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168/260)

"그럼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죠. 지금 에디... 황녀님은 어디 계십니까?"

나도 모르게 에디스라고 부를 뻔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말을 바꿨다. 에디스도 일단은 제국의 황녀인만큼 귀족인 앨리스 앞에서는 예의를 갖춰야 했다.

내가 벌을 받는 것은 상관없지만 평민인 내가 황녀를 마음대로 부른는 것을 방관한 앨리스도 처벌을 받을테니까.

앨리스는 갑자기 황녀의 행방을 묻는 내가 수상해 보였는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황녀님은 지금 식당에서 아버지와 황자님과 함께 식사하고 계실거에요. 그런데 황녀님은 왜 찾는거에요?"

"지난번에 황녀님이 저희 가게에 찾아오셨을 때 약속한게 있습니다."

"...정말이지. 빠지는 데가 없으시네요."

앨리스는 어이없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가 자기 저택에서 자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면 앨리스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지만 병상에서 일어난지 얼마 안 된 소녀를 심장마비에 걸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에디스의 비밀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 자살을 시도하려 했다는 것은 남에게 말하기에 썩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남의 비밀을 떠벌리고 다닐 정도로 입이 가볍지는 않았다.

앨리스 역시 더 이상 캐물으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알아서 잘 하시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주세요. 상대는 제국을 호령하는 황제의 자식 중 하나인 황녀님이니까요."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오히려 황녀가 내게 매달리는 입장이었으니까. 지난번에 내 가게에 찾아와서 모험가 자매와 이야기를 나눈 뒤로는 성격도 조금 바뀐 것 같았다.

자신의 힘든 상황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생기며 조금 더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이겠지.

"그래도 조심하세요. 저희 아버지 눈에 띄었다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아. 그러고보니 지금 저택에는 앨리스의 아버지인 바스티안 가주 역시 있었다.

황실 기사단이야 너끈히 속일 수 있었지만,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던 가주라면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알겠습니다. 주의하도록하지요."

사실 황녀를 내 가게로 찾아오는 방법이 가장 안전하지만, 황녀에게 연락할 수단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앨리스와의 친분이야 내가 포션으로 그녀의 목숨을 구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황녀와 친분이 있는 것은 전혀 이야기가 달랐으니까.

나는 앨리스의 방에서 식사가 끝난 에디스와 황자가 방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앨리스도 처음에는 내 눈치를 봤지만 결국은 참지 못하고 남아있던 케이크를 오물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저렇게 많이 먹으면 살찔텐데.

하지만 이 말이 여자들에게 얼마나 분노를 일으키는지 알고 있던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행복을 즐기고 있는데 굳이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고보니 루디 씨도 황자에게 영입 제의를 받으셨다면서요?"

"그랬었죠. 하지만 거절했습니다."

"루디 씨라면 그럴 것 같았어요. 그래도 조심하세요. 황자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명석한 아이에요."

앨리스도 황자에 대해 뭔가 알게 된 사실이 있는 것일까?

물론 나도 다분히 정치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파벌에 영입 의사를 나타내는 황자를 보고 그런 느낌을 받기는 했다.

고작해야 열 살 남짓의 어린애가 할 법한 행동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인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론으로 배운 것과 실전은 분명한 차이가 있으니까.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속여넘길 수 있더라도, 가식이나 위선이란 것을 이미 알고있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역효과가 날 것이다.

나중에 한 번 호되게 겪기 전까지 그걸 깨우치기는 요원한 일이겠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앨리스가 세 번째 케이크 조각을 해치웠을 때가 되자 복도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마 황자와 황녀의 방 앞에는 메이드나 기사들이 지키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에 나는 지난번처럼 창문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갑자기 창가로 향하는 나를 본 앨리스가 말리려 했지만 나는 이미 발코니에서 뛰어내렸다.

물론 추락하는 일은 없었다. 플라이 마법으로 여유롭게 허공을 걸어 에디스의 방에 도착한 나는 사뿐히 착지했다.

이제 막 방에 돌아온 에디스는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다행히도 비명을 지르기 전에 내가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하십시오."

잠시 후 에디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나서야 나는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이 저택의 방음이 얼마나 잘 되는지는 몰라도, 혹시나 목소리가 새어날 것을 대비해 방음 마법을 발동시켰다.

"...대체 어딜 갔다 온거에요? 다음날 가게에 찾아가봐도 아무도 없길래 놀랐잖아요."

나를 질책하는 어조였지만 내게는 귀여운 아기고양이가 앙칼지게 구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에디스님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잠시 수도에 올라갔다 왔습니다. 덕분에 상당한 소득도 있었고요."

"제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요?"

에디스는 이해가 되지 않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슬슬 내가 세웠던 계획에 대해 설명할 때라는 것을 느꼈다.

"중요한 것은 다른 황족분들이 에디스님을 핍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잖습니까. 가장 단순명료한 방법은 다른 황족들이 에디스님을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파벌을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기본적으로 왕위 계승은 장남에게 이어지는 것이 정상이지만 가끔씩 피 튀기는 암투를 벌인 끝에 차남이나 삼남이 왕좌를 차지하는 것도 드물지 않았다.

무엇보다 제국의 황제는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후계를 정하지 않았다. 그 말은 황족이라면 누구에게나 기회가 남아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황자들의 왕위 계승권을 위협할 정도로 힘을 가지고 있다면 결국 기회는 에디스에게 볼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황제가 뒤바뀌는 '킹 메이커(King Maker'의 역할이 되거나, 어쩌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겠지.

물론 에디스의 성격상 황제가 되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자신이 그렇게 핍박하던 황녀에게 비굴하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것이다.

"이게 첫 번째 방법입니다."

이미 에디스를 지지하는 파벌은 제국 최대 규모였다.

늘 중립을 고집하던 적색 마탑의 지지, 그 뿐만 아니라 A랭크 길드 네 곳, B랭크 길드 일곱 곳, C랭크 길드 세 곳이 협력했다.

이 파벌에 가장 큰 의미는 돈을 받고 목숨을 받치는 용병단이 아닌 자유를 추구하던 모험가들의 길드들이라는 점이었다.

아마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던 마탑과 모험가들이 에디스를 지지하는지 관심을 가지게 되겠지.

그것이 내가 노리는 점이었다.

사람들이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4황녀인 에디스가 1황자나 2황자처럼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리도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에디스에게 충성하는가?

정말로 에디스가 황제의 자질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을 사람들에게 퍼뜨린다.

"물론 이렇게 되면 본격적으로 황궁의 암투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위협에 시달릴지도 모르지요."

에디스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내가 제안한 첫 번째 방법을 거절했다.

"그 빌어먹을 인간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것은 좋지만... 저는 황제의 자리에 관심이 없어요. 그럴 재목도 아니구요."

"그럼 두 번째 방법이군요."

두 번째 방법은 첫 번째 방법보다 간단했다.

에디스가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면 된다. 이미 수도에는 새로운 파벌에 대한 소문이 쫙 퍼져 있었다.

귀가 있는 황족이라면 지금쯤 갑자기 튀어나온 에디스의 파벌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겠지.

이런 상황에서 에디스가 왕위 계승권을 포기해버리면? 다른 황자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겠지.

물론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다고 해서 그녀의 파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전처럼 에디스를 핍박하는 짓은 못할 것이다.

1황자나 2황자조차 건드리기 힘든 파벌의 주인이 된 에디스를 건드릴 정도로 간이 큰 놈이 있다면 내가 직접 손을 봐줄 의향도 있었다.

물론 이 방법은 에디스가 왕위 계승권에 미련이 없을 때만 사용할 수 있었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다고해서 황족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일말의 기대감은 많은 사람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곤 했다.

아마 에디스의 동생인 지크 역시도 그런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테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에디스가 두 번째 방법 역시도 거절한다면 나는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 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에디스가 두 번째 방법을 받아들여주기를 바랬다.

이미 수도에 소문이 퍼진만큼 황자들이 에디스를 견제하기 시작할테고, 어쩌면 극단적인 행동을 벌일지도 모른다.

황실 기사단과 소드마스터인 바스티안 가주가 있다고는 해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좋아요. 어차피 제게 있어서 왕위 계승권은 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이번 일로 홀가분하게 던져버릴 수 있겠네요."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다행입니다."

나는 미리 준비해온 종이를 꺼내 탁자 위에 폈다. 종이에 적힌 내용을 대충 훑어본 에디스가 혀를 내둘렀다.

"제가 수락할 줄 알고 미리 준비해온 거에요?"

"기왕이면 빠르게 해치우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종이에는 에디스가 왕위 쟁탈전에 관심이 없으며, 계승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을 적당히 포장해서 적어 놓았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방금 전 앨리스에게 조금 도움을 받았다.

평생을 모험가로 굴러다니던 내가 귀족들의 공문서에 대해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대략적인 내용을 잡아놓고, 앨리스가 흔히 귀족들이 사용하는 방식으로 수정해주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에디스는 생각보다 문서의 양식이 괜찮은 것을 보고 혹시 귀족 출신인 것이 아니냐고 물어왔지만 말이다.

물론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고, 에디스는 좀 말해주면 덧나냐고 투덜댔다.

내가 내민 펜을 받은 그녀는 서류의 오른쪽 아래에 자신의 사인을 휘갈겨썼다.

"나중에 황실기사단 중 한 명에게 황궁까지 전달시키면 될겁니다."

"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이걸로 에디스에 대한 일은 마무리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