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7화 (167/260)

보통 밤에는 성문을 개방하지 않지만 내가 앨리스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병사들이 알고있는 덕분이었다.

타고있던 말에서 내린 다음 쉽사리 뛰어내리지 못하는 아이린을 안아들어서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주었다.

병사들에게 간단하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타고 있던 말을 돌려주었다.

그들은 경비대장에게 전하겠다는 말과 함께 다시 경계를 서기 위해 돌아갔다. 이미 밤이 늦은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작해야 사흘 정도 집을 비웠을 뿐인데 몇 달 만에 돌아오는 것 같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집이 좋단 말이지.

이미 밤이 깊었기에 나는 간단하게 손과 발만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린 역시 하루 종일 돌아다닌 것 때문에 꽤나 피곤해 보였기에 간단하게 몸을 씻은 다음 푹 자라는 말과 함께 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침대에 누운 나는 금세 곯아떨어졌다.

분명 큰 일을 하나 마무리 지어서 긴장감이 풀려서 그런 것이리라.

수도에서 머무를 때는 몰랐는데, 장거리 여행과 여관에서 투숙을 해서 그런지 돌아온 집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푹신푹신한 침대에 누워있는 몸은 쉽사리 침대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온종일 이렇게 뒹굴거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수도에 올라갔던 가장 큰 이유인 에디스의 파벌에 대한 문제부터 일단락할 필요가 있었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몸을 일으켰다. 신기한 점은 어제부터 자고 일어나면 이상할 정도로 몸이 개운했다.

온 몸의 피로가 싹 씻겨나간 것처럼 몸이 가벼운 것은 오랜만이었다.

이것 역시 아이린의 성장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서큐버스라는 종족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에 단순한 추측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탑에서 영감님들한테 물어보는건데.

아직 이른 아침이었기에 나는 여유롭게 가게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가게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청소를 했기 때문인지 고작 사흘 가게를 비웠을 뿐인데도 먼지가 쌓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진열장에 올려져 있는 포션들을 모두 꺼내 상자에 담아둔 다음 걸레로 진열장 위에 앉은 먼지들을 닦아냈다.

진열장 청소를 끝내고 다시 포션을 세팅하려는 순간 아이린의 방문이 열렸다.

"...으응...주인니임..."

손등으로 눈을 비비적대며 일어난 아이린은 작게 하품을 하더니 내게 다가왔다.

평소처럼 그런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나는 손이 더러운 것을 깨닫고 다가오는 아이린을 슬쩍 피해냈다.

"조금 더 자도 되는데, 벌써 일어났니?"

아직 어린아이에게는 피곤한 일정이었을텐데, 조금 더 자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이린은 그런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내 가슴팍에 안겨서는 평소처럼 얼굴을 비벼댔다.

"하아...주인님 냄새..."

......만약 다른 사람들이 이 광경을 봤다면 영락없이 경비병들에게 잡혀가겠지.

전과 다르게 성숙해진 아이린의 몸이었기에 그런 오해를 살 일도 많아질 것 같았다.

잠옷으로 입은 얇은 셔츠 너머로도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봉긋한 가슴과, 예쁘게 쭉 뻗은 다리와 엉덩이라인. 거기다 어딘가 요염하게 느껴지기 까지하는 눈웃음까지.

완전히 숙녀가 다 된 아이린을 본 나는 기쁨과 착잡함을 동시에 느꼈다.

처음 만났을 때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공허한 눈을 하고 있던 아이린이 이렇게 어리광을 부릴 정도로 밝아졌다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아이린이 너무 내게만 집착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아이린은 또래 남자애들한테도 관심이 없어보이고.'

가끔씩 저녁을 먹을 때 아이린에게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아이린은 한 번도 관심있는 남자애나 남자친구에 대해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어쩌면 단순히 내게는 말하기 부끄러운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것 치고는 바스티안 영지의 처녀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바크를 비롯한 잘생긴 청년들에게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한창 연애에 관심이 많은 나이일텐데 말이다.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

'누군진 몰라도 변변찮은 놈이면 아주 그냥...'

아이린을 힘들게 할 놈이라면 내가 몰래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아이린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니 그런 실수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다.

씻고 온 아이린은 나를 도와 가게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창고에 있던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와서는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역시 몸이 성장했다고는 해도 아이린의 성격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아이린과 함께 한 시간 정도 청소를 하자 평소처럼 말끔한 가게로 돌아왔다.

모험가들이 마시는 포션을 만드는 곳에 먼지가 쌓여있는 것은 음식점에서 바퀴벌레가 나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청소를 끝내고 서랍에 거스름돈으로 사용할 은화와 동화를 넉넉하게 채워넣었다.

잠시 후에는 가게 안이 단골들로 가득찼다. 미리 준비해놨던 해독제와 하급 포션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아무래도 자리를 비운 동안 포션을 수급할 다른 방도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

모험가들에게 있어서 포션은 여벌의 목숨이나 다름 없으니 특히나 신경을 쓰는 것이겠지. 사제를 데리고 다니는 방법도 있지만 스텔라처럼 실력 좋은 사제를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요원한 일이었다.

애초에 신전 소속의 사제가 모험가 파티에 고정으로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영지 주변에 언데드 몬스터들이 출몰하거나, 레이스와 같은 마법이나 정화 주문이 아니면 퇴치 할 수 없는 몬스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쉽사리 사제들은 나서지 않았다.

나도 스텔라를 처음만났던게 공동 묘지에 나타난 레이스 무리들을 처치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잔뜩 몰려들었던 단골들은 남아있던 포션들을 싹 쓸어가고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텅 빈 진열장과는 반대로 서랍은 은화와 동화로 가득차 있었다.

평소보다는 조금 늦은 아침 식사를 차렸다. 물론 어제 돌아오자마자 곯아떨어졌기에 건너편의 크루거의 가게에서 사온 빵으로 간단하게 끼니를 때웠다.

손님이 거의 없어 한가한 점심 무렵, 나는 아이린에게 가게를 보게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이마를 내미는 아이린에게 입을 맞춰줘야 했던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아이린은 이제 나 없이도 거뜬히 가게를 볼 수 있었기에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에디스가 어디에 있을지 고민하던 나는 먼저 바스티안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에디스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오랜만에 앨리스의 얼굴이라도 볼 생각이었다.

황실 기사단과 함께 경비를 서고 있는 기사들이 보였지만 전에 겪었던 마나 탈진의 후유증이 사라진 나는 여유롭게 담을 넘어 숨어들었다.

아마 내 기척을 잡아내려면 바스티안 가주 정도는 되어야 하겠지.

바스티안 가문의 정원을 지나 슬쩍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걸어다니는 메이드들과 시종들은 쉴 새 없이 접시를 나르고 있었다.

'점심 식사 중인가?'

하긴. 하루에 두 끼를 먹는게 보통인 평민들과 달리 귀족들은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먹었다. 나 같은 경우에도 시간이 되면 점심을 먹지만, 오늘처럼 볼 일이 있는 경우에는 생략하기도 했다.

대신 아이린에게는 그녀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간식으로 하나 꺼내주고 왔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복도를 서성거리는 것도 그러니 앨리스의 방에 들어가 있기로 했다. 귀빈의 식사 준비 때문인지 메이드들은 대부분 1층에 있었고, 앨리스의 방이 위치한 2층에는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나는 방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조금 의아했지만 그대로 들어가고는 다시 문을 닫았다.

"...점심은 됐다고 했잖아요."

앨리스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귀족 영애가 보일만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이 곳은 그녀의 방이니 그런것이겠지.

"자꾸만 식사를 거르시면 몸에 안 좋습니다. 아가씨."

장난기가 동한 나는 최대한 메이드들의 말투를 흉내내 보았고, 내 목소리를 들은 앨리스가 깜짝 놀라서는 황급히 몸을 뒤집다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빠악! 하는 소리가 크게 들린 것을 보면 머리를 바닥에 꽤나 세게 찧은 모양이었다.

"아흑...으으..."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 하는 앨리스를 보며 피식 웃은 나는 치유 마법을 영창해주었다. 스텔라만큼은 아니어도 고통을 멎게 해줄 수 있는 정도는 됐다.

"뭐하시는 겁니까? 애도 아니고."

설마하니 저렇게 극적인 반응을 보여줄 줄은 몰랐던 내가 핀잔을 주자 발끈한 앨리스가 내게 화를 냈다.

"그건 제가 할 소리거든요! 대체 여긴 어떻게 들어온거에요? 왕실 기사단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었을텐데!"

"은신 마법과 환각 마법을 함께 사용하면 눈속임 정도는 쉽습니다."

내 즉답에 앨리스는 주먹을 꽉 쥔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도 화를 가라앉힌 그녀는 다시 침대에 주저앉으며 물었다.

"그래서 왜 찾아온거에요? 말이라면 이미 돌려받았다고 경비대장한테 보고가 들어왔는데."

"감사 인사도 하고, 공적인 용건도 있어서 말입니다. 이건 선물입니다."

나는 옆구리에 차고 있던 아공간 주머니에서 케이크가 담긴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각기 다른 맛의 케이크 8조각이 담겨있었다.

"수도에 있는 고급 과자점 '프로쉐'는 아시죠? 거기서 직접 사온 것들입니다. 한 번 드셔 보십시오."

상자에 함께 넣어뒀던 포크를 내밀자 앨리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무리 병상에서 오랬동안 누워있던 앨리스라고는 해도 그녀 역시 여자였다.

특히 평소에 케이크나 고급 다과를 먹을 기회가 없는 평민들과 달리 앨리스는 몇 번인가 먹어본 적이 있었기에 프로쉐의 위명에 대해 더욱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흠. 루디 씨가 사온 성의도 있으니 거절하지 않을게요."

점심은 됐다고 할 때는 언제고, 내게서 포크를 낚아챈 앨리스는 케이크 끝부분을 잘라냈다.

평소에 몸에 베인 예절 때문인지 디저트하나 먹는 것에도 그녀에게는 기품이 넘쳐흘렀다.

잘라낸 부분을 포크로 찍은 그녀는 조심스레 입 안에 케이크를 밀어넣었고, 잠시 우물우물거리다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나름대로 표정을 관리하려는 것 같았지만 이미 그녀의 입꼬리는 잔뜩 올라가 있었다.

"마음에 드신 모양이군요. 다행입니다."

"...프로쉐의 케이크가 맛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직접 먹어보니 차원이 다르네요."

"제 가게에 넉넉하게 남아있으니 먹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찾아오십시오."

"정말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낸 앨리스가 그제서야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

역시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하는 것은 신분, 나이 따질 것 없이 여자 모두에게 공통적인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상대를 화나게 한다면 반드시 케이크를 사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제가 언제 거짓말 한 적 있습니까. 걱정 말고 오십시오."

앨리스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는걸 보니 어지간히도 좋은 모양이었다.

꽤나 좋은 말을 빌려준 것도 있고, 앨리스에게는 여러모로 신세를 졌으니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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