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린. 먹고 싶은게 있으면 옆의 누나에게 바로 말해주면 된단다. 가격은 신경쓰지 말고."
아이린은 조금 망설였지만 내가 사주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 가격을 신경쓰지 말고 고르라고 하자 아이린은 매의 눈으로 디저트를 고르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느끼한 치즈와 초콜릿이 듬뿍 들어간 것들이었지만 아이린은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디저트를 골라갔다.
물론 나도 오랜만에 찾아온 김에 녹차 케이크와 슈크림을 하나씩 골랐다.
아이린은 여섯 개 정도를 골랐고, 나는 직원에게 금화 하나를 팁으로 주었다.
"지금 골랐던 디저트들 테이블에 세팅하고, 가게에 있는 모든 메뉴를 두 개씩 포장해주세요."
설마하니 팁으로 금화를 받을 줄은 몰랐는지 놀란 직원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2층의 창가쪽 테라스로 안내한 그녀는 디저트들을 접시에 담아 먹기 좋게 세팅했다.
그리고 내가 까먹고 음료를 주문하지 않았는데, 직원은 눈치있게 서비스라며 포도 주스와 오렌지 주스를 한 잔씩 갖다주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수도의 풍경을 감상하며 나는 포크로 케이크를 잘라서 찍어먹었다.
내가 먼저 먹는 것을 본 아이린 역시 포크를 들고는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프로쉐 케이크의 고풍스런 풍미에 나는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케이크를 먹었다.
역시 이곳의 디저트는 일품이란 말이지.
괜히 대부분의 여성 잡지에 소개되고, 신작 메뉴에 대한 설명이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 아니었다. 녹차 특유의 은은한 향기와 함께 옅게 스며든 초콜릿이 달콤쌉싸름한 맛을 내고 있었다.
게다가 사르르 녹는 것처럼 부드러운 식감은 얼마든지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린도 나와 비슷하게 느꼈는지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초콜릿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감격하고 있었다.
그렇게 맛있나 싶어 빤히 쳐다보자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자신이 먹던 케이크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내밀었다.
평소 같았으면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아이린이 내민 케이크를 망설임 없이 먹었겠지만, 어른스러워진 아이린의 몸과 자꾸만 이쪽을 힐끔거리는 귀족 영애들의 시선 때문에 나는 주춤거릴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이걸 먹어도 되는걸까? 애초에 아이린은 이게 간접 키스라는 사실을 신경쓰지 않는걸까?
그런 의문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 쳤지만 아이린을 계속 기다리게 할 수도 없었기에 결국 나는 입을 벌려 아이린의 포크에 꽂힌 케이크를 먹었다.
혀에 닿자마자 초콜릿은 끈적하게 녹아내렸다. 입 안을 가득 채우는 달콤한 향기에 눈을 감았다.
동네 과자점에서 파는 싸구려 초콜릿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무엇보다 뒷맛이 깔끔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맛있네."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아이린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귀엽다기 보다는 예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그녀의 외모였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자기 딴에는 숨긴다고 숨긴거겠지만 다들 이쪽을 쳐다보는 걸 알 수 있었다.
대체 저 두사람이 무슨 관계인가 싶어 보다가 아까 아이린이 내게 케이크를 먹여주고는 작게나마 탄성을 지른 소녀들도 몇 명 있었다.
곱게 자란 가문의 여식답게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한창 상상력이 풍부한 시기인만큼 아이린과 내 관계를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수도를 떠날 예정인 나는 굳이 그 착각을 바로잡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앞으로는 볼 일도 없는 사람들인데 그녀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저 복스럽게 잘 먹는 아이린을 보니 절로 내 배가 불러올 따름이었다.
그렇게 케이크를 모두 다 먹고난 다음 아래로 내려가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상자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수군대고 있었다. 아까 내게 안내를 했던 직원이 나왔다.
"이, 이게 저희 매장에 존재하는 94가지의 메뉴를 모두 포장한 것들입니다."
자신도 살면서 이 정도로 많은 케이크를 주문받은 적은 없는지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금화가 가득 담긴 주머니를 하나 던져주었다.
저 정도면 케이크 값으로는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혹시나 싶어 물어보자 그녀는 주머니 안의 금화들을 보고는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이걸 들고가는게 문제인데...
마침 내게는 그저께 마탑에 찾아갔을 때 할아버지에게 받은 새로운 아공간 주머니가 있었다.
전에 쓰던 것을 개량해서 보관할 수 있는 양도 훨씬 많고, 무게 제한 역시 거의 없었다.
산더미같이 쌓여있던 상자들이 순식간에 주머니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어안이 벙벙해진 다른 직원들과 손님들을 뒤로하며 나는 그대로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 다음으로 향한 곳은 극단의 공연장이었다. 꽤나 유명한 유랑 극단으로 제국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연극을 했다.
공연장 벽에 붙어있는 설명에 의하면 이번 연극은 '미녀와 야수'인 모양이었다.
입구에는 표를 판매하는 직원이 있었는데, 자리에 따라 표의 값이 달랐다.
나는 가장 좋은 자리를 두 개 달라고 했고, 직원은 공연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는 특등석의 표를 두 장 주었다.
아이린은 고작해야 공연 한 번 보는데 금화 두 닢이라는 사실에 경악한 것 같았지만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또 돈을 쓰겠는가.
비싼 값을 준 보람이 있는지 우리 자리는 푹신푹신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의자였다.
게다가 공연장을 올려다보는 일반석과 달리 정면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제 값어치를 하고 있었다.
이미 공연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있었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공연이 시작됐다.
어린아이도 알 법한 동화였기에 줄거리는 뻔했다. 하지만 실력 좋은 배우들의 열연에 사람들은 완전히 연극에 빠져들었다.
아이린은 미녀와 야수가 재회하는 장면에서 눈물까지 흘릴 정도였다.
다행히도 다른 사람들 중에서도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아이린은 연극이 끝나고 공연장을 나오는 내내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 정도로 감동적이었던걸까. 물론 공연의 수준이 높기는 했지만 나는 별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에게는 다르게 느껴진 모양이다.
아니면 이런 공연을 접한 것이 처음이라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고.
조금 떨어진 공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아이린은 울음을 그쳤다. 나는 품에 넣어다니던 손수건을 꺼내 벌겋게 부은 눈가를 닦아주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그녀의 뺨에는 눈물자국이 잔뜩 남아있었다.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리고 나서야 아이린은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깨닫고는 양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보, 보지 말아주세요 주인님..."
그녀의 얼굴에는 잔뜩 부은 눈과 눈물 자국이 적나라하게 남아있었다. 그래도 원판이 워낙 예쁜 덕분에 썩 못나 보이지는 않았다.
"연극이 그렇게 감동적이었니?"
"훌쩍...네에... 연극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두 번 봤다간 숨 넘어 가겠는데.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감동적인 것보다는 유희에 가까운 연극을 고르도록 해야겠다. 아무리 연극이 좋아도 이렇게 울어버리면 수습이 어려우니.
아이린이 숨을 돌릴겸, 넓은 공원을 거닐었다. 황실에서 손수 만든 공원은 아이들이 뛰어노는 공터 뿐만 아니라 길을 따라 걷다보면 숲을 가로지를 수 있었기에 꽤나 좋은 산책로였다.
아이린의 손을 붙잡고 공원을 둘러보다보니, 그제서야 나도 이것이 데이트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식사를 하고, 디저트를 먹고, 연극을 보고 산책을 오다니. 영락없는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가 아닌가?
...아니. 그래도 재밌었으니 됐나. 어차피 한동안은 돌아올 일도 없는 곳이었다. 모든 것이 처음인 아이린에게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있었으니 괜찮을 것이다.
"그럼 슬슬 돌아가자꾸나."
돌아가기 전에 델론즈 녀석의 얼굴도 한 번 보려고 했지만 녀석은 연락을 받지 않았다. 아마 다른 일이 있는 것이겠지.
녀석과는 정식으로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었기에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 때 만나기로 했다.
수도의 중심에 있는 텔레포트 게이트로 돌아온 나는 게이트를 지키고 있는 기사들에게 신분증을 제출했다. 그들은 내 신분증을 확인하다가 내 이름을 보고는 흠칫했다.
내 이름이 그렇게 유명한건가. 고작해야 모험가일 뿐인데 기사인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의외였다.
"신분 확인되셨습니다. 저쪽 게이트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기사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쓰고있는 투구를 벗어 고개를 숙였다. 옆에 있던 다른 기사들도 그런 그의 행동을 분명 봤을터인데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검의 극의에 이른 분께 경의를 표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들을 '검의 극의를 깨달은 자'라고 불렀다.
내 본래 직업은 마법사였지만 실제로 모험가로 활동할 때는 검을 자주 사용했다.
단순히 마법으로 몬스터들을 쓸어버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직접 몬스터들을 베고, 찢는 것을 즐겼던 그 때 배운 검술이 어쩌다보니 경지가 높아졌던 것일 뿐.
때문에 검술은 내가 별로 신경도 안 쓰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기사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였던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어쩌면 내가 과거에 해왔던 것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내가 했던 일에 대해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뜻일테니까.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원래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게 아니라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하지 않는가.
분명 아이린을 만나기 전의 나 역시도 속으로는 그런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파티원들에게, 다른 모험가들에게도 잊혀져서는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지는 것. 그것이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제는 상관 없는 이야기다.
지금의 나는 혼자가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기사가 가리킨 게이트 안으로 아이린과 함께 들어가자 잠시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그것도 잠시, 눈을 떠보니 이미 파트론 공작가에 도착해 있었다. 슬슬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기에 서두르지 않으면 이곳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말을 맡겨뒀던 여관에서 말을 되찾은 나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린을 내 등 뒤에 태웠다.
문제가 있다면 수도에 올라갈 때와는 다르게 아이린의 몸에 꽤나 볼륨감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말을 탈 줄 모르는 아이린이었기에 내 등 뒤에 찰싹 달라붙고는 허리를 양 손으로 끌어안았는데, 내 등을 짓누르는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과 내 허벅지 바깥쪽에 닿는 아이린의 매끈한 다리는 내가 말을 모는 것에 쉽사리 집중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도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자꾸만 내 배를 더듬는 것만 같은 아이린의 손길에 저도 모르게 고삐를 잡아당겼고, 수도에 올라갈 때보다 곱절은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바스티안 영지에 도착한 것은 이미 해가 완전히 떨어진 저녁이었다.
그래도 횃불이 세워진 성벽 위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들은 나를 알아보고는 성문을 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