거였으니까요.

주인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리고 주인님과 입을 맞추고 몸을 겹치는 스스로를 망상하며 수음을 하는 것도 수십번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들도 일시적으로 욕망을 억누른 것일 뿐, 날이 갈수록 주인님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져만 갈 뿐이었습니다.

주인님의 탄탄한 몸과 옷 너머로 감춰져 있는 상처들을 보듬어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제 망상일 뿐, 결국 저는 주인님에게 말 한 마디 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몸에 대한 자신이 없었습니다. 주인님에게 찾아오는 여자들은 대부분 풍만한 가슴과 늘씬한 다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저는 아직 키도 작고, 가슴도 거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인님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빈약한 몸으로 하는 유혹에 넘어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날 아침에 주인님은 제게 오늘 갈 곳은 위험할 것이라고 주의를 주셨지만 저는 주인님과 함께라면 어디든 괜찮으니 따라가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어제 들었던 이야기 때문에 가뜩이나 마음이 심란한데, 몸까지 주인님과 떨어져 있으면 정말로 정신이 나가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주인님을 따라나선 저는 무척 화려한 옷가게에 도착했습니다.

귀족들이나 입을법한 고급스런 드레스와 양복들이 즐비하게 배치되어 있는 모습에 저는 당연히 주인님의 옷을 사러 온 줄 알았지만, 주인님은 가게의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께 제 옷을 골라달라고 하셨습니다.

제게 이런 값비싼 옷은 필요없다고 말리려 했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주인님이 내게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에 조금은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주인님이 당장 저를 내치실 생각은 없다는 뜻이니까요.

결국 저는 입을 다물고 얌전히 주인 아주머니가 추천해주시는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처음으로 추천 받은 옷은 검은 원피스였습니다. 다만 가슴팍 주변에 아름다운 은빛 자수가 정성스레 놓여 있었습니다. 제가 이런 고급스런 옷을 입어도 되나 싶었지만 탈의실 밖에서 주인님이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서둘러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분명 제 체격에 비해 조금 더 큰 옷이었는데 옷을 입자 제 몸에 맞춰 옷이 줄어들었습니다. 이것도 마법의 힘인걸까요?

혹여나 주인님이 마음에 안 들어하시면 어쩌나 싶어 쭈뼛거리면서 탈의실에서 나왔습니다. 주인님은 저를 빤히 쳐다보시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가요?"

가만히 서 있는 것이 부끄러워 조심스레 여쭤봤지만 주인님은 멍하니 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셨습니다.

제게 옷을 추천해주신 아주머니가 주인님을 툭툭 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주인님은 제게 무척 잘 어울린다는 말과 함께 옷을 구매하셨습니다.

나중에 계산할 때가 되어서야 주인님이 사신 제 옷들의 가격이 포션 수십 병의 값과 맞먹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먹었지만 정작 주인님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돈을 내고 옷이 담긴 가방을 받으셨습니다.

그 후에는 주인님의 뒤를 따라 다녔습니다.

주인님과 떨어져 있을 때도 있었지만 친절한 길드의 직원분들은 제게 다과나 음료를 내어주었습니다.

드물게는 주인님과의 관계를 물어보시는 분도 계셨지만 삼촌이라고 하니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곳의 길드들을 돌고 여관으로 돌아오니 저도 조금 피곤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따라다닌 저보다도 주인님이 훨씬 피곤하셨을 것이기에 저는 내색하지 않고 주인님의 곁을 지켰습니다.

다행히 주인님은 성공적으로 설득을 끝내셨는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셨습니다.

주인님은 파티원들과 함께 잠시 이야기를 나누시더니 다른 모험가분들과도 술잔을 나누셨고, 나중에는 술내기까지 참가하셨습니다.

어젯밤 내내 악몽에 시달리는 바람에 한 숨도 자지 못해 중간중간 깜박 졸기도 했지만 저는 최대한 정신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오늘 꼭 주인님께 물어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드디어 술자리가 끝나고 주인님을 제외한 다른 분들은 모두 곯아떨어지셨습니다. 술이 센 편이신 주인님마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실 정도였으니까요.

비틀거리는 주인님이 넘어지시기 전에 주인님의 옆으로 다가가 주인님을 부축했습니다.

주인님에게서 술냄새가 풍겨왔지만 오히려 저는 주인님의 그런 모습에 두근거렸습니다.

늘 철두철미하고 냉정한 주인님의 이런 흐트러진 모습은 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주인님은 방에 들어오시자마자 침대에 쓰러지셨습니다.

저는 먼저 옷을 갈아입은 다음 조심스레 주인님의 옆에 누웠습니다. 분명 오늘 아침부터 주인님께 물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상황이 찾아오니 입이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주인님. 주무세요?"

혹시나 주인님이 벌써 잠드셨으면 어떡하나 싶었지만 다행히 주인님은 제 쪽으로 몸을 돌려주셨습니다.

"왜 그러니? 아이린."

평소처럼 자상한 목소리로 저를 걱정하는 주인님의 모습에 저는 오늘 내내 속에 품고 있던 질문을 털어놓았습니다.

"주인님은...몬스터를 싫어하시나요?"

아아. 결국 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말하면서도 제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몬스터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래도 저는 주인님의 솔직한 생각을 듣고 싶었습니다. 설령 그것이 제 마음을 아프게 하더라도 말이에요.

주인님은 잠시 고민하시더니 담담히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글쎄. 예전에는 그랬을 때도 있었지. 내가 어릴 때 부모처럼 따랐던 사람들을 앗아간 것도 몬스터들 때문이었거든."

주인님의 말을 들은 저는 가슴이 철렁거렸습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주인님을 죽인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만약 제가 그런 상황을 겪는다면 미쳐버리겠지요. 평생 잊지 못할 분노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님이 몬스터에게 그런 감정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자 저는 기분이 울적해졌습니다. 결국 마족인 저는 주인님의 곁에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일까요.

"하지만 지금은 별로 신경 안 써."

저는 이어서 들려온 주인님의 말에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런 일을 겪으시고도, 어떻게 저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걸까요.

모험가로 활동하며 몬스터를 엄청나게 죽이셨다고 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그런 분노를 비롯한 다른 감정이 마모되어 버린 것일까요.

평소에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시는 주인님이시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설령 네가 마족이라도 내게 미움받을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아이린 너는 이미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속삭이며 주인님은 저를 끌어안으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결국 북받친 감정을 참지 못한 저는 주인님의 품에서 펑펑 울어댔습니다.

이때까지 주인님께 미움받을까봐 걱정했던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습니다.

주인님은 그런 제 머리를 평소처럼 쓰다듬어주셨고, 주인님의 품에 안겨 잔뜩 어리광을 부렸습니다.

주인님을 만나기 전에는 감정이라고 할만한게 거의 남아잇지 않았었는데, 이상하게 주인님을 만난 이후로는 자꾸만 울게되는 것 같습니다.

분명 저는 주인님을 만나며 마모되었던 감정이 복구된 것이겠지요.

이제부터는 제가 주인님의 감정을 되살려놓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제가 마족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주인님의 노예이고, 언제까지고 주인님의 곁에 남아있을 것이라는 사실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제가 울음을 그친 것은 제 머리를 쓰다듬던 주인님의 손길이 멈추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습니다. 주인님은 얕게 숨을 내쉬며 잠들어 계셨습니다.

취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붉어져 있는 늠름한 얼굴과 제가 늘 꿈꿔왔던 입술을 보고 저는 꼴깍 침을 삼켰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방금 전까지 펑펑 울며 감정이 고조되어 있던 저는 저도 모르게 마음 속에 담겨있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습니다.

"사랑해요. 주인님."

그대로 주인님의 입술에 제 입을 맞췄습니다. 고작해야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접촉일 뿐일텐데도 온 몸이 감전된 것처럼 짜릿짜릿했습니다.

키스라는건 원래 이렇게 기분 좋은 것일까요?

저는 키스를 하는 순간 제 몸 안에 깃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몸이 붕 뜨는 감각과 함께 저도 몰랐던 제 몸에 대한 지식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나갔습니다.

이때까지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어 존재 이유를 모르겠던 날개가 빳빳하게 펴졌고, 머리 위에 솟아있는 자그마한 뿔도 단단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온 몸이 음부가 된 것처럼 민감해졌습니다. 매일같이 주인님을 떠올리며 손으로 수음하는 것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 좋은 고양감이었습니다.

방금 전의 그 쾌감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었던 저는 주인님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대략 십 초가 조금 넘게 키스했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선명하게 아까의 감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입술을 맞추고 있는 동안만큼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기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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