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파벌 싸움에 난입한 에디스 때문에 가슴 졸이고 있을 1황자와 2황자는 나중에 도착한 이 서류를 보고 무슨 생각을할까?
그리고 이때까지 에디스를 핍박해왔던 다른 황족들은 혹시라도 그녀가 자신에게 복수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다.
부디 그 두려움을 오랫동안 갖고 있기를 바란다.
"...서 있지만 말고 여기 앉으세요."
에디스는 자신의 옆자리를 내게 권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더 없는 영광이겠지만 지난번에 이미 내 가게에서 함께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신 적이 있는 내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사흘이나 안 보이길래 혹시 해결해준다고하고 도망가버린 것은 아닐까...싶었는데. 의심해서 미안해요."
설마하니 황녀에게 사과를 받게될 줄은 몰랐다.
귀족들은 보통 자신의 실수는 은근슬쩍 넘어가고, 공은 부풀리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아닙니다. 에디스님의 일인데도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제가 더 죄송하죠."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부터 황녀와 나는 비즈니스 관계였다. 계약이 끝난 이상 이야기를 나눌 공통된 화제는 없었다.
에디스는 입을 달싹거리고 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지 망설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던 에디스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다가 입을 열었다.
"...흠흠. 이제 저를 그냥 편하게 에디스라고 불러도 좋아요."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당연하게도 황족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즉결처형감이었다. 심지어 귀족도 아닌 내가 황녀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거절하겠습니다."
내가 칼같이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에디스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비록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고는 하나, 제국의 황녀님을 그렇게 불렀다간 제 목이 남아나질 않을테니까요."
"저희 둘만 있을 때 정도는 괜찮잖아요. 어차피 저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습관만큼 무서운 것도 없으니까요. 실수로라도 다름 사람들 앞에서 그랬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르잖습니까."
지극히 상식적인 내 답변이었지만 에디스는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 그럼 황녀의 명령이에요! 앞으로는 저를 에디스라고 부르도록 하세요!"
결국에는 저런 소리까지 해댔다. 어린애도 아니고 왜 저러는지 원.
"대체 왜 그렇게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집착하시는 겁니까?"
내 질문에 입을 다물었던 에디스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야 이름으로 부르는게 더...아뇨. 됐으니까 아무튼 앞으로는 존댓말 금지에요."
정말이지 속을 알 수가 없는 황녀님이었다.
"알았어. 에디스. 이러면 되지?"
그제서야 에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반말을 듣는게 왜 더 좋다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나같이 힘없는 시민은 권력의 횡포에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좋아요. 앞으로도 그렇게 부르도록 하세요."
퍽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고있는 에디스였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이미 그녀를 기다리면서 꽤나 시간을 지체했다. 홀로 가게를 보고 있을 아이린에게 돌아가야 했다.
"잠깐만요. 벌써 가게요?"
"더 남아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에디스의 문제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고, 용건도 끝났다.
굳이 언제 들킬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며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에디스는 덥썩 내 손을 잡았다.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요."
"메이드들에게 제가 무단침입했다는걸 들킬 일 있습니까. 됐습니다."
"그, 그럼..."
에디스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봤지만 나를 붙잡아놓을 명분이 없는지 내 손을 잡고있는 그녀의 손에 힘이 점점 빠져나갔다.
결국 내 손을 놓은 그녀는 고개를 숙여버렸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반쯤 들었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였다.
"대체 왜 그러시는겁니까. 저하고 할 이야기라고 해봤자 재미없는 것들 뿐일텐데요."
에디스가 무슨 마리안처럼 내 모험담에 흥미를 가진 것도 아니고, 모험가로 활동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나는 정말 별볼일 없는 놈이었다.
말재주가 좋은 것도 아니고, 외모가 잘생긴 것도 아니었다. 에디스가 굳이 나를 잡아놓으려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에디스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미안하고, 고마워서요."
"네?"
"분명 제가 해결해야하는 제 일인데, 저는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당신의 도움만 받은게 너무 한심해서요.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저를 도와준 당신이 고마워서요. 감사인사를 제대로 하고 싶어서 그랬어요."
예상 밖의 대답에 나도 조금 놀랐다.
"보답을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니니 신경쓰지 마십시오."
덕분에 오랜만에 수도에 올라가서 예전 동료들도 볼 수 있었고, 먹거리나 공연도 즐길 수 있었다.
"저는 다른 황족들처럼 권력이나 재물은 가진 것은 아니라서 당신에게 큰 보상을 해줄 수는 없어요. 대신..."
과연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할까 궁금해하던 나는 문득 이런 상황에 데자뷰를 느꼈다.
"적어도 제가 이 영지에 머무르는 동안은, 절 당신 마음대로 다뤄도 좋아요."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았다. 자기 몸을 마음대로 다뤄도 된다고 해놓고 먼저 키스를 하다니.
단순히 네가 키스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냐고 따져묻고 싶었지만, 에디스의 입술은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귀족 영애, 성녀에 이어서 황녀까지 관계를 맺다니.
이러다 정말로 칼빵 맞고 소리소문 없이 가는건 아니겠지.
에디스는 눈을 감은 채 내 목을 자신의 양 팔로 감아 도망치지 못하게했다.
이미 키스를 한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강을 넘어와 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나 역시 멈출 생각은 없었다.
에디스의 풋내기같은 키스를 받아내주며 이 뜨거운 열기가 흘러나오는 분위기를 즐겼다. 황녀라고 해도 평민들과 다른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달랐다.
'가장 고귀한 자'로 불리우는 황족과 입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두고두고 술안주로 써먹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정말로 그런짓을 했다간 어느새 나타난 황실기사단에게 목이 날라가겠지만.
"츕...츄웁...하아..."
처음하는 키스치고는 나름 괜찮았다.
첫키스라는 것을 어떻게 깨달았냐면, 키스가 끝나고 저렇게 잔뜩 붉어진 얼굴로 부끄러워하는 처녀들을 꽤나 많이 봤거든.
숨을 몰아쉬며 몸이 슬슬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에디스를 보며 이 자리에서 그녀의 몸을 취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간신히 이성을 붙잡았다.
여기서 더 하는 것은 리스크가 컸다. 결국 나는 아쉬움을 삼킨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저희 가게에 찾아오시면 나누도록 하죠.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에디스가 이 영지를 떠나기까지 시간은 보름도 넘게 남아있었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다.
에디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창가에서 뛰어내렸다. 풀숲에 가볍게 착지하고는 담벼락을 타고 여유롭게 저택을 빠져나갔다.
가게로 돌아가는 내내 입을 맞추고 있던 에디스의 얼굴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비단처럼 흘러내리는 흑발과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잔뜩 붉어진 뺨.
저쪽에서 먼저 이렇게 다가올 줄은 몰랐지만 마냥 나쁘지는 않았다.
적어도 에디스가 내게 아무런 호감도 없는데 단순히 보답을 하기 위해 이런 짓을 한 것은 아닐터였다. 그랬다면 키스가 끝난 직후에 그런 황홀한 표정을 지을리가 없었다.
부디 에디스와의 관계가 꼬리를 잡혀서 황실기사단에게 쫓기는 일만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가게에 도착할 때 쯤에는 슬슬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아침은 단출하게 먹었으니 저녁은 조금 힘을 써도 될 것 같다.
저녁 메뉴를 구상하며 문을 연 나는 평소처럼 달려나온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갔다 올때마다 이러니 귀여운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주인님!"
그렇게 한참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데 어째 아이린의 반응이 평소와 달랐다.
평소 같았으면 냄새를 맡아대는 아이린에게 내가 '별로 좋은 냄새도 안 나는데 맡지마렴.'이라고 하고, 아이린은 '그래도 주인님 냄새가 좋은걸요!'라고 외치면서 달라붙곤 했는데 지금의 아이린은 평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평소처럼 내게 안긴 아이린이었지만, 내 몸의 냄새를 몇 번 맡더니 갑자기 내 셔츠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주인님. 누구 만나고 오셨어요?"
나는 아이린과 눈을 마주치고 움찔했다.
아이린은 싸늘하게 식은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 눈은 죽어있는데 입꼬리는 평소처럼 올라가 있는게 더 무서웠다.
어딘가 섬뜩한 분위기까지 풍기는 아이린은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성장한 아이린의 가슴이 내 허리에 닿는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것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눈 앞의 아이린은 마치 남편이 바람을 피는 것은 아닌지 취조하는 아내같았다.
"오랜만에 친구 얼굴 좀 보고 왔단다."
"흐응. 그 친구분은 여자인가요?"
남자라고 거짓말을 하려던 나는 갑자기 경종을 울려대는 본능의 경고에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아이린에게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래. 여자란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니?"
"...아니에요. 그냥 주인님이 평소에 어떤 사람들을 만나시는지 궁금해서요."
다행히도 내가 고른 것이 정답이었는지 아이린은 평소처럼 싱긋 미소를 지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방금 전의 아이린은 조금 무서웠다.
모험가로 활동하면서 온갖 괴물들을 만나본 나였지만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었다.
어쩐지 아이린의 육체가 성장하며 정신적으로도 성장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조금 안 좋은쪽으로 성장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이린은 방금 전의 그 싸늘한 태도가 거짓말인것처럼 활발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잔뜩 신이 나서는 오늘 찾아왔던 손님들에 대한 이야기와, 자신이 팔았던 포션들의 매출을 자랑했다.
자신을 칭찬해달라고 열심히 어필하는 아이린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그래도 방금 전의 아이린이 쉽사리 기억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내가 여러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더라도, 아이린에게만큼은 절대 들키지 말자고 결심했다.